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감사자 (합 3:16~19)

  • 잡초 잡초
  • 489
  • 0

첨부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감사자 (합 3:16~19)


여인들에게 있어 누구나 한번쯤은 갖고 싶어하는 보석이 있다면 다이아몬드가 아닙니까? 그런데 15세기 전까지 다이아몬드의 연마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이 진주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보석이었습니다. 진주는 바다의 보석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희소가치성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진주가 생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쉽게 이해될 수가 있습니다. 이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간 한 알의 모래알이나 이 물질을 조개가 분비물을 내어 계속 쌈으로 인하여 만들어집니다.

부드러운 살만 있는 조개 속에 모래가 박히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조개는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기 살 속에 박혀 있는 모래나 이 물질을 분비물로 계속 쌈으로 인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는 값진 진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만약에 이 조개가 그 아픔을 인내하지 못하고 절망하여 사는 것을 포기했다고 하면 이미 썩어 버렸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진주는 자신에게 닥친 어쩔 수 없는 고난을 피와 땀과 눈물로 이기고 만들어 낸 승리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한 복판에 크고 작은 모래알들이 계속 들어옵니다. 그라나 이 고난의 모래알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보배로운 진주처럼 만들어질 수가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삶의 역경과 고난의 비바람이 갑자기 휘몰아치기 시작할 때, 기도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 삶에 불어닥친 고난의 비바람 속에서 갑자기 리듬을 잃어버리고, 균형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면서 기도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자기를 둘러싼 그 어려운 상황 앞에 휩쌓입니다. 집안이 기울어질 때, 사업이 어려워질 때, 직장생활이 불안할 때, 내 앞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해 보일 때, 그 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무력하리만큼 낙심하는 자리입니까? 현실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쏟아지십니까? 아니면 그 어떤 대안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 물음,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큰 시련 속에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실패의 자리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는, 오고, 오는 믿음의 성도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제 3: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풀어서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얼마후면 이 민족이 초토화되고 이 나라의 모든 것이 다 망가질 그 모습을 바라볼 때 내 창자는 흔들립니다. 내 입술은 떨립니다. 내 뼈는 썩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습니다."

하박국이 처음부터 자기민족이 이 엄청난 재난으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에겐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었어요.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타락해도 왜 이 땅위에 의인이 고통을 받을까? 그리고 또 하나는 왜 악인들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는가 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더 큰 고통이 있다면, 의인이 범죄하면 하나님께 징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왜 하필이면 저 짐승 같은 바벨론의 말발굽아래 내 동포가 짓밟히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합2:1에 보면 망루에 올라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이와 같은 태도를 보여주는 하박국의 모습은 보통 심란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집에 급한 환자가 있어서 병원이나 119 구급대에 연락을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응급차가 오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그 때보다 더 속 타고 안절부절 할 때는 평생 없을 것입니다. 집안으로 들어가 환자의 상태를 보고 또 얼른 밖으로 나와서 응급차가 오는지 보다가 그래도 오지 않으면 다시 전화 앞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어찌 이뿐입니까? 사업을 하는 사람이 오늘까지 돈을 막아야 하는데 유동 자금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분명히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한 은행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안절부절하다 은행에 전화를 걸어보니까 결재가 안 났으니 결재가 나면 연락을 주겠다고 합니다. 시간은 지나가는데 은행에서는 종무소식일 때 그 때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하박국 선지가 힘들어하는 것은 가족 중에 누가 아프거나 사업이 부도났는데 돈을 구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은 선지자로소 예루살렘 안에 만연되어 있는 악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시가 이렇게 죄악으로 뒤덮일 수 있습니까”하고 여쭙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문제입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나을 뻔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도덕적으로 너무 병들어서 하나님께 여쭈었더니 불치병이라 이제 곧 바벨론 군대를 보내어 멸망시키려 한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차피 망할 도시라면 망할 때까지 실컷 먹고 마시면서 죄짓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박국 선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루살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예루살렘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고서 자신의 요청에 어떻게 답하실지 초조하게 한순간 한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죽어 가는 사람을 옆에 두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구급차를 기다리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이와 같이 망루에서 기다리는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다가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그 백성을 구하시겠다. 그러므로 의인은 어떤 경우라도 낙심치 말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멧세지를 듣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문제를 직면하게 될 때, 그래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 우리는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 않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태에 있을지라도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히10:38-39에 보시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무슨 말입니까? 믿음을 가진 자는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뒤로 우리는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다”에서 ‘침륜’은 우리가 생각하는 ‘침체’와 같은 뜻입니다. 영적 침체는 믿음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던집니다.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침체된 자들을 완전히 버리십니까? 아닙니다.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침체에 빠져 있는 동안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뿐더러 많은 주위 사람들을 낙심시키고 실족시키지 않습니까? '야! 믿는 사람이 겨우 저 정도인가!'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불신만 더해줍니다. 침체에 빠진 그 자신은 나중에 다시 일어서면 되지만, 그동안 상처 주고 낙심시킨 자들은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습니까? 남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원망의 말을 담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어려움이 있을수록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극동방송국에 부사장으로 계셨던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인 주광조 장로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년 4개월만에 이 나라에 8. 15해방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가족과 교회는 돌아가신 목사님을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수없이 닦아가며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의 어머니는 위암으로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하루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돈과 남산동의 적산가옥문서 그리고 논밭문서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항일투사인 주기철 목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 김일성이 보낸 포상금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완곡하게 사절을 하며 “주목사님은 이 세상의 포상을 받기 위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순교했으니 하나님의 상을 받기를 바랄뿐이요!" 완강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자신은 마음에 커다란 갈등이 왔다고 합니다.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는 어머니, 그렇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 돈이 저 재산이 필요한데…"

