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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우리가 세상에서 부를 노래 (시 1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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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에서 부를 노래 (시 150:1~6)


[주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웅장한 창공에서 찬양하여라.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시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나팔 소리를 울리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거문고과 수금을 타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소구 치며 춤추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현금을 뜯고 피리 불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오묘한 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큰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 헤라클레스의 마굿간 청소

가을빛이 찬란한 이 날을 우리는 2008년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 년 동안 많은 것을 파종했고, 많은 것을 수확했습니다. 농부들처럼 땅에 씨앗을 심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공간이라는 들판에서 우리는 힘써 일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수고했고, 직장인들은 일하느라 수고했고, 가사를 돌보는 이들은 살림살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각자에게 맡겨진 일들을 하느라 우리는 허둥지둥 살아왔습니다. 이 가을, 우리 마음이 조금은 쓸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서 행복하셨습니까? 

사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는 제 마음이 흔연欣然하게 열리지는 않았습니다. 풍년이 되어 기쁘긴 한데, 가짜 농민들이 쌀 직불금을 수령하는 것을 보며 가슴에 멍이 든 농민들, 그리고 가격이 폭락하여 살 길이 막연하게 된 농민들이 배추밭을 갈아엎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기륭전자나 강남성모병원을 비롯한 많은 일터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이주 노동자들, 꿈을 찾아 왔던 조국에서 ‘묻지 마’ 범죄의 희생자가 되어간 중국동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게다가 외화 유동성 위기니, 환율 폭등이니…우리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우리 마음은 더욱 옹색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최근에 감리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인 교회를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교권 다툼 속에서 자기 비움과 섬김의 도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분노와 증오와 멸시만이 남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헤라클레스가 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우스와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는 광기에 사로잡혀 저지른 죄에 대한 보상으로 12가지의 고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우게이아스 왕의 엄청나게 큰 마구간을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은 먼지와 오물투성이의 외양간을 치우기 위해 헤라클레스는 알페이오스와 페네우스 강물 줄기를 끌어와 마구간을 통해 흐르게 했습니다. 그런 시원한 강물 줄기가 우리 감리교회로 흘러왔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이 물줄기는 이미 흐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시선 바꾸기

이래저래 울적한 마음이어서 도무지 마음이 고요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기도문을 만났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기운이 다소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을 반성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아내와 남편이 미워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삶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선을 전환하니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물론 이런 시선의 전환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살다보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넘어질 때도 있고, 상처를 입을 때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은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울면서라도 마주 서면 그 속에 담긴 아름다운 선물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8:28). 다소 지체되기도 하고, 우회해야 할 때도 있지만 순례길의 목표를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겪는 인생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이 있냐고 묻습니다.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 우리들이 희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 참 좋으신 주님

오늘의 본문인 시편150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성소에서, 하늘 웅장한 창공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며 회중들을 부릅니다. 시인은 우리가 주님을 찬양해야 할 까닭을 두 가지로 밝힙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자족적인 고요함 속에 머물고 계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일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의 손길로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손수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것들입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내의 일은 아이들이 잠든 후까지 이어졌습니다. 사위가 고요한 시간 아내는 아이들의 연필을 정성스레 깎아 필통에 담아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내일은 엄마의 손길을 통해 그렇게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배처럼 엄숙한 광경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아내의 그 모습에서 나는 우리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거칠고 삭막한 세상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북돋우시고, 이끄시고, 책망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주님은 삶에 지친 백성들을 향해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출19:4)고 말씀하십니다. 

살아온 기가 막힌 세월을 돌아보면 과연 이 말이 그르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절망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주님은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수1:9) 하시며 격려하셨습니다.

 어긋난 길로 나가 헤맬 때면 “내가 너의 죄를, 짙은 구름을 거두듯 없애 버렸으며, 너의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였으니,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사44:22) 하시며 불러주셨습니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마음에 짙은 구름이 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짙은 구름 저 너머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해가 빛나고 있습니다. 

흐린 날 한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보니 아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실을 당겼다 놓았다 합니다. 뭘 하고 있냐고 묻자 아이는 연을 날리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나그네는 볼 수 없었지만, 줄을 잡고 있던 아이는 구름 저 너머에 있는 연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그런 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줄의 이름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라고 말했습니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모든 것들의 바탕이라는 말일 겁니다. 우리가 엉터리로 그려놓은 그림도 유영남 권사님이나 곽권희 집사님의 손길이 닿으면 볼만한 것으로 바뀌듯이, 우리가 망쳐놓은 일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아름답게 변합니다. 미움은 사랑으로, 불화는 화해와 조화로, 절망은 희망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온몸으로 찬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무엇일까요? 파바로티가 부르는 아리아입니까? 조수미가 부르는 <밤의 여왕>입니까? 저는 마음을 다하여 부르는 찬양보다 아름다운 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찬송을 부르되 건성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사 하나하나를 자신의 고백으로 삼아 부르는 이들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전심을 다하여 찬양하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맛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가릴 것 없습니다.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시인은 또 소구 치며 춤추면서 찬양하랍니다. 사람들은 신명이 지피면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덩실덩실’이라는 단어가 참 흥겹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마음에 느끼는(感) 사람은 저절로 어떤 몸짓을 하게(動) 됩니다. 감동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가진 사람이기에 몸짓을 하며 삽니다. 손을 내밀기도 하고 휘젓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발을 내지르기도 하고, 눈을 깜빡이기도 합니다. 몸짓은 마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춤이란 마음속의 즐거움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으로 모시면서 다윗은 춤을 추었습니다. 모시로 만든 에봇만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체모 따위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사울의 딸 미갈은 마음 속으로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나중에 집에 들어온 다윗을 보고 미갈은 책망을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삼하6:20) 

조금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확고합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자기를 뽑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으니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삼하6:21-22).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라는 다윗의 말은, 열정없이 부르는 우리의 찬양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어려운 시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사의 찬양을 올려야 합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구나.” 절망의 노랫소리가 아무리 크게 울려도, 우리가 불러야 할 것은 희망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형편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형편 속에서라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부르는 노래를 살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우리의 운명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불러야 할 노래 제목 그것은 ‘임마누엘’이고, 우리가 온몸으로 추어야 할 춤 이름은 ‘할렐루야’입니다. 이 노래와 춤으로 인생을 축제로 바꾸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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