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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욘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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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욘 4:1~1)

 
어제 저녁에 전지혜 집사님이 오랜만에 화장대 앞에 앉아서 얼굴에 콜드크림을 발라 문지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호 녀석이 궁금한 듯 물었습니다.
"엄마, 뭐하는 거야?"
"응, 아들.  엄마가 예뻐지기 위해서 하는 거야."
잠시 후 엄마가 화장지로 얼굴의 콜드크림을 닦아내자 현호가 안타까운 듯이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엄마, 왜 닦아내.  벌써 포기한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우리들 주위에 보면 건강한 교회생활을 포기한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행여 우리들 가운데 행복한 신앙생활을 포기하신 분이 계십니까?  확실한 믿음 생활을 포기하신 분이 계십니까?  행복한 교회생활을 포기하신 분이 계십니까?

똑같이 예수를 믿고, 똑같이 교회에 다니면서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이 너무 행복하고 은혜가 넘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지를 못해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어떤 사람은 끝없이 한탄만 하고 가라앉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믿으려고 하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그냥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오.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은혜의 파도에 자신을 맡겨보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감상하고 명상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면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그냥 물끄러미 구경만 하는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피곤한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관자의 자리에 서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덜 피곤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관자의 자리에 서 있을 때, 그때에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정신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가장 지치고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 생활에서도 연장이 될 때에 그는 교회 생활에서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병들고 나약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안티 신앙으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불평을 하거나 딴 죽을 걸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신앙은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하거니와 가정과 자녀들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건강한 신앙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자녀와 내 가정을 위해서라도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천에 하나라도 병든 신앙, 안티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보십시오.  스스로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일을 저질러보십시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개념치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내 속 깊은 곳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매력과 기쁨과 감격을 소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한 번 누려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것들을 기억하십니까?  건물 자체에 대한 기억입니까, 아니면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억입니까?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어떤 건물에 대해 따뜻한 기억이 있다면 그 이유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산책하던 일, 친구들과 함께 놀던 일, 어머니가 꼭 안아주시던 일, 그런 일들 말입니다.  확실하게 말씀을 하건데 여러분을 향수에 젖게 만드는 것은 그 집의 외면적인 구조가 아니라 그 집에서 있었던 행복한 사건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지구상의 어떤 예배의 처소 중에서 하나님이 향수를 느끼시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다윗의 장막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복원하고 보존하기 위해 하늘에 있는 역사서에 적어 두셨습니다.  그것은 건물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드린 예배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열정적인 예배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열정적인 예배자들에게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열정적인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를 축복하십니다.  그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혜가 부족한 자는 쓰셔도 그 심령에 열정이 없는 자는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힘이 약한 자는 쓰셔도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의욕이 없는 자는 외면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복음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사명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에 대한 헌신의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오래된 유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 세상에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누가 아내를 제일 사랑했는가?"하는 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회에서 각 나라 전직 대통령들이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동메달은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동메달을 수상하게 된 이유는, 그가 아내의, 아내에 의한, 아내를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은메달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않고 내가 아내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영예의 금메달은 우리 나라의 고 박정희 대통령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금메달을 수상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땅에서 어떤 역사적 사명을 안고 살아가십니까?  어떤 사람은 먹고사는 게 역사적 사명인 사람이 있습니다.  온갖 관심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똑똑해서 먹고사는 줄 압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먹고사는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전세계에 3년만 흉년들게 하고 먹을 것을 거두어 가시면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증권으로 밥을 해 먹겠습니까?  수표로 국을 끓여 먹겠습니까?  돈으로 나물을 무쳐 먹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살아가는 겁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이 땅에서 존재하는 역사적 사명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고 무엇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최우선적 관심과 사명은 생명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가족들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나 신앙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 있는 시대에는 영적인 일에 무관심해 집니다.  특별히 영혼을 구원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 전도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교회 위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가 활동하던 세계는 주전 9세기로 당시에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인한 침략, 포악한 심성, 거기에다 우상숭배와 배금주의, 육체적 향락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불러서 니느웨 성에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요청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와는 정반대쪽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풍랑을 일으키시고 요나는 마침내 물고기 뱃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삼일동안 처절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사십일 후에 이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 성 동편 언덕에 올라가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망하는가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백성들이 금식하면서 크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됩니다.  저들의 진실한 회개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아니, 하나님! 저런 인간들을 용서하십니까?"  원망했을 것입니다.

