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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동행 (창 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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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창 6:5~12)
 

가을을 맞아서 많은 사람들이 단풍 여행을 떠납니다. 우리 교회 여전도회 회원들도 이곳 저곳으로 단풍 구경을 다녀오는 것 같습니다. 올해 단풍은 심한 가뭄으로 인해 잎이 빨리 마르고 떨어져서 예쁘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도 가을 산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여행을 많이 하는 분들은 여행이 즐거우려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볼거리 입니다. 여행을 가면 그곳에 볼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행을 가서 볼거리가 없으면 여행의 의미가 없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애써서 찾아 갔는데 볼 것이 하나도 없으면 ‘여기에 왜 왔나’ 하는 허탈한 마음이듭니다.

여행의 즐거움을 위한 또 한가지 조건은 먹거리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그 지역의 토속 음식이나 지역의 유명한 먹거리를 찾아서 맛보는 재미는 여행을 더욱 즐겁게 만듭니다. 제가 지난 여름에 거제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 처음 먹어 본 멍게 비빔밥의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격도 저렴했지만 아주 독특한 맛이었습니다. 멍게 비빔밥은 거제도 여행을 아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지역마다 특성이 있는 별미의 음식은 여행을 즐겁게 만듭니다. 

즐거운 여행을 위한 마지막 조건은 좋은 사람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여행하느냐는 즐거운 여행을 위한 그 어떤 조건보다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볼거리가 많고, 먹거리가 훌륭해도 동행하는 사람이 싫으면 모든 것이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과 동행하는 여행은 볼거리가 별 볼일 없고, 먹거리가 부실해도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즐거운 여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행사에서 여행지를 소개할 때 볼거리와 먹거리를 잘 추천하고 안내합니다. 안내지를 만들어 약도와 식당의 전화번호까지 상세히 소개합니다. 그러나 누구와 동행할지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행하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여행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동행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누구와 동행하느냐는 인생의 여행을 새롭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로 용혜원 시인의 ‘동행’이라는 시를 여러분께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동 행>

인생 길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힘들 때 서로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곁에 있어 줄 수 있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줄 수 있으니 
서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도 
홀로면 고독할 터인데 
서로의 눈 맞추어 웃으며 
동행하는 이 있으니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사랑은 홀로는 할 수가 없고 
맛있는 음식도 홀로는 맛없고
멋진 영화도 홀로는 재미없고
아름다운 옷도 보아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독백이 되고 맙니다   

인생 길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오늘도 내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주일 아침에 천국을 향해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동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눕시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 겪은 따뜻한 이야기를 모아 화제작이 되었던 이철환씨의 연탄길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목이 ‘아름다운 동반자’입니다. 교회에서 있었던 결혼식에 신부 입장을 알리자 술렁이던 식장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절룩거리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신랑 앞에 거의 당도할 무렵 신부는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축하객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버지 대신 신부를 일으킨 신랑은 늠름하게 신부의 팔짱을 끼고 주례자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어 신랑은 자신의 한쪽 발을 신부의 웨딩드레스 밑으로 살며시 넣고는 신부의 짧은 왼쪽 발을 자신의 발등으로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신랑은 중심을 잡으려고 신부보다 더 많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간힘을 다하면서도 만면에 건강한 미소를 머금고 신부의 팔을 잡아주고 있는 신랑의 모습에서 하객들은 진정한 동행의 그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혼식에서 감동받은 신랑의 친구 태환이라는 분은 이들의 신혼 가정을 방문하여 결혼식 앨범을 펼쳐 보다가 신랑이 신부에게 보낸 쪽지 편지를 읽고는 결혼식장에서 보다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앨범 속에 끼어 있는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늘 기쁨으로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차라리 내 다리를 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물려 받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을 우리들은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본다면 자수성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성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창조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서로 돕고 보완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공한 삶은 자기 개인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그를 돕고 협력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나는 하루에도 여러번씩 내 인생이 얼마나 많은 동료들과 이웃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어떤 사람과 동행하는냐는 인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좋은 동행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상대방에게 좋은 동행자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힘들고 지친 가족들이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고, 의지하며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동행자가 되는 가족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동행자가 되어 내 주변에 좋은 동행자가 많이 세워짐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서로 힘을 모아 승리하는 지혜로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삶도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소개할 때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동행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이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진정한 동행자가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우리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축하시고 우리의 짧은 다리를 세우시기 위해 당신의 온 몸으로 우리를 지탱시켜 주시는 사랑의 동행자이십니다.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무서워요.’ ‘애야, 밖에는 예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섭니? 그분이 널 지켜주실거야.’ ‘정말 밖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 그분은 어디든 계신단다. 네가 힘들 때 널 도와주신단다.’ 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뒷문을 살짝 열고 틈새로 말했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실래요?’ 우리의 신앙이 이기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곁에서 동행자가 되시는 예수님이계십니다. 내 우편에서 그늘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동행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노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그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노아 시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실 만큼 타락해 있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결혼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악한 사람들의 딸들과 결혼한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세상의 것에 휩쓸려 하나님 백성의 자리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5,6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을 만큼 사람들이 악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악하게 사는 것은 어쩔 수 없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 조차도 악한 세상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악하게 사는 모습은 하나님의 탄식 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을 보시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악이 판을 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는 세상적인 쾌락의 유혹과 세상의 가치에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가치를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노아를 주목해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아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의 모든 것을 홍수로 심판하시면서 당신과 동행한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리셨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도리어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위로를 받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사람들 조차도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쫓았을 때 오직 한 사람, 노아만은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런 노아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로가 되셨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하나님께 위로가 되는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축복하셔서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고 노아를 인류의 제 2시조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들이 여러 사람들과 만나 함께 생활하다 보면 참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자기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고 싫으면 만사가 싫은 겁니다. 사랑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르고 항상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항상 사랑을 받기만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동행하면 힘이 들고 피곤합니다. 

하나님도 동행하는데 힘이 들고 지치게게 하는 동행자가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도 은혜인지 모르고 전혀 감사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주어도 항상 징징 거리며 불만과 불평이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실함은 전혀 없고 이기적으로 바라는 것만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기에 함께 하시지만 하나님을 피곤하고 지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너무 사랑스런 믿음의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 안에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자로 기뻐하셨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녹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라고 말씀하신 다윗입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번 불평하지 않고 인내하며 믿음 안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던 요셉입니다.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고 하나님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을 어김없이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노아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 위로를 드릴 수 있는 동행자를 찾고 계십니다. 

1919년 평안남도 어느 지방의 일본 헌병대 4월자 일지 문서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3.1 운동이 일어난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무라까미 헌병 소장은 다나까라는 부하에게 나가서 3.1운동 만세를 부른 사람들을 체포해 오라고 했습니다. 다나까가 나가서 한바퀴 돌고 오더니, 누가 만세를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지금은 안부르니 알 수가 없다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소장이 ‘그럼 가서 기독교인을 잡아와라.’ 다나까는 ‘아니 기독교인이 누군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때 헌병대 소장은 ‘이런 답답한 사람 있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네가 기독교인이냐고 물어보면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만세를 불렀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분명하게 자신이 만세를 불렀는지 부르지 않았는지를 정확하게 말을 할거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에 생명을 건 사람들이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일제 시대에 헌병대 문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헌병대 소장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데 생명을 걸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동행자가 되었습니다. 

그 힘이 오늘의 한국 기독교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 믿음의 열매를 우리들이 오늘 누리고 있다면 우리들의 하나님과의 믿음의 동행은 우리들의 자녀들과 후대들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동행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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