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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로 드리는 제사 (시 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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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드리는 제사 (시 50:23)

18세기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그림 가운데“만종”이라는 명화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질 무렵, 저 멀리 교회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밖에서 일하던 젊은 부부는 종소리를 들으며 경건하게 마주서서 두 손을 잡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의 그림입니다. 이 부부가 드린 감사기도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면서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될 수도 있고, 하루 동안 땀 흘린 것에 대한 감사,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대한 감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 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부사이에 작은 비구니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속에는 감자가 반쯤 담겨져 있습니다. 이 부부가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만종”이라는 이 그림의 본래 이름은“알젤루스”인데 그 뜻은 “기도” 입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는 극한 가난 속에서 고생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비교적 넉넉한 환경 속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20살 때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계속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갓 결혼한 아내마저 병으로 사별해야 했습니다. 밀레의 나이 50세가 넘어서까지 가난 속에서 고통을 당했으며 그 후에 자신조차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60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밀레의 역작들은 고통의 세월을 지내는 중에 그려진 것들이 많습니다. 감자 몇 개를 담은 바구니를 옆에 두고 두 손을 모아 주님께 감사하는 농부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다음주일은 우리교회는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지은 농사를 수확한 후 열매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성도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농사를 짓는 것만 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경영하는 사업이나 아니면 직장, 우리들이 사랑스럽게 키우는 자녀들, 더 나아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살이 전체가 다 농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6:7에는 우리들의 삶을 심고 거두는 농사에 비유하여“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농사는 농부가 짓지만 농부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농사가 되겠습니까? 요즘 흔히 하는 두 세 평정도의 주말농장이라면 물을 길러다가 채소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 천 만 명, 수 억 명이 먹는 농사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햇빛이 없어도 농사는 지을 수 없습니다. 공기가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것, 절대적인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값없이 그냥 주신 은혜입니다. 은혜에는 반드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인 시편 50:23에 말씀하시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감사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더 큰 즉 은혜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라는 말씀은 감사의 제물을 드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찬양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억지가 아닌 기쁨, 그리고 찬양의 감격이 있는 제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 예배 가운데 감사가 빠져 있다면 하나님께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는 “행위를 옳게 하는 자”를 동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감사는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며, 구원받은 자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추수감사 주일을 앞둔 우리들은 어떠한 자세로 추수감사절을 맞이 해야 하겠습니까?

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 127:1~2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온 것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다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본래 부터 내 것이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받은 것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아담에게 주셔서 아담으로 누리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가 누릴 만한 것들을 주시고, 그것으로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6,28,30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라고 하셨습니다.

