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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생수 (요 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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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수 (요 4:5~19)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잘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입이 증가한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해질수록 오히려 영혼은 빈곤해지는 현상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였습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차를 몰고 다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 사람보다 더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고결하지도, 더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인생의 진실에 대하여 더 많이 알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의 부끄러운 죄를 숨기고 남 몰래 고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전형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 물 길으러 나온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며 대화를 엽니다. 

7절이지요.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처음엔 단순히 우물물을 놓고 이야기하다가 대화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본문은 ‘생수’라는 단어를 반복함으로 얘기의 초점을 모아갑니다. 

10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절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4절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자 이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주여! 이 생수를 내게도 주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 여인은 목마른 여인입니다. 
현대인도 풍요 속에 목마름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어에 기쁨을 나타내는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pleasure입니다. 
‘즐거움’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요? 
이 pleasure는 어떤 조건이 주어졌을 때 느끼는 행복감입니다. 
남편이 진급했을 때, 자식이 좋은 대학에 진학했을 때, 좋은 차를 샀을 때, 사업이 잘 됐을 때....... 
그러나 이런 행복감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joy입니다. 
‘기쁨’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요. 
이 joy는 어떤 조건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얻는 행복감입니다. 
이 기쁨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내게 샘솟는 기쁨, 내게 샘솟는 기쁨 넘치네.”라고 찬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환하고, 따듯하고, 부드럽고, 평화스럽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박함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의 이러한 요구에 주님께서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입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해할 수 없는 요구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당신 남편이 누구요?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한다면 정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무슨 연고인지는 모르지만 ‘남편’과 관련하여 기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날과 다르게 그 당시에는 여자가 결혼생활에 실패했다든지,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면  고약한 운명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우선 생계유지가 막연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자들이 가야할 길은 뻔합니다. 

돈이 있어 보이는 남자에게 의지하려다가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결국은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합니다. 

오늘 이 여인이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한낮에, 가장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그 시간에 물을 길러 온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 여인은 무거운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가끔 웃기도 했겠지만 그 웃음에는 슬픔이 있었고, 그 눈동자에는 우수가 서려 있었고,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어두움의 세계를 헤매는 불쌍한 여자입니다. 
주님은 이 여자를 보시고 바로 이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옥한흠 목사님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이전에 서울의 조그만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였답니다. 
아주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주일학교와 성가대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참한 아가씨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어느 날 한밤중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아주 어둡고 굳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했더니 
“꼭 전도사님에게 이야기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합니다. 

얘기인 즉, 그 아가씨가 며칠 후에 약혼을 하는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풀리지 않는답니다. 

“전도사님, 저는 몇 해 전, 집안 사정이 너무나 어려워서 저도 모르게 곁길로 빠져들고 말았어요. 그러다가 어떤 남자를 알게 되었고 동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예수님을 믿고 어두운 생활을 청산했지만 이제 막상 약혼을 하려니까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이 남자에게 고백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모른 체하고 약혼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좋죠? 정말 예수님이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해 주셨나요? 저는 아무리 기도해도 용서받은 것 같지 않아요. 너무 괴로워요. 결혼했다가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파경을 맞게 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쉬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존경하는 신학교 스승님이 계시는데 의논을 좀 해보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이나 신상은 밝히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길로 교수님께 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했더니, 그 교수님은 거꾸로 “옥 전도사는 어떻게 생각하나?”하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믿음이 좋은 아가씨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개의치 말고 약혼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교수님, 그렇게 대답해도 되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혼하기 3일 전인데 대답을 듣기까지 이 아가씨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성경을 읽어주면서 “교수님이나 제가 똑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이 이미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용서하신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매 얼굴에 생기가 돌아요. 
그래서 용서받는다는 것, 죄의 문제를 해결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17절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아마 대답이 얼른 안 나왔을 겁니다. 
‘어떻게 대답할까, 지금 살을 붙이고 사는 남자가 있으니까 남편이 있다고 해도 틀린 대답은 아닐 턴데........’라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예리한 눈길 앞에 여인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참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인 이유는, 그 고백은 자기 죄에 대한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떳떳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때 드린 말씀입니다. 
멕시코 지역에 ‘아나 브랩스’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눈이 네 개입니다. 
두 개는 물속에 있어 적의 공격을 감시하고, 두 개는 물 밖에 있어 곤충을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물 밖에 있는 눈은 눈물샘이 없어 오랜 시간 물 밖에 있으면 눈이 건조해져서 볼 수 없습니다. 
눈에 습기가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물고기는 규칙적으로 물속에 잠겨서 눈을 적셔줍니다. 
그래야 시력을 회복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도 때때로 회개의 눈물로 적셔져야 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살아야한다.’고 말들 하지만 그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충혈 되도록 아등바등 대지만 그게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에도 습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앞이 보입니다. 
그래야 갈 길이 보입니다. 
그래야 살 길이 보입니다. 
때때로 회개의 눈물로 눈을 적시십시오. 

혹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살길이 막막하다.’ 라는 생각으로 답답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로 눈을 적시십시오. 
그러면 살길이 보일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영적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원한 생수를 마시기 원한다면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시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핵심입니다. 
이 진리를 제하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진리를 제하면 성경은 윤리도덕 교과서에 불과합니다. 

교회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한번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십자가에는 죄의 값은 죽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롬6: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② 십자가에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히9:22절 “.......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③ 십자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생명을 버리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벧전 2: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 진리를 전파하라고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이 진리를 전파하라고 목사를 세운 것입니다. 
이 진리를 전파하라고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요4:28절에서 그 여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 
그 여인의 삶에 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 아무도 물 길으러 나오지 않는 낮 12시에 물을 길으러 나왔던 여자가 
이제는 사람들 사는 동네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뛰어 들어갑니다. 

어떻게 이런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죄의 짐이 벗겨졌습니다. 
마음에 놀라운 해방감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동네로 뛰어 들어가 모든 사람에게 가서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라고 외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이런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에덴동산에 생명의 강이 흘렀습니다. 

창2:10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에스겔은 환상 중에 척박한 땅을 소생케 하는 생명의 강을 보았습니다. 

겔47:9절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이런 생수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수입니다. 
인생살이 목마름을 느끼는 우리는 이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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