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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먼 사랑의 계산법 (마 1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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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사랑의 계산법 (마 18:10~1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눈 먼 사랑'입니다. 
'눈 먼 사랑'은 계산이란 없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18:12)" 

여기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하는 말씀은 '너희들은 어떤 계산을 하느냐?'는 도전입니다.

주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십니다(마18:12-13; 눅15:4-6). 그리고 그 양을 찾고는 너무 즐거워서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아 양보다 훨씬 값나가는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눅15:23). 
도무지 계산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고대의 어떤 교부나 현대 주석가들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 양은 다른 목자의 손에 맡겨두었을 것이라는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주님은 단호하십니다(마18:12; 눅15:4).

구십구보다 하나가 큽니다. 강하고 유능한 자보다 작은 소자가 더 소중합니다. 
어른보다 어린아이가 더 큽니다. 
이 말씀은 거대한 우상을 깨뜨렸던 ‘뜨인 돌’과 같습니다(단2). 
육중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다윗의 물맷돌'과 같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이기까지 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아흔아홉'을 더 중요시하는 가치관에 물들어 있습니다. 
세상은 크고, 많고, 넓고, 높고 힘이 있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고, 적고, 좁고, 낮고, 연약한 것들은 쓸모없는 존재로 매도해 버립니다. 

맘모니즘, 신자유주의, 성공지상주의가 우상이 되어있습니다. 
너도 나도 큰 것을 좋아하다보니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대형할인마트, 대형서점, 대형음식점, 대형교회가 등장하고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이 발달하면서 더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커질수록, 편리해질수록 사람과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인간성은 자꾸 메말라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아흔아홉'보다 '한 마리'를 주저없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아흔아홉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마25장에서 예수님이 오른편의 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양들이 우리가 언제 그런 적이 있느냐고 이구동성으로 질문하자 주님이 다시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자'는 한마디로 힘없고 약한 자,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자입니다. 이런 소자들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한결같이 차갑게 외면하며, 손가락질하고, 발로 짓눌러버리고, 침 뱉으며, 무시해버리는 그런 자를 찾아본 적이 있습니까?

최근 청송보호감호소에 복역 중인 신창원씨가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모님께'로 시작되는 구구절절한 그의 편지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해인수녀는 온 세상이 신창원씨에 손가락질하며, 분노로 치를 떨고 있을 때에 청송 오지 그 무기수에게 조용히 다가가 무려 7년 동안 끈질기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해 증오로 똘똘 뭉쳐있는 그가 자기를 향하여 마음을 열고 '이모님‘이라 부를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해인 수녀가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한다는 사실을 알고선 신씨가 연필을 든 것입니다.

인도 켈커타의 성녀 테레사수녀와 그 수녀회의 사람들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주님 모시듯 섬겼습니다. 그들은 작은 소자들을 섬기다 힘들면 다음과 같은 사인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손가락을 폈다가 한 손가락 씩 접으면서 “you / did / it / to / me"하는 격려의 사인입니다. 

이는 마25:40절의 '곧 내게 한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영어입니다. 그들은 실상 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시는 예배를 드린 것이며, 그러했기에 영적으로 고갈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이런 소자는 없습니까? 주님처럼 '눈 먼 사랑의 계산법'으로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온 세상이 아흔아홉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할지라도 우리는 계산하는 법이 달라야 합니다.

나아가 마18장의 핵심은 바로 ‘작은 소자’에 대한 관심입니다(마18:5, 6, 10, 14). 주님께서 바라시는 건강한 교회는 작은 소자를 외면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작은 자' 즉 소자에게 '길 잃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마18:12-14). 소자는 소자인데 '길 잃은 소자'란 말입니다. 
'길'은 예수님을 뜻합니다(요14:6). 즉 길 되신 예수를 모르는 자가 길 잃어버린 자요, 소자 중의 소자란 말씀입니다.

겉으로 볼 때 아무리 잘 나가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가 예수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소자 중의 소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길을 잃고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자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와 나아가 영적으로 예수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중에는 두 종류의 소자가 있습니다. 
돌보아야 할 이웃, 병든 자, 외로운 독거노인, 가난한 외국노동자, 주리고 억눌린 북한 형제 등 
우리는 이 육적인 소자들을 이들을 '아흔 아홉'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길 잃은 소자', '소자 중의 소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아흔아홉'을 산에, 들에 두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 명령을 외면하는 것은 성도 본질의 사명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행3:6)'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예수밖에 없습니다(행4:12). 
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증거하는 주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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