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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여운으로 남는 사람 (마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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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으로 남는 사람 (마 3:1~6)


I. 서론  

오늘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주일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2008년 교육주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491주년을 맞는 종교개혁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지금 높은뜻숭의교회는 중대하고도 긴급한 교회분립의 과제를 앞에 두고, 모든 교인들이 함께 고민하며 전심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모든 우리의 관심과 기도를 모아, 이 시대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관해서 그동안 정리하였던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성경말씀으로 청년들을 가르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삶에서 무엇보다 의미 깊은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시대를 준비하는 가장 긴급한 일은 청년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의 눈빛을 보면 늘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 눈빛에는 새로운 시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여명의 시대’가 동터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빛을 보는 것은 늘 감동과 설레임이 있습니다. 

신학자요 목사인 제게 그 ‘새로운 시대’란 다름 아닌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강한 교회, 바른교회가 이 땅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고, 그들의 삶을 인도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우뚝 서는 날, 그 날이 제게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이렇게 새 시대의 교회 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비단 저만의 소망이겠습니까?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그러한 아픔과 소망을 품고, 이곳 높은뜻숭의교회를 찾아온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희망을 품고 이 교회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고 결단하시고 계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높은뜻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아들딸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하고 반듯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면류관이요 영광이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바른 삶이 곧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희망은 지금 정말 긴급한 과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곳곳에서 교회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기 위한 산고(産苦)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높은뜻숭의교회도 지금 교회분립이라는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 이는 의미 있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대형교회로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가는 ‘의미 있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는 늘 이런 ‘의미 있는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II. 본론

1. 여운의 사람 요한

오늘의 본문말씀은 잘 아시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선포에 관한 것입니다. 세례요한 하면 벌써 “회개하라!” 생각이 딱 드니, 여러분은 벌써, “아~ 오늘 말씀 좀 까~칠 하겠구만~,” 하고 미리 준비하시겠습니다만^^, 오늘은 좀 다른 관점에서 이 말씀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여명의 시기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우선 ‘새로운 시대’는 진공에서 시작되지 않는 법입니다. 여명의 새 시대 앞에는 반드시 앞 시대의 남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여운’이 있는 법입니다. 여운이란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있는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뭔가 다한 것 같으면서도 다하지 않고, 사라진 것 같으면서도 다 사라지지 않는 그런 느낌,’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으나 실상은 새로운 메아리를 일으킬 수 있는 소리’ 말입니다. 

세례요한의 생애와 삶을 보면 꼭 ‘여운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광야의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소리란, 그것을 하늘에 대고 하던, 땅에 대고 하든 항상 여운이 남는 법입니다. 메아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메아리는 새로운 소리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진 법입니다. 그것이 ‘여운’의 위력일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이 ‘광야의 소리’는 온 유대지역을 흔들어놓고야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그 소리가 개혁의 소리가 아니라, 회개의 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의 여운은 회개운동을 일으켰지, 결코 개혁운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개혁이라면 자기개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옛 시대가 남긴 ‘여백의 공간’에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여운임을 자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 뒤에 오실 자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자신은 궁극적으로는 ‘사라질 소리’임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본론이 아니라 서론’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참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누가 본론이 되고 싶지, 서론으로 끝나고 싶겠습니까? 누가 끝까지 남고 싶지, 사라질 존재이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회개요, 자기개혁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세상의 것을 보십시오. 남을 개혁하려 합니다. 남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끝까지 변하려 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려 합니다. 끝까지 남으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과 인생이란 ‘남으려한들 남아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을 길게 살아도, 악착같이 살아도 사람들에게 머리털 하나 움직이지 못할 만큼 아무 영향을 주기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짧게 살고 순박하고 물 흐르듯 살아도 사람들과 역사 속에 진실의 여운으로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시렵니까?