때마침 하늘에서는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머리에 내려 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박넝쿨 하나를 무럭무럭 자라게 하더니 태양을 차단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나는 그 박넝쿨로 인한 그늘 하나 때문에 크게 기뻐합니다.  그런데 벌레 한 마리가 나타나 줄기를 갉아먹고 동풍이 불어오더니 그만 먼지처럼 바짝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드러내놓고 원망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십니다.
"요나야, 그 박넝쿨을 네가 심었냐?  네가 자라게 했느냐?  네가 그 박넝쿨 하나를 아낄진데 내가 만든 니느웨 성, 내 백성들, 수 많은 사람들, 12만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의 주인공 '요나'는 오래 전 이 땅에 살다간 한 신앙인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요나'는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요놈의 나', '요-나'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오늘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이기주의의 표상이 된 오늘 이 땅의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오늘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요나가 제 곁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요나! 당신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당신은 무엇으로 인해 기쁨을 얻었습니까?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집에 가셔서 요나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전체가 4장 밖에 되지 않아서 읽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나를 읽어보면 거기에는 한번도 요나가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선지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도망가며 기뻐했겠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기뻐했겠습니까?  모래 바닥에 토해져서 살이 삭아진 모습을 부둥켜안고 기뻐했겠습니까?  심지어 삼일 길을 걸으며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가 기뻐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던 요나, 그가 마지막 장에 와서 기뻐하는 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일 길을 걸으면서 니느웨성이 멸망할 것을 선포했던 요나가 이제는 니느웨 성이 멸망하기를 기다리면서 동편 언덕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작렬하는 태양 때문에 몹시도 불평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박넝쿨 하나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박넝쿨 때문에 기뻐합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 선지자, 그의 기쁨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였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박넝쿨은 우리 나라의 호박 넝쿨이나 박넝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심기만 하면 며칠 내에 3m 정도로 물씬 자랍니다.  잎사귀가 크기 때문에 그늘을 쉽게 만들어 줍니다.  한번 잎이 나오면 2-3일 정도 피어 있다가 시들어 버리는 그런 나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그 멋진 광경을 보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이 아닙니다.  한 도시의 구원입니다.  천국에서는 지금 커다란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대 최대의 도시가 주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는 이 놀라운 역사 앞에서 요나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요나가 금방 아궁이 속으로 사라질 박넝쿨 하나를 보고 그토록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요사스러운 이 요나의 모습이 우습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람의 가치가 이 박넝쿨만도 못하다는 말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사람의 생명을 한낱 잡초와 같은 박넝쿨보다 못하게 취급했습니다.

사람이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이런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무엇을 보고 기뻐해야 될 것인가?  무엇을 보고 슬퍼해야 될 것인가?  어느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웃어야 하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울어야 할 것인가?  당신의 기쁨과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 속에서만 기쁨을 찾아야 한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에 부딪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기도할 때마다 부어주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앞에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 앞에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조금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감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끼 맛난 음식을 먹고 행복해 합니다.  한 벌의 옷을 입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인으로서 뭔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어떤 신학자는 "영적인 침체가 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첫째로, 마땅히 기뻐해야 될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싫어해야 할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Yes하고 순종해야 할 때 순종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No하고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합니다.  헛된 것을 붙들고 거기에다 생명을 걸고 살아갑니다.  결국 사랑이 식어집니다.  상처가 치료되지 않습니다.  사역에 시험이 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에게 물었던 그 질문으로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여러분이 기뻐하는 그 참된 기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가슴 아파하십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행복해 하실 때에 그 자리에 여러분의 행복이 있습니까?

요나에게 묻고 싶은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요나, 당신에게 있어서 당신의 자존심이 그렇게도 중요했습니까?  선지자가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당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했더란 말입니까?"

물론 이해는 합니다.  앗수르 족속들이 예루살렘 성을 쳐들어왔을 때에 임신한 여인을 거리에서 죽였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불러모아서 하수구에 던져 죽였습니다.  저들의 잔악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했던 요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앗수르는 필연코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는 멸망해야 할 도시라고 보았습니다.  어쩌면 요나의 생각은 그저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민초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니느웨를 사랑하고 용서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분명히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신의 뜻과 상충되는 말씀 앞에서도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생각과 상충되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가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때로 용납이 안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진정한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4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그토록 요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사십일 후에 멸망할 것이요"  내가 곧 멸망한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니느웨는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용서했습니다.  그 땅에 멸망이 아니라 커다란 부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을 축복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몹시도 싫어하고 성냈다고 말합니다.

