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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은혜와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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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감사 (눅 17:11~19)

미국 뉴욕 맨하탄에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몇 층인지 아시나요? 
그러면 그 빌딩이 왜 102층으로 지어졌는지도 아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남자가 78명, 여자가 24명 합계 102명이었습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102층으로 지어진 것은, 
이렇게 처음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102명은 대부분 도시 출신들이었습니다. 
농사짓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 첫 해에 농사를 지었으나 
수확은 시원치 못했습니다. 

장차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막막했습니다. 
다시금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좌절해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힘들 때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쯤 우리의 생각을 고쳐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물론 우리가 영국에서 살 때보다도 형편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조건들을 찾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정치의 자유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눈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금식을 선포하지 말고 차라리 감사를 선포하십시다. 
우리가 감사의 주간을 정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 많은, 더 큰, 더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주간을 선포하지 않고 대신 감사주간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하기에 드린 감사가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믿음으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어느 해보다 더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한 이때에 
추수감사주일이 우리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신앙을 본받아, 
어려움 속에서도 진정한 감사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은혜로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숨을 쉴 수 있다면 이것도 은혜입니다. 
산소마스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입으로 물을 마실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호스를 통해서만 물과 음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자신의 발로 걸어서 예배당을 들어왔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휠체어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동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휠체어를 타고라도 교회에 왔다면 감사하기 바랍니다. 
휠체어마저 탈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인데, 
이왕이면 멋지게, 의미 있게, 가치 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평범하게 살다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가는 인생이기보다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교훈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공부를 많이 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어야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은혜를 깨닫고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고침 받은 기적의 역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문드러져도 감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족들과도 함께 살지 못합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병으로 취급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했고, 외로웠습니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멀리 서서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쳐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할 뿐입니다. 
자기들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쉽게 고쳐지는 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14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곧 
‘네 병이 나았느니라.’하는 선언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13장에 보면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야 합니다. 
정하다, 부정하다는 진단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란 말씀은 ‘나았으니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직 병이 낫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순종이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아만 장군도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나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믿고 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하면서도 안 믿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목사님과 술집 주인”이란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상가 3층에 세 들어 있었는데, 그 건물 지하에는 술집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교인들은 
날마다 ‘술집이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그 술집에 불이 나서 망하게 되었답니다. 
그러자 술집 주인이 교회를 상대로 고소를 했습니다. 

교회가 기도해서 망하게 되었으니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판정에서 목사님은 ‘우리가 기도해서 불이 난 게 아닙니다.’ 변명했대요.
도대체 누구의 믿음이 더 좋은 것입니까?   

어쨌든 나병 환자 열 명은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불치의 병이 치료를 받았는데 감사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이 꼬집고 있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 중에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모두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불치의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거리가 없어서 감사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거리가 넘치지만, 감사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감사한 사람은 유독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같은 은혜를 받았어도 이방인은 감사할 줄 아는데 
오히려 유대인이 감사하지 못한다고 꼬집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조금이라도 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오히려 교회에 안 다니는 세상 사람들은 감사하는데
오히려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감사를 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받은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으나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은혜를 헤아려 봅시다. 그리고 감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 와서 감사한 이 사람은 육신의 질병만 아니라 
영적인 질병까지 치료받는 구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한국유리의 사장이었던 최태섭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쓰신 자서전적인 책 [사랑에 빚진 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그분이 겪은 감동스런 사건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

6.25 전쟁이 나서 모두 피난을 가는 때, 대출금을 갚으러 은행에 갔습니다. 
은행직원도 다 떠나고 한 사람만이 남아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빚 갚으러 왔다고 하니까, 귀찮아하면서 나중에 갚으라고 하더랍니다. 

남들은 돈 떼어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텐데
돈을 갚겠다고 하니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은행직원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영수증을 써 주었습니다. 
그러나 최 장로님은 그동안 빌려주어서 잘썼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얼마 지나서 생선을 군에 납품하는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생선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근해에서는 그 많은 양을 잡을 수 없고, 원해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원양어선을 구입해야 하는데 그런 돈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끝에 그 동안 거래했던 그 은행에 가서 사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담보 없이는 대출을 해 줄 수 없다는 원칙적인 말만 듣게 됐습니다.
그가 통 사정을 하면서 옥신각신 하는데 은행장이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냐?’ 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니
최 회장은 옛날에 써 주었던 영수증을 내 놓으면서 ‘반드시 갚겠다.’고 하니
은행장은 그 영수증을 보고 반가워하면서 
“바로 당신이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받고, 당신을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당신같이 신용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대출을 해 드려야죠.”
그래서 수억의 돈을 대출받아 큰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행동할 때,
정직하고 신용 있게 살 수 있으며 이런 사람에게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은혜를 헤아려 감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음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을 잃었으나 겸손을 배웠다면 감사하기 바랍니다. 
건강을 잃었으나 믿음을 얻었다면 이도 감사한 일입니다. 
풍성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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