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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욘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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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욘 1:4~6)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에 결렸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입니다. 
이미 그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매독균이 전염되었는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름 모를 병으로 죽었습니다. 셋째 아이 역시 부모로 물려받은 병균으로 인해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넷째는 어머니의 폐결핵 균을 물려받아 결핵 환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의사라면 어떻게 처방해야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엄마라면 어떤 할 것입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 상황이라면 어머니는 뱃속의 아이를 없애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즉 유산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중절 수술을 해야 하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그 뱃속에 있던 아이는 세계적인 음악가 베토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현재의 상황만 보고 단순한 생각으로 결정을 합니다. 그러기에 큰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결정이 이처럼 위대한 작곡가를 죽일뻔 한 경우와 같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까?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만 보입니다. 그러니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주인공 요나가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니느웨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싼 배 삯을 주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풍을 바다에 내리셨습니다. 결국 큰 폭풍으로 배는 거의 박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과 선원들은 살기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그런데 요나의 자세를 보세요. 아주 특이합니다. 
5절 후반부를 보세요.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가 배 밑바닥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그는 니느웨는 악한 나라요,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좁은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이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그가 탄 배가 바다에 침몰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배 밑바닥에 들어가 잠을 잡니다. 

선장이 그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요나를 깨우며 야단을 칩니다.  

6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성도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을 읽다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이렇게 들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하는 말입니까? 사실은 선지자라고 불리는 사람 요나가 선장에게 해야 할 말이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요나가 선장에게 듣고 있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오늘 이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엄청난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성도는 어찌해야 합니까? 혹시 이 풍랑의 원인이 요나가 겪었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요/나/ 때문인데 우리는 나와 상관없다고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고 질책했던 선장의 이 말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에게 외치는 말은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풍랑의 이유를 알라 하십니다.  

혹시 우리나라가 당하고 있는 이 엄청난 풍랑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인 요/나/에게 있지 않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과거 요나처럼 우리가 해야 할 사명, 복음전도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사명은 내던지고 우리만 잘 먹고 잘 살자고 호의호식하며 사치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요나가 타고 가던 배를 멈추게 하기 위해 풍랑을 일으키셨던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을 멈추게 하기 위해 풍랑을 내리신 것 아닐까요? 
그 원인을 알면 풍랑은 쉽게 잠잠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죄수로 끌려갈 때 ‘유라굴라’ 광풍을 만났을 때 죄수의 몸으로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사도행전27:25를 보세요.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했습니다. 

그는 비록 죄수의 몸이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배에 탄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사명이요, 세상을 향해 외쳐야할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찌합니까? 오히려 배 밑바닥 속에 들어가 잠을 잡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과 승객들은 어찌합니까? 모두 두려워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생명처럼 소중이 여기던 재물을 바다에 던집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처럼 예기지 않은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1) 첫째는 종교적인 방법입니다. 본문 5절에서 “사공이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를 의지하는 사공과 승객들의 몸부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배 선장도 요나를 깨우며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선장조차도 자기들이 직면한 문제는 하나님 같은 절대자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2) 둘째는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했습니다. 이 방법은 풍랑을 헤쳐 나가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둘 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풍랑의 원인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자신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나1:12을 보세요.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우리나라 대한민국 호는 지금 거대한 경제 풍랑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 지진으로 지금 세계 각국 경제가 난리가 났습니다. 마치 지난번 인도네시아 앞바다에서 생긴 지진으로 주변의 국가에 엄청난 쓰나미 피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경제 풍랑은 진앙지는 미국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동유럽, 남미, 그리고 아시아 각국에 사정없이 몰아닥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당할 일은 지금 겪고 있는 현상은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IMF의 지원을 받아 경제위기를 넘기는 일을 겪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미 예방접종을 한번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호된 감기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잘 넘길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보호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엄청난 풍파 앞에 우리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를 타고 있는 성도 여러분! 
이런 시국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시 내 책임이 아니라고 될 대로 되라고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요나가 타고 있던 배의 선장의 말을 다시 한 번 읽으시기를 축원합니다. 

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이 풍랑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풍랑이 아닙니다. 이 풍랑의 진앙지는 어찌 보면 미국이 아닌 우리나라요. 남들이 아닌 우리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풍랑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자기들의 신을 향해 울고불고 합니다. 그리고 주식과 펀드에 돈을 넣었던 사람들은 재산이 다 날라 갔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진짜 진앙지인 요/나/는 뭐하고 있습니까? 


2.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알라 하십니다. 

요나는 해결책이 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니느웨를 향해 가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고 외치면 풍랑은 즉시 멈춥니다. 그는 풍랑의 원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도망치고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배 밑바닥에서 자빠져 자고 있습니다. “완전히 배 째라”는 식이다. “날 잡아 잡수시오.” 입니다. 그래도 니느웨는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고집이 요나의 고집보다 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만민을 향한 구원의 열정, 여기서 만들어진 고집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데 요나는 편협한 유대적 선민의식으로 그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봐야 매만 맞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제비뽑기해서 바다에 던져서 해결하십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그제서 항복합니다. 그제서 깨닫습니다. 

