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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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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은 마태가 썼습니다. 그는 자신이 제1복음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자신이 처음 예수님을 만나던 장면을 수줍게 단 한 구절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그 후에 자기 집 식사 자리에서 벌어진 사건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자신과 예수님의 만남을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태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 기자들도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마가라는 이름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4장 51절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실 때 제자들이 달아났는데 그 중 한 청년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르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벗은 몸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에 추론하여 이 달아난 청년이 바로 마가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끝까지 함께 했던 제자였지만 그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다만 자신을 주님의 “사랑받은 자”(요19:26) 곧 애제자라고만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자기를 잊고,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이 되었습니다. 자기 흔적을 부각시키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매우 많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교훈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리할 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들은 철두철미 예수를 자랑하고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자기를 잊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에 욕심도 살고 근심도 두려움도 살아 있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나를 좇으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예수만 좇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만 보였고 그 뒤를 좇다가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를 좇지 않고 자기 욕망을 좇습니다. 예수로 가장한 자기 이념을 좇으려 합니다. 예수가 아니라 축복을 좇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영광과 안전을 구하려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자기를 좇는 자는 육신을 좇는 자요 그 열매는 불안과 허무와 사망일 것입니다. 예수를 좇는 자는 영을 좇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생명과 평안의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 삶이 불안과 근심에 쌓여 있습니까? 자기가 무엇을 좇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마태는 예수님을 자신이 일하던 세관에서 만났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절에서 자신은 세리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성자 마태가 은행원과 회계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마태만큼 부끄러운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고기잡이 하거나 친구 소개로, 아니면 세례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에 비해 마태는 세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이야 세무 공무원이 선망의 직종이지만 예수님 시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는 세금을 자신들이 직접 걷지 않았습니다. 세리들을 고용하여 대신 걷게 하고 그 중 일정 할당량을 받았습니다. 별도의 급료가 없었던 세리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규정 이상의 세금을 더 걷어 들였고 치부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앞잡이였을 뿐만 아니라 합법으로 위장한 강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곧 죄인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비록 달리 수가 없어 세리 일을 하고 있었지만 마태의 마음은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회의였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 당당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마태의 갈등은 더 심해졌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마침 주님께서 자기가 일하시던 세관 근처에 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미 자기 앞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아마 이 때 마태는 부끄러워 채 얼굴은 들지 못하고 장부만 끄적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힐끗 예수님을 보았는데 그 때 예수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향하여 두 말할 것도 없이 “나를 따르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결정적인 만남이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름에 마태 또한 두 말 않고 따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 하니까 그들이 그물을 버려두고 좇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향하여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들이 배와 아버지를 두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은 권위 있는 부름이었고, 제자들 또한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 앞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의 결단은 다른 어떤 제자보다 더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한들 그 배와 그물이야 가족의 소유로 남았을 것입니다. 여차하면 다시 어부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나 마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직업을 포기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선택은 현명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따라나섰기에 마태는 위대한 이름을 역사에 남겼고 세리들의 수호성인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면 그는 평생 그늘진 세관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운 이름을 간직한 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마태는 열두 제자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열두 제자의 면면을 보면 그 출신들이 매우 다양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와 같은 매국노 소리를 들었던 제자가 있었던 반면에 가나안 인 시몬은 셀롯 시몬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셀롯은 젤롯을 말합니다. 젤롯은 열심당으로 열혈 애국지사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가룟이라는 말은 ‘이스카리옷’인데 이는 단검 또는 곤봉의 의미로 테러리스트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가룟 유다 또한 열심당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배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난한 민중이라고는 할 수 없고 당시 중산층 정도 된다 할 것입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우뢰의 아들이라 불릴 정도로 성질이 급하고 도마는 의심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처럼 다양한 직업과 정치관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가 된 이유는 단지 하나 예수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이상이나 정치적 이념, 어떤 출신 때문에 주님을 따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 출신이 다양함에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곧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교회는 어떤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모인 집단이 아닙니다. 어떤 사회적 위치나 물질적 부요함을 기준으로 모인 곳도 아닙니다. 성향이 같거나 뜻이 맞아서 모인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때문에 모인 곳입니다. 교회의 기적은 그들이 도무지 하나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때문에 하나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보수와 진보가 한 데 어울리는 곳입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하고, 이름 있는 사람과 이름 없는 사람이 함께 해도 서로 부끄러움이나 소외됨을 느끼지 않는 곳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예수 때문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쪽에 치우친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자신의 이념이나 취미를 따르는 사교 모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기뻐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초대를 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예수님 일행뿐만 아니라 마태의 동료 세리들이 많이 초대되었습니다. 마태는 자기 동료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준 것입니다. 선교가 그렇습니다. 세리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것을 통하여 다른 수많은 세리들을 구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초대받지 않았던 불청객들이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죄인들만 모여서 식사하는 이곳에 소위 거룩하다고 하는 이들이 여기에 나타난 것은 어울리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꼬투리를 잡을까 하다 죄인인 세리의 집에서 식사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는 직접 말을 못하고 제자들을 불러 추궁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 

