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른 이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자 (고후 1:15~ 고후 2:4)

  • 잡초 잡초
  • 301
  • 0

첨부 1


다른 이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자 (고후 1:15~ 고후 2:4)
 
 
이 땅에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가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즐겁게 해 주는 기쁨조가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렇게 한 사람을 우상화 하기위하여 몸 바치고 하는 것들이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신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까? 자녀를 기르는데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다. 자녀가 만일 매일 사고를 칩니다. 공부도 안하고 직장도 안 다니고 결혼도 안한다면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결혼은 했는데 매일 이혼하네 사네 보따리 싸들고 다닌다면 그것도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직장도 열심히 다니고 결혼도 해서 행복하게 잘 살면 부모님에게는 얼마나 기쁨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린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하나님께 감동이 돼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쁨과 감동을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지난 주일에 읽었던 본문의 뒷부분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문을 연기했던 그 이유를 오늘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읽었던 고린도전서 16장 5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문 계획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먼저 마케도니아를 들렸다가 마케도니아를 지나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아준 헌금을 가지고 내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고린도교회의 방문 계획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방문 계획을 이렇게 변경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먼저 육로로 너희 고린도교회에 가서 거기서 마케도니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너희를 만나고 그리고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계획을 고린도를 들리지 않고 곧바로 마케도니아로 가는 계획이었는데 변경된 계획은 마케도니아 가기 전에 고린도를 먼저 들렸다가 마케도니아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고린도를 두 번째 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에 대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좋지 않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무슨 사도가 이랬다저랬다 하느냐? 우리 앞에서는 온다고 했다가 안온다고 하고 또 안온다고 했다가 온다고 하는 등 이렇게 계획을 변경하고 바꾸는 것으로 봐서 사도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신빙성이 없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왜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오늘 본문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커다랗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5-17절)

첫 번째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문 계획을 변경한 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계획을 변경하게 된 것은 너희들 앞에서는 예 예 하면서 속으로는 아니라, 아니라 한 인간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따른 변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명령에 대한 ‘예’라고 하는 순종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고 때로는 성경을 혼자 읽으실 때, 아니면 차를 타고 가다가 카세트 테이프을 듣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또는 믿음의 이웃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경공부를 하다가 하나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것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경험하여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배경 등을 너무 중요시 여기는 나머지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어떻게 여기냐 하면, 하나님 그것은 아닌데요 그것은 제게 해당되지 않는데요, 너무 무리한 요구인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요, 우리는 자꾸만 우리들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핑계를 댑니다. 아니라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지금 뭐라고 합니까? 내가 속으로는 아니요 아니요 했는데 너희한테‘예’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18절)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실 때마다‘예’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연기하거나 방문 변경한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인간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에 대한‘예’라는 표현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19절)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때 뭐라고 반응하십니까? 하나님 그것은 제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제가 할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예요. 저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야기 하실 때마다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까? 그러나 오늘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만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시든지 관계없이 예라고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요청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초대교외 이후에 유럽이나 미국교회에는 예배드릴 때 앞쪽에 아멘 코너가 있습니다. 아멘이란 무슨 말인가요? 아멘은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이지요? 초대교회나 구미교회가 아멘 석을 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아멘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지요? 용서하라 도와주라 대접하라 가르치라 훈련시키라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십니까? 그럴 때마다 뭐라고 반응을 보이십니까? 예, 아멘,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그런 반응을 보이게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시고자 하는 축복과 은혜가 바로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들으실 때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될 줄을 믿습니다. 예스라는 반응을 보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든지 예라고 아멘이라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이 튕겨서 도로 하나님께로 갑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의 심령 속 깊은 속에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다고 한다면 손해는 누구일까요?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오’라는 말은 하지 않고‘예’만 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기 자신이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한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예라고 하는 아멘이라고 하는 대답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요청을 하시든지 간에 아멘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때때로 여러분이 보시기에, 생각하시기에 여러분의 능력을 벗어났고, 지금이 아니고 경험과 맞지 않고 여러분의 판단과 지식에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고 지금이라고 그리고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홍해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홍해는 무엇을 상징하나요? 홍해는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인간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홍해 앞에 다다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우리를 묻을 대가 없어 죽일 대가 없어 우리를 수장시키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장시키려고 홍해 앞으로 데리고 왔나요?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망가뜨리기 위하여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시키기 위하여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계획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축복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인간의 눈에 홍해는 건널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아닙니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은 이야기 하십니다. “건너가라고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불가항력적인 힘을 주실 수 있습니다. 삶에 건널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앞으로 몰았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아니예요. 하나님, 이건 할 수 없습니다.”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여러분은 건널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현실을 주시든지 간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멘.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생각 때문에 자꾸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브레이크를 겁니다. 안 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라고요. 만약에 하나님이 요청하시는 그 어떤 일에 자꾸만 아니요를 하면 하나님은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 할 수 없다는 사람과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요청을 하시든 간에 아멘 주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해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시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이유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23절)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 고린도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합니까? 이 문제 때문에 교회 안에 찬반양론이 서로 싸웠습니다. 이혼을 해야 합니까? 라는 문제 때문에 또 문제가 생겼지요? 교인들끼리 싸우다가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것이 맞습니까? 라는 문제가 있었지요? 