성도 여러분! 
해결책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요나처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져라’ 그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고생안하고 편안히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손드는 것입니다. “항복! 알았습니다. 니느웨로 가겠습니다.” 이러면 풍랑은 즉시 잔잔해 집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큰 풍랑이 닥쳤습니까? 지금도 그 풍랑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까? 요나처럼 될 대로 되라 하면 풍랑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배 밑바닥에 들어가 자빠져 잔다고 해결되질 않습니다. 

그러다간 하나님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합니다. “야 너 하나님 믿잖아? 왜 이러고 있냐? 네가 믿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그러면 누가 아냐?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지”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우리 성도가 회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주셨던 풍성한 은혜를 우리끼리만 누리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마치 우리가 잘해서 누리는 경제적 풍요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50년 전만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과거 50년전 필리핀이 GNP가 700$일 때 우리나라는 50$이었습니다. 그러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세계 182개국 중 경제력 12위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세계 부자 나라 30개국이 모인 경제 모임인 OECD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아야 하는데 다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과거에 받았던 도움과 사랑을 갚을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제일 부끄러운 것은 우리나라가 지난 1945년부터 1999년까지 무상원조 69억 달러와 유상원조 57억 달러 등 총 127억 달러의 대외원조를 받았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규모 대비 대외원조는 OECD 국가 중 최하위인 0.06%에 불과하여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수준이라 합니다. 정부는 2009년까지 이 비율을 0.1%까지 높이겠다는 계획이지만, OECD 대외원조위원회의 평균이 0.24%인 점을 감안하면 정말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그러니 세계 각국이 우리나라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아직 우리보다 GNP수준이 상대가 안 되는데도 아프리카나 제3세계에 엄청난 원조를 하며 투자를 합니다. 그러니 2006년 12월에 아프리카 52개국 중 42국 정상을 초빙하여 국제회의를 했는데 그들 중 우리나라를 들려간 나라는 다섯 나라 지도자 뿐 입니다. 그만큼 한국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나누어야 합니다. 복음도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도 나누어야 합니다. 아직도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인류가 자그마치 20억이 넘습니다. 그들은 누가 구원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요/나/를 여기에 들어 사용하시길 원하심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하반 절을 보세요.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3. 오늘 이 시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 회개입니다.  

요나는 구원은 오직 유대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유대인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당신의 백성을 두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유대인이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구원의 은총을 누리려 했습니다.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온 천하에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 일을 위해 세계 각국을 들어 쓰십니다.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나라를 들어 쓰신 하나님, 그 후 로마를 들어 전 유럽에 복음을 확산케 하신 하나님, 그리고 근세사에 영국을 들어 쓰시고 그 후 미국을 들어 쓰시고 있고 있습니다. 이젠 미국 다음이 어디일까요? 

많은 사람이 한국이라 말합니다. 그렇게 되길 소원합니다. 현재도 세계 각국에 16,000명이 복음을 들고 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계복음화의 마지막 주자는 한국이 아니고 중국이라 봅니다. 한국은 힘이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역할은 저 거대한 중국이 일어나게 깨우는 역할입니다. 

2006년도 현재 아직도 미전도 종족이 12,000종족이라 합니다. 믿는 성도 숫자가 5%미만인 종족을 미전도 종족이라 합니다. 그들을 위해 누가 갈 것입니까? 바라기는 요/나/입니다. 우리 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저 중국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열매를 세계가 따 먹을 것입니다. 


2) 영혼의 가치관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교회를 세우셨는지, 왜 우리를 먼저 구원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온 세상에 사람이라곤 오직 나 한사람 밖에 없었을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3) 나 한사람을 들어 쓰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난을 겪을 수도 있고 반대로 복을 받을 수도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요나처럼 불순종하면 수많은 영혼이 복음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 한 사람이 요나처럼 억지로라도 순종하면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때문에 누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전도함으로 인해 주님을 만난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4) 결국에는 주님이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끝까지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한 당신의 뜻을 이루셨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사랑하시고 지켜보시며 기다리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어 당신의 뜻과 계획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배 밑 깊숙한 곳에 숨어 잠들어 있지만 하나님은 이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도적이고 실제적으로 역사하시어 그를 깨우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니느웨에 12만 명을 구원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어느 선교사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해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강연이 끝난 후 한 사람이 면담을 청하더니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은 하나님에 대해 오늘 말씀 하셨는데 하나님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 선교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을 본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내게 오셔서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지금의 나 되게 하셨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런 사건들과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이 속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 깨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런 것을 통해 자신을 깨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깨우십니다. 그냥 내어버려 두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주님이 묻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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