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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9대 1의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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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1의 감사 (눅 17:11~19)


사람은 누구나 다 시간이 지나면 늙습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대략 30조 개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세포들은 계속 분열해서 새로운 세포를 만들기도 하고 늙어서 죽기도 합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포의 속도가 세포의 죽는 속도보다 빠르면 사람이 성장하는 겁니다. 반대로 세포의 죽는 속도가 세포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빠르면 노화가 되는 겁니다. 과학자들은 사람의노화되는 원인을 찾아 처방함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젊고 오래살 수 있도록 무던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육체가 늙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늙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유명한 랍비에게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어떤 경우에 처해도 배움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랍비는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쉽게 늙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시들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미 마음이 늙어가는 징후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마음의 건강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미국의 한 부흥사가 집회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그 버스에 아주 뚱뚱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개구쟁이 어린 아이 다섯을 데리고 올라탔습니다. 아이들은 보통 개구쟁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억지를 부르는 아이, 울며 불며 떼를 쓰는 아이, 버스 이곳 저곳을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아이,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소리 지르며 떠드는 아이들로 인해 버스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뚱뚱한 아주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을 향해 큰 소리로 욕하고 아이들을 험악하게 때리고 하는 가운데 더 시끄러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부흥사는 피곤해서 좀 쉬기도 하고 집회에서 전할 말씀도 묵상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흥사는 금방이라도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마음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부흥사가 순간적으로 이 상황에서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열 명의 문둥 병자가 예수님을 통해 치료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치료되는 기적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정작 강조하는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은 서로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이들은 만나면 서로 미워하며 험악하게 싸웠습니다. 특히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역 경계선을 중심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일들이 허다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라고 표현한 지역은 지역과 인종적인 갈등과 사회적인 불만 때문에 지금으로 말하면 테러가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일반인들이 거의 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그 곳을 은신처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회와 유대 사회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그곳에 와서 생활했습니다. 몸이 건강할 때는 서로 으르릉 거리며 싸우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에 걸려 자신들의 사회로부터 추방되었을 때 그들은 지역과 혈통, 신분을 초월해 하나가 되어 함께 살았습니다. 그 곳에는 문둥병에 걸린 아홉 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사마리아인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예수님이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병자들을 낫게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흥분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문둥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하면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멀리서 예수님의 일행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자신들의 앞을 지나갈 때 멀리 서서 ‘예수님, 우리들이 문둥병에 걸려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멀리 서서 부르짖는 열 명의 문둥병자를 향해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보면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둥병에서 낫게 되면 그는 먼저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여 문둥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확인 받도록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문둥병에서 낫은 사람들을 위해 속건제를 드린 후에 가정과 사회로 돌려 보내게 했습니다. 이런 율법을 중심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문둥병이 치료되었으니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둥병자들의 몸에 치료되는 어떤 변화도 없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에 들어가면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아마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을 겁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우리를 놀리는 것이냐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으니 그의 말을 믿고 제사장들에게 가자.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협의한 후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내리고 제사장들에게 자신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 마을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을로 향해 걸어가는 가운데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문둥병 상처가 깨끗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짖물렀던 상처들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문둥병으로부터 깨끗이 치료 된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깨끗해진 자신들의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고 빨리 가족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사마리아가 고향인 한 사람은 제사장과 마을로 뛰어가지 않고 예수님에게로 뛰어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일행을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제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이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사하는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은 사람은 열 사람인데 그 중에 유대 사람 아홉은 어디가고, 사마리아 사람인 너 혼자만 내게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향해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은 문둥병에서 치료받고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우리들은 주목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다르게 말하면 문둥병에서 나았음을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구원을 받았지만,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유대 사람 아홉은 문둥병이라는 질병으로부터는 치료를 받았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질병으로부터 나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만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질병이 치료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문둥병으로부터 낫게 하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결단을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덕목이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는 풍부와 궁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풍부하면 감사하고 궁핍하면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풍부와 궁핍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심으로 믿음은 곧 감사임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감사한다는 것이 매우 쉬울 것 같습니다. 누구나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홉은 감사하지 않고 한 사람만 감사했습니다. 9:1입니다. 받은 것을 가지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아홉이고 받은 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감사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에 속한 사람이라면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유대 사람일 것 같습니까? 아니면 감사할 줄 아는 사마리아 사람일 것 같습니까? 조금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9:1의 비율의 법칙으로 보면 우리들은 감사하지 않은 아홉명의 유대 사람에 더 가까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아파트 2층에서 사는 어떤 주부가 어느 날 대청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아직 걷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 예쁜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이 주부는 대청소를 하는 동안 아이를 바깥 잔디밭에 놀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녀는 아이와 강아지를 잔디밭에서 놀게 했습니다. 그녀는 청소하는 틈틈이 베란다로 가서 밖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따뜻한 햇볕이 내려 쪼이는 잔디밭에서 아이와 강아지는 잘 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일하다가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느라고 베란다에 나와 차를 마시면서 아이와 강아지가 노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평화스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녀는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는 쿠키를 실에 매달아 천천히 밑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쿠키가 거의 아이의 손에 미칠 즈음에 강아지가 먼저 냄새를 맡고는 그 쿠키를 덥썩 물고 빼앗길까봐 얼른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아이는 순간적으로 사라진 강아지를 찾느라 두리번 거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급히 실을 끌어 올려 쿠키를 또 하나 묶어서 내려 보냈습니다. 두리번 거리는 아이의 눈 앞에 쿠키가 달랑 달랑 매달려 있었습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쿠키를 손으로 잡더니 잠시 그 쿠키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이는 쿠키에 묶여 있는 실을 발견하고는 그 실을 따라 고개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실을 따라 올라가던 그 아이의 눈은 결국 베란다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엄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밝은 얼굴로 웃음을 지으며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그리고 나서 쿠키를 입에 넣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 줍니다. 강아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즐기는 데 빨랐습니다. 누가 준 것인지를 아는 것은 강아지에게는 관심 밖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어린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살펴 볼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것을 즐기기 전에 먼저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됨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는 실이 묶여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우리들이 조금만 힘주어 잡아채면 금새 떨어지지만 조심해서 잘 살펴 보면 우리가 손에 쥔 모든 것에는 실이 묶여져 있습니다. 그 실을 따라 고개를 올려보면 우리를 향해 웃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쿠키를 즐기는 데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즐기는 데에만 몰두하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잠시만이라도 우리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다움입니다. 우리들은 이 인간다움을 너무나 많이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야곱과 다윗입니다. 그들의 마지막 죽음 앞에서의 고백은 ‘감사’였습니다. 영국 격언에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찬 곳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가장 귀한 고백입니다. 감사는 감사를 낳고 불평은 불평을 낳습니다. 감사가 감사를 낳는 삶의 자리를 만들면 그 삶의 현장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감사는 내 생활 속에 불평과 불만의 바이러스가 침범하는 것을 막는 백신입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독소들을 해독시켜 주는 해독제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부패하지 않도록 도와 주는 방부제입니다. 감사가 없는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의 조건입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웃음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이 예배를 드리고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갈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감사의 영성’을 가지고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대함으로 감사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성도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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