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개혁]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전 2:1~8)

  • 잡초 잡초
  • 420
  • 0

첨부 1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전 2:1~8)

 
루터는 내면의 갈등과 씨름하며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그 성당에 한 문서가 걸렸습니다. 이것은 성당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가 쓴 반박문으로 당시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정면으로 비평한 95개의 반박문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종이 한 조각이었지만 그 여파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종교와 정신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95개조의 논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 대량으로 인쇄되었고 순식간에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역사적인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마틴 루터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충성했던 인물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모토는 ‘솔리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라는 라틴어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표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라는 소용돌이는 한 개인의 내면세계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실존의 문제, 내면의 죄악, 죄책감의 문제와 씨름하면서 종교개혁의 핵심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내면세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수도사로서 루터의 자기수련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며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에 참여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려했던 루터는 고해성사와 고행의 길을 가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갈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고민은 더욱더 증폭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누군가 수도원을 통해 천국에 갈수 있다면 진정 그 사람을 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매일의 고해성사에서 내 양심은 용서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느낄 뿐이었다.” 
  
루터는 고행과 고해성사로 자기 안에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정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바울 사도가 쓴 로마서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복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기쁨의 감격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바울의 그 말씀에 끈질기게 매달렸다(롬 1:17). 밤낮으로 명상한 끝에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기록된바 오직 의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단어들의 문맥에 유의하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의란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선물로 거저 주시는 것임을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부터 ‘하나님의 의’는 낙원으로 인도하는 가장 달콤한 단어로 찬양할 수 있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심판하고 징계하는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의란 나는 의가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그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되는 사랑의 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자녀로 삼아주시는 은혜를 새롭게 알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는지 경험했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부정과 부패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내면의 세계에서 말씀으로 확정된 가운데 로마 가톨릭이 갖고 있던 거대한 문제와 타락과 부패상을 95개 조항으로 적었습니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시작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너지고 있다는 굉음을 느끼기 전까지 인간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조금 변화는 것 같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에게는 공적인 삶, 사적인 삶, 그리고 내면의 삶의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중에서 위대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내면의 삶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을 성공하면서 살았다는 사람들의 내면의 삶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자기 속에 있던 문제가 다 드러나고 실존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믿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 내면의 용기가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는 때로 바울과 같은 위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충격적인 이 경제적 위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위기일수록 우리는 다시 기본적인 삶의 질서 속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원칙과 기초 질서 속에 다시 서야합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날과 같은 엄청난 삶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빌립보라는 곳에 가서 외적으로는 엄청난 핍박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육체적인 고통도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전쟁터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이 투쟁과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결코 녹록하지 않고 전쟁터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데살로니가전서 2:2)

그는 싸움을 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을 증거 하는 것 때문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조롱받으며 험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고 표현합니다. “네가 간사함으로 하는구나. 네가 부당하고 부정한 동기를 품고 복음을 증거하는구나. 네가 속임수를 행하고 있구나. 네가 아첨하면서 사람들을 뒤흔들고 있구나. 네가 흑심을 품고 탐욕의 탈을 쓰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구나.” 사람들이 이렇게 비난할 때 바울은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과 비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민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자기의 전체가 걸려 있는 것처럼 뒤흔들리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가진 이런 모습들은 어쩌면 어릴 때부터 칭찬보다는 수없이 많은 비판과 비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정적인 말을 참 많이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때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부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야, 이 못난 놈아. 너는 아무리 해도 안 돼. 너는 이것밖에 못하냐? 야, 저 아이를 봐라. 네 꼴이 지금 이게 뭐냐? 죽어도 싸지. 이 멍텅구리 같은 놈아! 너 같은 놈을 누가 예뻐하겠냐?” 
  
우리는 이유도 모르면서 이런 부정적인 말, 조롱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큰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가슴에 상처가 있어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아픔과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 비웃는 말을 통해서 자존감을 상실하기도 했습니다. 아니 어른이 되어서도 자존감에 대한 상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조금만 건드리기만 하면 금방 화를 내면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쏟아 붓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더 어려운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상처가 치유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받았지만 어렸을 때 받았던 고통이 치유되지 않고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비난과 고통 속에서도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이런 고통을 받았습니다. “너 사기꾼이지? 너 파렴치범이지?” 바울의 큰 고통은 이런 위기 속에서 자기가 혼자 있다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때로는 타협하고, 왕따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인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쁨으로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우리를 두렵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위협 속에서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까요? 이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무거운 짐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때론 밤을 지새우면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이 땅에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때문에 가슴을 두드리며 안타깝게 탄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외로움에 질식하여 자신을 자해하는 일로 인생을 끝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때 사람의 판단보다 더 큰 것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순간 바울은 하나님의 인정을 구했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사모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사람들의 인정, 사람들의 칭찬에 얽매이면 인생의 참다운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데살로니가전서 2:6) 

바울은 성도들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만날 때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작정했습니다. 


시인 타고르가 쓴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있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낼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의 성공에서만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타고르는 세상에서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느끼고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겁쟁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실패하고 무너질 때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씁니다. 

우리의 삶이 이웃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와 환경에 의해서만 평가된다면 우리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보기 전에 하나님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옳게 여기고 기쁘게 여기신다면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2:4) 

바울의 목표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마다 우리의 자아가 부정되고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하면서 자아가 죽지 않고 자기가 살아난다면 가짜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 하는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비난과 칭찬에서부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모욕과 인기에서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확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부정이고 자신의 0점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0점입니다. 본래 내 것이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 내 가족, 내 친구, 내 직업, 내 명예, 내 권력을 내게 주셔서 내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없어도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신앙을 주옵소서. 나는 원래 0점입니다. 본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백하는 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맡겨 주시는 사람으로 사용하십니다. 


내면의 생명을 깨고 나올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에서 엄청난 거절과 거부를 당했습니다. 고난과 능욕을 당했고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으로, 고난의 흔적으로, 배고픔의 흔적으로, 외로움의 흔적으로 절망과 탄식했던 흔적들이 내 몸에 가득히 쓰여 있다.”
  
바울은 자기 삶을 외로움 속에서 견뎌야 했고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기 원했습니다. 그에게 인생이란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때 모든 것을 이겨 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달걀에 생명이 있지만 스스로 껍데기를 깨뜨려야 병아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깨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깨뜨리면 계란 프라이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고통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거친 큰 파도가 다가오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 사랑을 줄 테니 이 모든 환경과 어려움을 이겨 보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것만 보고 도망가지 마세요. 갈등이 있는 것만 보고 도망가지 마세요. 그 속에 어려운 고통의 삶의 역사가 있는 것만 보고 도망가지 마세요. 오히려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으로 들어가세요.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될 때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를 통해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랑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죄인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단과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내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먼저 나 자신이 변화 받게 하시고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