성만찬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죽은 자가 나중에 육체가 부활합니까? 이런 것에 대한 논쟁이 생겼지요? 교회 안에 많은 은사가 있는데, 어떤 은사는 굉장한 사람이고 어떤 은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현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이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목회를 했던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가게 되면 그 문제가 붉어졌을 때 가게 되면 사도바울은 그 문제를 야기 시켰던 모든 사람들을 출교시켜야 했습니다. 징계 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 내가 너희들에게 매를 가지고 가랴?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가랴? 했습니다. 매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매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잘못된 사람들을 징계하고 때리고 출교하고 내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24절)

그들의 믿음을 주관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이 판단 자가 돼서, 재판관이 돼서, 주관하는 자가 돼서, 고린도교회 안에 문제를 야기 시켰던 사람, 잘 잘못을 가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믿음을 판단하는 자가 되는데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나는 너희의 믿음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판단하는 자가 되길 원치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판단하고 주관하는 자라는 말은 책망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아픔을 주는 자가 된다는 것이고, 사람들 가운데 좋고 나쁨을, 옳고 그름을 근본적으로 율법주의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사람이 되고자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간 혹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옳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판단이 옳다고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 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사도바울은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사도바울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근심케 하는 자가 아니라 너희의 믿음을 돕는 자가 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를 주관하고 판단하는 자 이기 이전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믿음, 올바른 믿음을 북돋아 주고 기쁨을 더 돕고 많아지게 하는 기쁨조 역할을 감당하려고 했던 사실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믿음을 판단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극히 주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는 믿음의 행위를 보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판단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고백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실수와 잘못을 책망하고 판단하고 주관하는 자가 되기보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그 기쁨을 더 도와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절망하게 만들고 판단하게 만들고, 근심하게 만든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세요?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연기한 것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의 잘못과 실수를 스스로 판단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올바로 교회를 섬길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계획을 연기했다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장 1절부터 4절에 보면 나는 너희를 근심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근심케 하는 자가 대신에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도와 그 기쁨이 더 많아지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생활하시는 가운데 누군가를 위하여 기쁨과 감격과 그리고 위로와 격려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간에 내 판단 내 주관 내 생각대로 예 아니요 라고 결정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면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최고의 것을, 최상의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고 믿고 예 아멘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라고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들을 근심케 하거나 힘들게 하는 사람, 남들을 판단하거나 주관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남들의 기쁨을 도와주어 그 기쁨이 점점 많아지게 하는 기쁨조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