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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 인내 (약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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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인내 (약 5:7~11)

이탈리아 화가[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어느 날[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라는 사람이 찾아와 작품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이었고 얼마의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개월로도 안 되고 1년으로도 안되니 그냥 맡겨두고 다 그리면 연락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다빈치는 장장 4년이나 걸려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리고 그도 모자라서 그림을 [조콘다]에게 건네면서"이 그림은 아직도 미완성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그림이 그 유명한<모나리자>라는 작품입니다. 

모나리자는 그런 사연이 있는 작품입니다. 명작은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작은 완성이 없습니다. 순간적인 욕심이나 이득을 위해서 급조하고 거짓말하고 겉치장만하는 세상에 감동을 주는 작품도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삶도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각각입니다. 바쁘게 무엇이든지 빠르게만 달려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걷다가 때로는 뛰다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부분이 운전을 하겠습니다만 고속도로를 운전하다보면 달리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지켜야 하는 규정 속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으로 달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좌우를 돌아 볼 여유가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을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은 고속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서 속도를 다하여 질주하는 인생입니다. 정지하는 경우도 없고 주변을 돌아 볼 겨를도 없이 달리기만 합니다. 친구나 부모,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성공을 향하여 달려가는 자기 인생에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하여 무작정 속력을 높여 달려갑니다. 

언제까지 달립니까? 사고가 날 때까지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멈추어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런 반면 국도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도로 운전을 해 보면 좌우에 볼거리가 참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풍광도 즐기고 시원한 바람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빨리 가지는 못할지라도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종종 돌아보고, 인생에 빨간 불이 켜지면 달리던 길을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여유를 가지고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기도 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속도를 중시합니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의 경쟁이요, 속도가 곧 돈이라고까지 여깁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인생에 중요한 것은 속도를 내는 일보다 방향을 잡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빨리 가겠다고 한꺼번에 많은 것을 잡으려고 해봅니다만 안 되기가 일쑤고 차라리 한 가지씩 차례대로 여유 있게 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고 능률적일 때가 있습니다. 

냉장고에 음식을 하나 가득 넣어두면 냉장 효과를 제대로 거둘 수가 없답니다. 너무 꽉 채우지 말고 약간의 공간을 비워 두는 것이 훨씬 더 냉장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욕심을 부려서 많이 그리고 조급하게 하려는 것보다 삶에 여유가 있어야 생동감 넘치는 건강을 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여러분, 미술에 조예(造詣)가 깊은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그림을 서양화와 동양화로 나눕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의 특징이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화(西洋畵)도 아름답습니다만 동양화(東洋畵)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때 바로 구석구석까지 채색된 서양화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여백(餘白)을 이야기 합니다.<여백(餘白)의 미(美)>라는 것이 바로 서양화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동양화의 매력입니다. 미술만이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에도 쉼표가 있고 그 쉼표를 잘 지켜야만 음악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예술을 흔히 인생이라고 표현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여유가 있어야 멋도 있고 때로는 성공도 있습니다. 조급하게 굴면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여유라고 하는 것은 가만히 있는데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유란 또 다른 의미에서 인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참는 성품 속에서 여유가 나옵니다. 견디고 이기는 모습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여유입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인내심은 점점 줄어들고 소위 말하는 놀랄 만한 스피드의 시대에 살아갑니다. 이러한 스피드 시대에 살아가면서 여유를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랩니다. 인내와 기다림이 없습니다. 오래 참지를 못해요. 무엇이 되던지 빨리 되었으면 좋겠어요. 꾸준히 성실하게 언제 돈을 법니까? 빨리 한꺼번에 왕창 벌었으면 좋겠어요. 이른바 대박의 꿈인<로또 열풍>이 사그라지지를 않습니다. 