저는 김동호 목사님이나, 여러분 모두 이런 여운으로 남는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김동호 목사님과 높은뜻숭의교회는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로서 어찌하든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건물을 갖지 않겠다는 결단에서 ‘보이지 않는 성전’이라는 메시지를 한국교회에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가 건물을 갖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사실, 한국의 교회에서 교회가 자신의 건물을 갖지 않겠다는 선언은 ‘주님의 교회’가 정신여고의 강당을 지어주고 그곳을 예배처로 사용한 것이나, ‘남서울 은혜교회’가 장애인 학교인 밀알학교의 강당을 지어 그곳에서 예배드리는 예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높은뜻숭의교회의 경우는 그들과 또 다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대형교회로서 존재하면서도 학교를 빌려 쓸지언정, 건물을 갖지 않겠다는 야심찬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한 가족이 마치 집을 갖지 않고 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광야의 ‘장막교회’로 머물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했던 선언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영적 유목민’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광야 길을 걷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달리 근본적으로 ‘보이는 성전’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성전보다 더 큰 자”(마 12:6)이시기 때문입니다. 초기기독교에서 성전은 히브리서에서 보듯이 세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세상을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성전을 갖는다면 그것은 오직 ‘보이지 않는 성전’일 뿐, ‘보이는 성전’을 갖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단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인 교회(에클레시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이미 일반 기독교인들이 성전과 교회를 혼동할 만큼 ‘성전건축의 신화’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모이고, 헌금하고, 건물 짓는 것을 교회의 최대의 현안과 실천적 과제로 삼았고, 이것을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일생의 과제로 부여했습니다. 그러므로 높은뜻숭의교회가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희년운동을 추진한 것은 한국교회가 ‘보이는 성전’의 신화에 탐닉함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의 ‘높은뜻’을 가장 상징적인 소리로 메아리를 일으키며, 결과적으로는 교회개혁의 뇌관에 손을 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 역시 당시 유대교의 시스템의 뇌관을 상징적으로 다루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성전’은 단지 헌금을 결단하여 희년운동을 동력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이 일은 역사상 언제나 있어왔던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는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시작할 한국교회 개혁의 파일럿 프로그램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개혁이란 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개혁이란 남을 개혁하라고 소리쳐서는 될 일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자신을 개혁함으로 이 세상에는 여운으로 남아, 주님이 새로운 교회를 이루어 주시기를 소망하는 방법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요한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광야의 요한의 세례운동을 배워야 합니다. 아니 요한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단지 ‘광야의 소리’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 땅에서 정녕 영원히 남을 자가 아니요, 사라질 것, 그래서 영원한 것을 세우는 사람으로, 영원한 것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이 땅에서는 단지 여운으로 남아 그렇게 큰 메아리를 일으켰고,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여명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높은뜻숭의교회로 하여금 자신을 개혁하는 자리, 회개하는 자리로 불러 주셨다면, 이 교회의 대변혁을 이제는 자신을 개혁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순종하여, 교회와 모든 교인들은 그렇게 묵묵히 여운으로 남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의 새 시대를 여는 남은 여백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교회의 여명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2. 개혁의 내용 : 공동체적 교회로!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어떻게 그렇게 여운으로 남는 사람이 되었고, ‘여운으로 여명을 여는 사역’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본질에 닿은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의 세례’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세례는 당시의 유대교의 세례의 관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우선 유대교에서 세례란 ‘자신이 자신을 씻는’ 종교적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세례는 타인에 의해 세례를 ‘받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요한이라는 원래의 이름 앞에 별명이 붙어서, ho baptistes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그는 오직 한가지 일, 곧 ‘회개의 세례’를 베풂으로써 여명의 시대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여러 복잡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일, 세례운동, 회개운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오직하면 별명이 ‘세례자’라고 붙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평생 살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두신 당신의 그 거룩한 이름을 존귀하게 하실, 이 여명의 시기에 어떤 한 가지 일에 평생을 걸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높은뜻숭의교회가 추구하는 비전과 핵심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를 세우겠다는 ‘높은뜻’입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 당연한 교회론 조차 흔들려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있어왔던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교회를 교회되게 하라!’-에 대한 응답이었고, 이 인식과 안타까움이 높은뜻숭의교회를 태동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높은뜻숭의교회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교회구조로서 인간이 아닌, 시스템에 의한 교회운영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의사결정의 민주화와 투명한 재정운영을 통하여 사회경제적 제자도를 교회로부터 실현하여, ‘바른교회’를 세워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내부의 현실은 인간의 주도권에 의해 하나님의 주되심이 제약을 받고 있는 구조로 와해되어 가고 있다고 진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 주도권이 담임목사이든, 장로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유기체적 존재방식을 잃었고, 그로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심하게 병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조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된 오르간(organ)이 아니라, 거대한 오르가니제이션(organization)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는 교회성장주의의 위협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대형교회를 지향하게 되고, 성장일변도의 교회구조로 본질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창기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이었던 “선교하는 교회”(한국일, 2006)의 형태로 놀라운 부흥을 구가해 온 한국교회에 이제 드리워지기 시작한 그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한국교회는 6·7십년대의 성령운동을 넘어 8·9십년대의 말씀운동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말씀중심의 교회’를 지향함으로써 ‘대형화’라는 의도하지 않았던 부산물의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충실한 교인이 많아지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일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운동을 통하여 교인은 단지 설교의 청중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믿지 않는 이웃의 전도를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의 현실에서 좀 더 ‘내향적 선교’로서 자신의 구조의 변형에 힘을 쏟지 않으면,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 받을 위기에 처하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지난 20여년을 풍미했던 말씀중심의 교회성장에서 공동체적 교회로 가는 새로운 교회의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것이 참으로 ‘높은뜻’이 아닌가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은 대형교회 구조를 탈피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성을 통하여 교회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교회는 진정으로 민주적 조직을 이루어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성령의 소통과 친교를 통한 공동체적 교회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 개인주의화되고 탐욕스런 “세상 속에 교회의 존재자체가 복음의 한 부분”일 수 있는 공동체적 구조와 내용을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김동춘, 2005)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루어야 할 새로운 예수 공동체의 형태인 것입니다. 
  

