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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원리를 따르는 삶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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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원리를 따르는 삶 (마 23:1~12) 


한 시대를 살면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과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과 가치관은 하나의 통합적인 세계관을 형성하여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무의식 세계에까지 침투하여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 크게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 가치와 사상에 따른 결정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 시대의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별된 자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주권을 거부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로 잡으며 우리의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정렬시키도록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을 통해 권면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 지를 분별”하는 것이며 이런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세상의 원리가 아닌 하늘의 원리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하늘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첫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진 하나님의 참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원리를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2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 속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본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풀어 해석하여 가르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인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것으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런 전통을 이어갈 책임을 간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자들이고 또한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죄를 범했을 때에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깨달은 죄인이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은혜의 통로가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율법의 조문을 문자적으로 지키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통한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들을 가지고 백성들을 정죄하고 그들에게 죄책감의 짐만 더한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 의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장로들의 유전과 자신들의 선배들이 남겨준 여러 부수적인 조항들을 첨가하여 사람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윤리적인 책임의 짐을 사람들에게 지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의 해석자요 율법을 맡은 자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경건함과 의로움을 경문을 메는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다는 것을 통해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경문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종이를 작은 상자에 넣어 이마와 손목에 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인 전통이었습니다.  

이 전통은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소위, “쉐마”라고 부르는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옷의 술이라고 하는 것은 민수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문을 차고 다니라고 명령하신 것이나 옷단에 술을 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경문을 이마와 손목에 고정시키는 끈을 넓게 만들어서 마치 왕관처럼 쓰거나 화려한 장식처럼 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옷단에 매는 술을 더 화려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준행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자임을 자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경문을 차고 옷단에 술을 달라고 하신 하나님의 본심을 잊어버렸고 경문에 담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조차 무시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처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또 그 율법을 자신들의 권력과 명예를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포장하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런 모습을 지적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신 교훈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원리는 죄가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심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하늘의 원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두번째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원리에 따른 이웃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8절부터 10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가진 하늘 아버지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제자들에게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난 새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높은 자도 없고, 앞선 자도 없으며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 스승이 되시어 우리를 친히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 나라의 유업과 영광을 누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울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나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늘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은 또한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원리를 본문 11절과 12절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원리를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으로 순종을 보이신 예수님의 섬기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하늘의 원리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를 푯대로 삼아 삶의 우선순위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폴 발레리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대는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익숙해져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사람으로부터 인정 받을 것을 요구하고 또 그렇게 인정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 올라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며 권세와 명예를 차지해야 한다고 끊임 없이 소리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혹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 맡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늘의 원리를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참 마음을 깨닫고, 겸손하게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섬김의 도고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살도록 부르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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