인내를 배우고, 오래 참음과 끈기 속에 성실과 땀 흘림이 가져다주는 소산에 즐거워하는 것이 본래적 인간의 모습입니다."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는 격언처럼 쓴 맛 속에서 배가(倍加)되는 단맛을 보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참습니다. 인내하지를 못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젊은 날 열심히 벌어서 성실히 쓰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부모님 나에게 물려 줄 재산 이왕이면 빨리 물려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 살아계신 부모님에게서 재산을 하루라도 빨리 가로채려고 하는 비윤리적인 일들도 일어납니다. 부모님 돌아가실 때까지 못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사실 이런 자식들에게는 재산을 물려주지 말아야 됩니다. 이런 폐해가 속도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살다보니 인내심이란 점점 더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인내심이 없냐를 조사해봤더니 교통신호가 바뀌고 나서 앞차가 출발하지 않으면 뒤차의 운전사가 짜증을 내면서 경적을 울리기까지의 시간이 0.5초랍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3분을 넘기게 되면 역시 짜증을 냅니다.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5분 이상 되면 기다리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택한답니다. 한국인들을 끈기 있는 민족이라 하던 말은 옛말입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인내는 폭력보다 더 강하다. 단번에 꺾지 못하는 것도 꾸준히 노력하면 정복 할 수 있다. 인내는 최강의 정복자다."동, 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것이 바로 이<인내>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여러 곳에서 인내를 강조합니다. 사도바울은 사랑 장이라 불리 우는 고전13장에서"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이 사랑을 설명하는 제일의 정의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내란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가는 덕목임에 틀림이 없는데 자, 그렇다면 과연 올바른 인내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 정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바로 인내란 소망 중에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7절의"길이 참으라"는 말과 7절의"길이 참아"라는 말, 그리고 8절의"길이 참고"입니다. 

또 10절에 보면"오래 참음"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의 단어가 11절에 나옵니다. 바로"인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앞의 네 가지와 11절의 인내는 서로 다른 표현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앞의 것은 인간관계에서 당하는 고통을 잘 참으라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인내라는 말은 환경이 주는 고통에 대해서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두 가지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과 환경이 주는 고통 모두를 잘 참고 견디는 것이 진정한 인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특히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로는 원망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우리는 내가 아픔을 겪을 때 생각하기를 누구 때문에 이 고통이 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원망하고, 아내가 남편을 원망하고,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부모가 자식을 원망하는 세상에서는 인내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원망하고 나면 인내가 소용없어집니다. 인내란 제대로 해야 됩니다. 복수하기 위해 숨겨서도 안 되고, 원수 갚기 위해 쌓아두어서도 안 됩니다. 위장 된 인내는 더 이상 인내가 아닙니다. 

그 다음 또 다른 하나의 인내는 환경에 대한 인내 입니다. 이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예수 믿는 과정 속에서 찾아오는 고난에 대한 인내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 기자는 욥의 인내와 선지자들의 인내를 본보기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환경이 순탄하고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하나의<기독교적 미신>입니다. 이것을 버려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여전히 고난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 신자들 가운데"믿으나 안 믿으나 똑 같은데 왜 예수 믿으라고 하느냐"는 반문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왜 입니까?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똑 같은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 고난을 어떻게 이겨나가느냐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 앞에 절망하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고난의 너머에 있는 영광을 내다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이 때로는 우리를 고난 앞으로 끌고 간다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순종은 우리를 고난이 있는 십자가로 이끕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난을 통해야만 얻어지는 십자가의 영광을 배우고야 우리의 것이기 되기 때문입니다.[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선언한 대가로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면제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 있게 했고 그 고난 속에서 엘리야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파하다 반역자로 잡히기도 하고, 우물에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 예레미야가 절망하거나 도망 간 것이 아니라 오래 참았고, 하나님은 인내하는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모두 의로운 사람들이었지만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누구 한 사람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인생 끝이라고 막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인내하며 묵묵히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형편대로 살았더니 하나님은 이들을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시켜주셨다는 사실을 통해 인내의 위대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못된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고통 때문에 못 견디게 아프고 그래서 한 바탕 터뜨려야 시원할 것 같습니까? 끝까지 참을 일입니다. 인내하되 하나님이 풀어 주실 때까지 참으십시오. 내가 급하게 풀려고 하지 않아도 반드시 풀어 질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풀립니다. 그걸 견디지 못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내 성격대로 풀어버린다고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성령의 열매인 인내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순간순간 닥쳐오는 고난으로 인해 신앙의 회의에 빠질 때는 있습니까? 그럴 때에도 오래 참을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길이 참는 자세, 오래 참음의 그 인내야말로 우리가 맺어야 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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