3. 개혁의 산고  

이 ‘공동체적 교회’를 실현할 높은뜻을 현실적으로 이루는데 치명적인 약점은 대형교회적 형태입니다. 교회를 사람의 몸집에 비교한다면, 대형교회는 적어도 150Kg이상의 몸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평균키의 성인 남자의 몸무게가 “60kg가 건강하냐? 120kg가 건강하냐?” “60kg이든 120kg이든 건강한 사람이 건강한 거다!” 이렇게 몸이 크신 분에게는 죄송합니다만, 120kg는 건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설사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죄송합니다만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참다운 교회 공동체가 300가정을 넘을 수 있을까? 그 교회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시대 우리가 꿈꾸어야 할 교회는 더도 덜도 아닌, 우리의 딸, 아들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교회란, 내가 결혼을 할 때 사랑하는 나의 목사님께서 주례를 해 주고 성도들이 함께 축가를 불러줄 수 있는 교회, 첫 아이를 낳은 그 아침 목사님의 축복과 함께 새로운 삶의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교회, 그리고 내가 잠시 눈을 감고 천국이 임하는 것을 보는 순간, 평생을 같이 해왔던 목사님이 모든 성도들의 찬양과 함께 내 눈을 감겨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높은뜻숭의교회는 지금 대형교회로의 길을 포기하고 분립을 결정하였습니다. 비록 오늘 말씀드린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고민과 합의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가는 높은뜻을 선택할 것으로 믿고, 이 일을 결정한 김동호 목사님과 교회에 진심어린 존경을 보냅니다. 이 일은 어느 대형교회도 하기 어려운 결정을 또한번 한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인 여건이 미흡하고, 아직 준비가 철저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의 앞날이 불투명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교회다운 교회라는 교회개혁의 부르심을 듣고 오셨다면, 각오해야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제가 볼 때, 김동호 목사님은 스타일이 메시지로 승부하는 세례요한 스타일이지, 목회로 승부하는 바울 스타일은 아닌 듯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분명히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 땅에 이루어 가는 것임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기회를 선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생각에는 이제 교회는 우리가 꿈꾸던 참다운 교회, 대형교회가 아닌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루어 갈 여건을 마련해야 하리고 생각합니다. ‘크지 않은 교회’로서 말입니다. 그런 교회의 꿈을 꾸시고 이 일에 함께 참여하시면 됩니다. 4개의 공동체에서 여러분은 더 이상 말씀의 청중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모든 성도들과 성령 안에서 소통하는 교회, 성도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또 성장해서 도저히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기가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 생각하시면 다시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 때는 충분한 공동체적인 의사결정을 통해서 분별하고 순종하여 기쁨으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떡 5개를 산더미처럼 한꺼번에 크게 해 놓으시고 군중들보고 와서 뜯어먹어라 그러지 않으셨어요. 축사하시고 제자들과 나누시고, 가서 떼어 나누라. 그러셨거든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들고 나누니 기적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서 나누신 성만찬을 통해서 이 신비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좀 부득이하게 나누셨다면, 그래도 하나님이 기적을 주실 줄 믿고 나누시고, 가서 참된 공동체를 이루어 다시 나누세요. 그것이 교회의 본질을 실현하는 이 시대의 교인들의 사명이고,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존재할 주님의 교회를 향한 영원한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의 구원받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분명 우리의 인생의 본질에 닿아있는 문제가 틀림없습니다.
 