바리새인의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절과 13절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실제 그렇습니다. 병원에는 병든 자만 갑니다. 의사는 병든 자를 위하여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잘 살고 있었다면 구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병들고 죽어가고 있기에 그들을 살리려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가지고 올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의로움과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부족합니까? 당신 스스로 죄에 고통에 짓눌려 있습니까? 나는 병들고 부족한 인생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죄인들과 병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가자고 하니까 죄가 많아서 못가겠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목욕탕에 가는 이유는 몸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을 씻기 위해서 입니다. 죄가 많아 교회에 못가겠다는 말은 더러워서 목욕탕에 못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는 성자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당연합니다. 교회는 병원입니다. 병원에는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을 병원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실상 인간은 모두 죄인이요 병든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죄인과 의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죄인이라 인정하는 죄인과 죄인이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으로 좀 바른 사람, 착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가 더 힘이 듭니다. 환자가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치료를 할 수 있는데 스스로 건강하다 생각하여 병원에 가지 않으니 도무지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상 자기 의에 사로 잡힌 사람들입니다. 자기 의란 것은 자기 기준이 강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기준을 정해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사람이요,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착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차이는 50보 100보입니다. 전쟁터에서 50보 달아난 사람이 100보 달아난 사람을 향하여 비겁하다고 나무라는 격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100보 달아난 사람이 낫습니다. 그는 최소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처럼 죄인과 세리의 친구 오셨기에 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나아 왔습니다. 창기들이 주님 앞에 나아오고, 세리와 같은 사람이 나오고, 문둥병자가 혈루증 않는 여인처럼 소위 부정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옵니다. 이 여인은 향유를 붓기도 전에 예수님의 발치에서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그 눈물이 발 위에 떨어지자 자기 머리털로 닦습니다. 연신 그 발에 입마추고는 향유를 그 발에 붓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이 죄가 많다고 손가락질 하였습니다. 아마 그 여인은 창녀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나 스스로도 자신을 부끄러워하였던 한 여인이 주님 앞에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한 여인의 마음을 열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인일지라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힘

주님은 의인과 죄인을 나누고 스스로 의인인 채 하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이는 호세아서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지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제사 곧 예배나 교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을 원합니다. 사람을 향하여 너는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정죄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진리의 잣대를 들이 대었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망했을 것이요, 그 앞에 설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입니다. 이는 자궁이라는 ‘레헴’과 같은 어원입니다. 뱃속에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어미의 마음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마치 자기 자궁 안에 품고 있는 아이를 보듯 그렇게 보셨습니다. 영어로 긍휼은 compassion입니다. 이는 함께 한다는 com 과 고난 아픔을 의미하는 passion의 합성어입니다. 긍휼은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바로 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단지 다른 사람을 돕는 봉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더 근원적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마치 자기 뱃속의 아이처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날카로운 잣대보다는 이해의 마음으로 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는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관용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찬바람이 쌩쌩 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고 폭력적이며, 서로 고립되어 자살을 권장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조안 C 존스는 <가이드포스트>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전합니다. “간호학교에 입학한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강의 대신 간단한 문제지가 수록된 시험지를 돌렸다. 나는 수업을 착실하게 들었던 터라 별로 어렵지 않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제를 보고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는 ‘우리 학교를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아주머니 이름이 무엇이냐?’는 거였다. 검정 머리에 키가 크고 나이는 오십대쯤 되어 보이는 그 아주머니를 여러 번 본 적은 있으나 이름이 뭔지 알 리가 없었다. ‘이런 걸 시험 문제라고 냈나? 설마 점수에 반영하진 않겠지.’ 마지막 문제 때문에 답안 하나를 작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교수님, 마지막 문제도 점수에 반영되나요?’ 답안지를 제출한 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장난스럽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러자 교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간호사로서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여러분의 각별한 주의와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설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미소를 보내며 인사를 건네는 것이 전부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지금도 나는 그 수업을 절대로 잊지 않고 있다. 청소부 아주머니의 이름이 도로시였다는 것도” 

병원에서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차트로 구분될 뿐입니다. 몇 호 환자, 어떤 암 환자, 진기한 케이스!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은 자기 이름을 가진 소중한 한 사람이요, 한 여자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버지요, 그를 사랑하는 부모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물질중심의 사회를 살다보니 한 사람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는 죄인이요 병자이기 전에 소중한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심한 죄인이고 많은 고통을 겪고 있고 더 무력한 병자일수록 더욱 더 그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긍휼의 마음이 사람을 살립니다. 죄인을 품으면 그들이 의인이 됩니다. 병든 자를 품으면 그들이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마태는 세리입니다. 그는 돈만 알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뀌었습니다. 복음서 중에 가장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책이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산상수훈을 공부하면서 익히 경험했던 바입니다. 그는 모세 오경의 틀에 맞추어 예수님의 말씀을 다섯 개의 강론집 형태로 복음서를 구성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치 잘 정리해 놓은 곡간 같습니다. 산상수훈에서도 율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으며 예수님을 율법을 완성한 자로서 그리고 있습니다. 마태는 무려 29회에 걸쳐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마태는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이고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시각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과거를 버리지 않고 계승하며 이스라엘의 유산을 더 심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가히 기독교의 새로운 랍비처럼, 서기관처럼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돈만 알던 세리 마태를 위대한 신학자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의 힘입니다.

이제는 고전이 되다시피한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책에서 니그렌의 인류 역사에 존재하는 두 종류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에로스는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먼저 인식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먼저 사랑한다. 그래서 그 대상 속에 가치를 창조한다.” 에로스 사랑은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반면에 아가페 사랑은 가치가 없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에로스 사랑은 그 사람이 가진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 때문에(because of)’ 사랑입니다. 반면에 아가페 사랑은 그 사람이 아무런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고 무가치한 마태를 사랑했습니다. 마태를 사랑하자 그는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건강한 자를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자신이 병들고 무력한 자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갈 충분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면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의인이요 건강하고 능력 있는 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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