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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행복한 사람 (눅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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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눅 7:36~50)
  

두 마을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감사촌에 살고, 한 사람은 불평촌에 삽니다. 
불평촌에 사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불만이고, 분노하고, 근심합니다. 
세계적인 문호 버나드 쇼우가 자기에게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자기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많은데 이것이 비극이며,
둘째 비극은 자기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때에 절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안 되어도 비극, 잘 되어도 비극입니다. 
불평촌의 사람은 주소가 그 동네이기 때문에 이 비극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빨리 이사를 가야합니다. 어디로? 감사촌으로요.

감사촌에 사는 사람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합니다. 
봄에는 꽃 피는 것이 감사하고, 여름에는 무성한 것이 감사하고, 
가을에는 낙엽이 감사하고, 겨울에는 뿌리가 감사합니다. 
무에서 출발한다면 모두가 감사한 것입니다. 

마음의 비교점을 제로에다 두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무에 비하면 옷 한 벌, 얻어먹는 밥 한 끼가 감사한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내가 건강한 것이 기적 같습니다. 
소경에 비하면 눈을 가진 사람이 고등고시에 합격한 것보다 감사합니다. 
죽은 사람들에 비하면, 지금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가지만으로도 밤새도록 찬송하고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인생의 열매 중에서 가장 귀한 열매는 고난 속에서도 나오는 감사입니다. 
은혜를 알고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는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다가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낯 뜨거운 장면입니다. 

이때 바리새인의 마음속의 생각이 어떤 것입니까? 
39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이 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두 사람이 빚을 졌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모두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면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참고로 데나리온은 장정 한 사람의 하루 품삯입니다.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그 말이 옳다’고 하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44절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여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절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절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왜 이 여인은 이렇게 하였습니까? 
그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죄를 지었고, 그 죄를 용서받았다면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십니까?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많으십니까? 
혹 적게 사랑한다면 죄를 적게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까? 
객관적으로 죄를 많이 혹은 적게 지은 것을 계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관적으로 자기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느냐입니다. 
실제는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자기는 죄가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실제는 죄를 적게 지었지만 ‘자기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입니까?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소개가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사역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의 사역 초기에는 
자신의 사도권을 강하게 주장을 했었습니다. 

갈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왜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전15:9에 보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아주 자세를 낮추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자기가 사도라고 주장을 합니다.  

엡3:8로 가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자 함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여기서는 자신을 사도라고 하지 않고 그냥 일반 성도 중에서도 작은 자입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이 점점 못된 사람이 되어 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울은 점점 자신의 죄를 더 많이 발견하고 
더욱 더 겸손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점점 더 은혜를 더 많이 깨닫게 되었고, 
이로 인한 감사가 더욱 넘쳤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자기만큼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면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기 시작하면 자꾸만 자기의 죄가 보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신 은혜가 점점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 많이 깨달으면,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감사도 더욱 넘치게 됩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죄를 용서받은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하면 주님께 더 많은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절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용서받은 죄가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죄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더욱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많고 적음은 객관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정도에 비례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더 큰 죄를 용서받았다고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 은혜를 많이 깨닫고 주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되길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성숙한 사람은 내년에 베풀어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수확의 법칙이 있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오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가 적으면 적게 거두게 되고, 감사가 많으면 많이 거두게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헌금을 많이 거두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종자는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둔 곡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것만 골라서 내년에 뿌릴 씨앗으로 삼습니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경제 여건이 나빠지고, 살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줄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좋은 것들을 골라서 많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해에 더욱 많은 것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제가 우리교회에 와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추수감사가 너무나 약하다는 겁니다.
많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추수감사절을 일 년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즉 한 달치 봉급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추수감사절이 그 때 그 때, 형편에 따라 드려서는 안 됩니다. 
즉 형편이 좀 나으면 좀 더 많이 드리고, 형편이 어려우면 적게 드려서는 안 돼요.
일 년 동안 잘 준비하고 정성을 기울여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은 추수감사절을 위해서 적금을 붓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내년에는 꼭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년 년 초에는 저금통을 하나씩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감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니 감사를 깨달을 때마다 모아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 년 동안 모아서 추수감사절을 지킨다면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올해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내년을 위해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감사의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가능한 한 많이 심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각 가정의 경제형편은 다릅니다. 
그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습관을 따라 하지 마시고, 정성과 성의를 담으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마음과 함께, 여러분 마음의 기대를 담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열매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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