그는 2절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면 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용서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했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나님 때문에 내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졌습니다.  내가 선포했던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변덕 때문에 내가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요나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자기만 공연히 미친 소리하고 다닌 꼴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말은 헛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넋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내 정서와 내 생각과 하나님의 명령이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개인의 자존심이 백성의 구원보다 소중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생명이 달린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내 자존심이 상할지언정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받아야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내가 손해 좀 보고 속상한 일들이 있고 내 자존심이 상처를 받는다 할지라도 영혼들은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진정한 자세가 아닌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에게 물었던 그 질문으로 다시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 때문에 무엇을 손해보셨습니까?  어떤 상처를 받아보셨으며, 무엇을 빼앗겨 보셨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천국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독생자를 빼앗겼습니다.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살면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요나에게 세 번째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요나, 당신이 정말로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나의 마지막은 "내가 아끼노라"라는 말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입니다.  11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가격과 가치가 혼돈을 일으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데 가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가격으로 평가합니다.  그가 얼마만큼 돈벌이가 되는가?  그의 재능이 무엇인가?  그의 실용성 여하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가치가 아니고 가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의 인격, 그의 신앙, 그의 영혼, 하나님과의 관계, 본질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사람의 가치관이 왜곡되고 나면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덜 소중한 것인지, 무엇 때문에 기뻐해야 되고, 무엇 때문에 분노해야 하는 것인지 그 기준이 흔들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어떤 미친 사람이 백화점에 들어가 정가표시를 모두 바꿔 놓은 것처럼 혼돈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에게 물은 그 질문으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끼는 사람을 아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의 가치를 알고 살아가십니까?

본문 10절과 11절은 요나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이 철저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요나의 가치관은 철저하게 박넝쿨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치관은 생명 중심이었습니다.  영혼 중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가치관이 박넝쿨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내 재산을 증식시키고, 내 건강을 관리하고, 내 지위를 보전하고, 내 명예를 조금 더 높여 가는 것,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 내 모든 관심이 박넝쿨에 머물러 있을 때에 참으로 소중한 것을 보는 눈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가치관, 성경적인 가치관,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눈이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살아갈 때 잃어버리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환경과 분복을 누리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빠져서 살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학교 한 반이 중간고사에서 꼴찌를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아주 화가 난 모양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공부를 안 할 수 있느냐?  50점 이하는 전부다 밖에 나가서 손들고 서 있어."
맹구란 아이가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나는 50점인데 어떻게 할까요?"
화가 난 선생님이 맹구를 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문틀에 끼어 서 있어."

사랑하는 여러분, 중간지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가치관 50%, 하나님 나라 가치관 50%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 구하느냐?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진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먼저 구할 것인가?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길 것인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내 눈이 박넝쿨에 가려서 섬기고 구원해야 할 이웃을 볼 수 없다면, 박넝쿨 가치관에 가려서 하나님의 소중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면, 오늘 본문의 7절처럼 벌레를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십니까?  동풍이 불어서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마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한번에 불어 버리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십니까?  천하 우주만물이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나도 아끼고,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나도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가치관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선지서는 선지자가 백성들을 꾸짖고 달래고 바꾸어 가는 이야기라면, 유독 요나만은 하나님이 선지자 요나를 바꾸기 위해서 무단히도 애쓰는 절절한 사랑이 구절 구절 담겨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될 선지자가 뭇 사람들로부터 꾸중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으로부터 책망 받는 요놈의 나로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아는 자만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최고가치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악은 미워해야 하지만 죄인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어떤 선교사님은 옷을 입지 않고 사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옷을 벗고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들을 사랑하니 같이 벗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 자존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벗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의 주변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환경과 조건 때문에 울고 웃는 인생이 되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보람 때문에 울기를 원합니다.  그 행복 때문에 웃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내가 가장 아끼는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것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끼노라"
우리도 말합시다.
"하나님이 아끼는 것, 우리도 아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 우리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 나도 소중히 여기며 살겠습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아끼십니다.  니느웨까지 아끼고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당신을 버리시겠습니까?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내가 어찌 너를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 우리도 당신이 아끼는 영혼들을 아끼겠습니다.  우리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4장 11절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나의 끝입니다.  그 다음에 요나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결론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두 가지가 가능할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아끼는 것을 아끼고, 자존심 손해 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교사가 되어서 잘 살았다.  그렇게 결론이 내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는 요나는 원래 싸가지가 없는 인간이라 5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충성하면서 살다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갔다.

5장이 없습니다.  4장의 결론 없는 미완성교향곡입니다.  왜 그랬을까?  요나서 5장은 저와 여러분이 기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떻게 살래? 너의 인생의 결론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요나서 5장을 들고 내 앞에 오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각자가 기록한 요나서 5장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도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들을 아끼며 살았습니다.
제가 어찌 그것들을 아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저와 여러분 인생의 결론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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