III. 맺는 말  

이제 말씀을 마치며, 저는 이 시대의 여운으로 남은 위대한 음악가 로스트로포비치를 떠올리고자 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구소련의 아제르바이젠 출신의 첼리스트였습니다. 자유의 혼을 가진 이 그는 1970년 그는 솔제니친을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전 세계 언론에 내보냅니다. 결국 그는 지녔던 거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소련에서 공공연주가 금지되었으며, 한때 러시아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부인 갈리나는 저 시베리아 허허벌판의 작은 마을들로 강제 순회공연을 떠나는 수모를 겪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급기야 가족들과 함께 1974년 미국에 망명하고, 1978년 소련의 시민권까지 박탈됩니다. 하지만 그는 어렵게 얻은 자유로 맘껏 음악활동 하게 된다. 전 세계에서 그의 첼로를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명화, 장한나가 그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1989년, 로스트로포비치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첫 번째 사건을 일으킵니다. 1989년 ... 베를린 장벽 앞에 홀연히 나타나 의자하나를 놓고는 독일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첼로연주를 시작합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이었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경계, 베를린 장벽 한복판에서 바흐를 연주한다. 그의 묵묵한 연주는 그의 자신의 음악을 향한 열정과, 인류에게 들려주는 자유를 향한 외침이 되어 흘렀고 그 모습은 전 세계로 뉴스를 타고 흘러나갔습니다. 음악으로 인류화합과 세계평화를 리드하고자 하는 영혼의 전율을 담은 그의 연주를 들었던 독일 사람들은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연일까요? 그 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독일은 통일되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구 소련의 공산체제를 신봉하는 강경파인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였습니다. 1987년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일으킨 페레스트로이카의 열매로 러시아 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는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시 탱크위에서 군중을 지도하던 옐친을 생생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옐친의 절친한 친구였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쿠데타에 반대하며 러시아 의회 의사당 건물에서 군인들과 전 세계를 향하여 다시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세계의 언론이 주목했고 흩어졌던 군중들은 감동하며, 캄캄한 의사당으로 돌아와 스크럼을 짜고 그를 보호했고, 군인들도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결국 쿠데타는 종료되었고 군인들은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는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 그는 작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우리시대에 위대한 자유의 혼을 가진 예술가로, 바흐의 ‘첼로 무반주 모음곡’과 함께 영원한 여운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복음은 진공 속에 선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여운이 울려졌기에 예수님의 사역이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한국교회의 새로운 여명의 시대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을 우리의 삶의 여운으로 채워나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는 이 빈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선한 뜻을 가진 자들이 이 빈 공간을 ‘여백’의 소리, 여운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파국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야 새로운 여명이 밝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주님의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이름을 존귀하게 하실 하나님의 뜻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이 여명의 시기에 어떤 한 가지 일에 평생을 걸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한평생 자신이 귀하게 여겨, 그가 믿고 헌신하는 대로 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믿느냐,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사느냐,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한가지 일, 본질에 닿는 한 가지 일을 함으로 여운으로 남으면 족할 것입니다. 

진정 높은뜻숭의교회가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영적 유목민’이요, 복음의 빛이 가리어지고 있는 어두운 교회의 현실에서 새벽을 깨울 ‘선두주자’임을 자임한다면, 공동체적 교회라는 이 새로운 ‘높은뜻’을 위해, 높은뜻숭의교회와 교인들은 한국교회 전체로 자신의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민들레 홀씨’와 같이 자신의 생명력을 발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박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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