26절에“공중의 새를 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는 먹이를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들이 창고에 먹이를 모아두었다가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너희 하나님이 기르시나니”비가 오고 눈이 와도 굶어 죽지 않고, 잘 자라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28절에는“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합화는 어떻습니까? 새는 목이 마르면 물가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배가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왕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백합화는 광야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약한 꽃에 불과합니다. 목마르다고 냇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옮겨 갈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오로지 하늘에서 때를 따라 내리는 비만 바라봅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햇빛과 그늘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저히 살수 없는 것이 백합화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공중에 나는 새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먹이신다. 광야에 핀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 그 백합화를 돌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그러므로 우리는 하찮은 새 한 마리와 한 송이 꽃까지 지키시고 돌아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들, 믿음의 사람들을 돌보지 않으시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필요에 대해 공급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너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새 한 마리도, 꽃 한 송이도 돌아보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돌아보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반드시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를 생각하고 백합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二. 지난날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유래를 보면, 얼마나 눈물겨운지 모릅니다. 영국의 국교가 청교도를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났습니다. 함께 떠난 가구 수는 70가구였고, 인원은 전체가 102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겨울을 지나는 가운데 너무도 춥고 먹을 것이 없어서 절반 이상 되는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었고, 고작 48명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최초의 추수 감사주일을 지낸 사람들입니다. 청교도들은 인생의 가장 큰 슬픔과 재난을 겪는 중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감사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도착하여 일곱 채의 오두막을 짓고 그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첫 겨울을 넘기고 그들이 가지고 온 씨앗을 심었지만 토양이 달라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인디언에게 도움을 받아서 약간의 옥수수 씨를 가지고 결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칠면조를 잡아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목숨을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되는 옥수수를 가지고도 놀랍게 3일간의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신대륙 프리머스에 도착한지 3년 만인 11월 29일, 그날을 기하여 매해 추수감사절로 지킨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의 감사, 시련 속에서의 감사, 아픔 속에서의 감사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감사는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아메리카로 이주하여 질병과 굶주림으로 가족의 절반을 잃었고, 겨우 연명할 정도의 옥수수뿐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감사했던 이 아름다운 신앙인들의 모습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서러운 억압을 받았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겪었습니다. 그 후 찢어지는 가난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혜가 지속되었습니다. 아니 넘쳤습니다. 이 큰 은혜의 바다 속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일의 한 중년 그리스도인이 대학병원에 수술을 하러 갔는데 그의 병명은 혀 암이었습니다. 마취 주사기를 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면서 말하기를“마취 주사를 놓으면 당신은 잠들고 수술 후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의사를 비롯하여 간호사들까지 긴장한 가운데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 환지는 두 줄기의 굵은 눈물을 조용히 흘리면서 세 마디의 말을 했습니다.“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후 의사가 마지막으로 환자의 입안의 혀 암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목 안 혀뿌리에 있었던 암 덩어리가 혀끝에 와 있었습니다. 그 암 덩어리가 곧 터질 것 같은 종기처럼 말랑말랑했습니다. 깜짝 놀란 의사는 수술을 연기하고 좀 더 지켜보도록 했습니다. 며칠 뒤 그 혀 암은 흔적조차 없이 깨끗하게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최후의 말 한마디를 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무슨 말을 남기시겠습니까?“감사합니다.”라는 이 고백은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고백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기른 열 남매가 갑작스런 폭풍으로 인해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 밑에 깔려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잿더미에 올라앉아서 했던 말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하나님! 찬양합니다.” 였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한 번도“내 신세가 왜 이 모양입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없이 성숙한 감사였습니다. 고난 속에서 드린 감사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욥의 감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 욥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되 갑절의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三. 미래를 바라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본문인 시편 50:23에 말씀하시기를“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감사를“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라고 표현하여 감사와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는 바로 이러한 감사의 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일어날 일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이미 받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4장에 나와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축사하시고” (마태복음 14:19)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축복 하시고 감사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미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당시의 처한 현실을 보십시오. 막막합니다. 빈들입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할 곳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할 돈도 돈이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어떻게 가져오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제자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진 가능성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마태복음 14:17에서 제자들이 대답하기를“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문제에 봉착하면 그 도움의 손길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 기적을 창조할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감사의 기적은 여러분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을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찮은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 감사합니다.”그 감사가 기적을 창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 손에 있는 것, 여러분 가슴에 품은 것, 그것으로 감사하십시오. 미래를 내다보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적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1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서도“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기적을 일으키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미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똑같이 미리 내다보고 감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축복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 감사하는 믿음은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기적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내일을 꿈꾸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현실만을 바라보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이 힘들고 죽음이 다가와도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실아기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지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지라도 이제 곧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오늘은 비록 황폐한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내일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변화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감사할 만한 일들이 없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올 한해도 무사히 지나온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처럼 시련 속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건강을 잃었습니까? 재물이나 직장을 잃었습니까? 사업이 말할 수 없이 어렵습니까? 그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도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기적의 은혜를 베푸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온다하여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내일의 소망이 있기에 소망 중에 내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느 해인가 독일 전역에 흉년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가운데 한 동네에 좀 넉넉하게 사는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재산에 애착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굶주린 아이들에게 빵을 만들어 줄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 수만큼 빵을 만들어 아침에 비구니에 넣어서 진열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공장에서 만든 것처럼 빵 크기가 일률적이지 않고 다 달랐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꼭 하나씩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힘 있는 아이들이 큰 빵을 먼저 차지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힘이 없는 아이는 늘 작은 빵을 가져가야 했습니다. “그레첸”이라는 소녀는 힘이 없는 아이이기 때문에 늘 제일 나중에 남은 가장 작은 빵을 집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이 아이는 그 노부부에게“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소녀는 노부부가 준 빵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먹으려고 손으로 찢다가 그 속에서 금화 여섯 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놀란 이 소녀는 다시 금회를 가지고 할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이 금화는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제일 작은 빵 속에 일부러 넣은 것이란다. 이것은 네게 주는 나의 선물이란다.”라고 했습니다.

남이 베푼 호의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 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조차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몸의 근육은 쓰면 쓸수록 발달합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위해 감사의 근육을 계속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습관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환경과 사물을 볼 때 감사의 시각으로 보시기 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에“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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