어머니는 그런 자기를 의식하였는지 그들이 돌아간 다음 아들을 앉혀놓고 성경구절을 찾아 읽으라고 했답니다. 시37:25-26절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산 자가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구걸 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저는 항상 은혜를 베풀므로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도다” 사실 주 목사님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습니까? 그렇다고 가르치기를 했습니까? 남겨준 물질적인 유산이라고 배고픔과 원망과 좌절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엄청난 유혹 앞에서도 그 집문서를 뿌리 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예요. 실직이 문제가 아닙니다.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 문제에 가려져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게 문제요, 감사가 메말라 가는 게 문제입니다. 문제는 어떤 면에서 부정적인 에너지입니다. 문제 속에 담긴 부정적 에너지는 강력합니다. 그런 까닭에 문제 때문에 쓰러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라는 부정적이면서도 강력한 에너지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길은 감사입니다. 감사하면 부정적인 에너지가 순식간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됩니다.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찾아온 부정적인 에너지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되게 됩니다.

문제는 반응만 잘하면 기적을 창조하는 재료가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문제 때문에 잘 된 사람들입니다. 문제 때문에 형통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자극합니다. 문제는 변화를 요청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문제가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기적과 감동의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여사를 아십니까? 그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갖고도 감사하지 못하며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이런 3일을 주었으면 좋겠다. 하루는 나처럼 볼 수 없고 눈먼 채로 살도록 하고. 또 하루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자로 살고, 마지막 하루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벙어리처럼 살게 한다면 감사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 헬렌 켈러가 쓴 ‘나의 자서전’이란 책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가 한 번만 저 무지개를 볼 수가 있다면, 내가 단 한번만 저 떨어지는 낙엽의 아름다움을 볼 수만 있다면, 단 한번만 이 산 속에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저에게 용기와 끊임없는 가르침을 베풀었던 설리반 선생님의 그 아름다운 미소를 내 눈으로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나에게 이 귀한 설교의 감동을 주었던 필립 부룩스 목사님의 그 얼굴을 단 한번만 볼 수가 있다면, 내 인생, 내 삶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던 감동스러운 이 성경을 내가 ,내가 단 한번만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받는 축복에 익숙하면 우리는 그 축복을 당연한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감격을 상실합니다. 감사를 망각합니다.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여러분! 하박국은 자기 민족에게 들이닥칠 무서운 현실, 냉엄한 현실,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그 민족이 경험해야 할 무섭고도 두려운 현실을 직면하고는 그 고통 속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자신의 환경과 처지 때문에 대책 없이 주저만 앉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가장 힘있는 감사의 기도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기 보면 부정어가 6번(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등입니다. 과수원마다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죠.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없음'의 소유에서부터 일어섭니다. "이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그는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18절을 보시면 그가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가 이처럼 두려움에서 일어나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이 짧은 구절에 하나님을 두 가지로 표시합니다.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적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확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내게 부딪힌 어려움, 고난,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만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보십시오. 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은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 사슴 하면 그 뿔과 날렵한 다리가 생각납니다. 사슴은 투명한 눈동자로 위험을 감지합니다. 골짜기에서 위험을 느낀 사슴은 그 즉시 날렵한 다리로 고지를 향해 춤추며 오르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골짜기에 서있던 사슴을 어느새 저 높은 고원의 언덕에 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짜기를 굽어봅니다. 그 날렵한 사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놓은 곳에 있는 사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방금 전까지 우리는 어두움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괴로워하며 고통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절망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슴의 발같이 내 발을 들어올려 그 위험을 피하게 하시고 드디어 저 놓은 언덕, 나의 높은 곳, 가능성의 고지에 서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위기가 닥쳐올 때 사람들은 다 큰일났다,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담대해야 합니다. 이 시간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답답한 현실이지만, 그 다음 우리가 내일을 바라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폭풍우와 비바람 건너편에 있는 내일 새벽에 비쳐질 그 영롱한 아름다운 빛살을 볼 수 있는 안목만 있다면,/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환경다음에 나를 만드시고 또 나를 붙들고,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그 분의 손길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벌떡 일어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감사하는 삶을 잃지 마십시오. 이제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특히 가장 큰 감사의 열매는 영혼 구원입니다. 다음 주 그동안 준비한 태신자를 초청하십시오. 그들에게 믿는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가를 보여 주어야합니다. 

이제 우리 한 번 더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감사자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