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개혁] 자신의 종교적인 의를 내려놓자 (롬 3:9~18)

  • 잡초 잡초
  • 278
  • 0

첨부 1


자신의 종교적인 의를 내려놓자 (롬 3:9~18)

[종교개혁491주년 기념주일]

오늘은, 종교개혁491주년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에 M. Luther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M. Luther는 당시 독일의 사제였습니다(로마천주교회 신부). 당시 루터는 독일의 자그마한 Wittenberg라는 도시에 설립된 신생대학, Wittenberg대학의 성서신학교수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 그때 당시, 로마천주교회는 도미니칸 수도회 수도원장이었던 Johann Tetzel을 중심으로 면죄부를 파는 일을 하자, 비텐베르크 슐로스 교회(Schlobkirche zu Wittenberg) 門(論題의 門)에 로마천주교회에 항의하는 루터의 95개조항의 논제가 걸리면서 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개신교회(Reformed Church)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항의하다’, ‘증언하다’, ‘고백하다’는 말인 Prostest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개신교, 개혁교회, 프로테스탄트는 항의하는 신앙, 신학, 정신으로부터 유례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는, 요즘의 운동권과 같은 성향의 저항이 아니라, 根源을 찾아가는 운동과 저항을 말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세 가지 근원을 찾아가는 저항을 했습니다. (1) 오직 신앙 sola fide. (2)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3) 오직 은총 sola Gratia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찾으려고 했던 이 세 가지 근원은, 16세기 당시의 로마천주교회라는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용어들입니다. 


[면죄부보다 더 중요한 종교개혁의 뿌리가 된 중요한 사건···]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면죄부사건보다 더 중요하게 종교개혁의 뿌리가 된 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M. Luther에게 있었던 대단히 중요한 개인적인의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루터에게 그렇게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이 없었다면, 16세기의 역사적인 종교개혁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루터에게 있었던 그렇게도 중요한 사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 중대한 사건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2년 전, 1505년 7월 2일에(성모 마리아 강림을 기념하는 날)에 일어났던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루터가 Erfurt 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다녀오는 길에, Erfurt에서 그리 멀지 않은 Stotternheim 가까운 빈들을 걷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체구는 작았지만 야무진 체력을 가진 대학생이었습니다. 마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온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로 돌변했습니다. 시커먼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루터 바로 앞에 떨어지면서, 그는 그만 들판에서 나뒹굴고 말았습니다. 자기존재의 무력함을 깨달았습니다. 납작 엎드린 자세로, 간신히 입을 열어, 당시 로마천주교회에서 광부들의 守護聖人으로 불리던 『聖 안나(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모친)』에게 기도합니다. 『성 안나여, 살려주시기만 한다면 제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서원이지요. 그것까지는 평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작 루터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다른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터져 나온,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백에서였습니다. 그때, 루터는 처음으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 루터가 발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 바로, 16세기 종교개혁의 근원적인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직 구원받을 준비가 안됐구나. 내가 罪人이구나.” 하나님 앞에 직면한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면서, 로마천주교회에 몸담고 있던, 그의 모든 삶의 기준,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당시 로마천주교회가 가르치던 신앙과 전통, 교리, 의식이 하나님 앞에 직면한 루터에게 죄에서 자유케 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폭우와 번개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은 구원받을 준비가 되지 못한 죄인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한 것입니다. 그 절망이 종교개혁의 뿌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 주었던 로마천주교회가 말하는 신앙과 전통, 교리, 의식에 대한 확신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폭우와 번개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라고 해서 例外이겠습니까?

감리교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꿈에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천사에게 물었습니다(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천국에는 카톨릭 교인이 많습니까?」 『한 사람도 없다(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는).』 『그러면 장로교인은 많습니까?』『한 사람도 없다(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이제 본론으로, 그러면 『천국에는 감리교인은 많습니까?』 역시 『한 사람도 없다』 웨슬레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있습니까?』『그리스도인이 있다.』 

이번에는 웨슬레가 지옥 문 앞에 갔습니다. 지옥사자에게 물었습니다. 『지옥엔, 카톨릭 교인이 있습니까?』『많지』『장로교인은?』『많지』 하더랍니다. 

[우리 시대에 개혁되어야 할 그릇된 신앙의 뿌리, 근본이 무엇?]
그것은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 안에 잠재되어 있는, 자기 나름의 義의식입니다. 내가 義人이라는 자부심 말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어디서 문제가 되고, 잘못된 것입니까?

21세기 교회의 문제의 본질도, 가만 보면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의인이라’는 자긍심에 있습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영적인 교만에 있습니다. 대게 그런 사람들이 목소리가 큽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절대로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의인이라는 영적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이 시대의 병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루터의 자기발견에서부터, 역사적인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역설을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부터, 자기존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복음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운동의 힘이 되었고, 역사변혁의 힘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 바울의 선언을 다시 들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9절 말씀 보십시오. 이 선언 앞에서 우리 중 그 누구가 예외인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여기 우리는, 異邦人이 아닌 하나님의 選民이요, 하나님 百姓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 결코 아니라(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방인보다 조금이라도 더 의로우냐?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나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 믿는다는 저 누구, 아무개 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내가 더 낫지, 내가 못한 게 뭐 있어?—할 수 있느뇨? 결코 아니라,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음 말씀 보십시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 9).

우리는 다 죄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에만, 우리 안에 진정한 부흥과 치유와 섬김이 일어납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사도 바울의 증언을 보십시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죄인입니까? 

“기록된 바, 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無益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0-18). 

그렇습니다. 역사적인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나는 아직 구원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는 한 젊은 대학생 M. Luther의 깨달음과 고백에서부터 싹이 텄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장하는 개혁의 내용을 보면, 그 대상에서 언제나 나는 빠집니다—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이 없습니다. 내가 무슨 죄인인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그래도 나는 義人이지 하는 자기중심적인 영적교만이 가득할 뿐입니다—그러기 때문에 개혁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혁의 대상이 나이어야 하는 데, 다른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개신교회가 가지고 있는 개혁되어야 할 그릇됨의 뿌리입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의, 의인 됨은 무엇?]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인간중심적인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dikaiosynē theou)』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 주어진 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義라는 것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 앞에서 義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라곤 조금도 없다 겁니다. 사도 바울은 증언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거지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예수님의 복음말씀에 응답하며 사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입니다.

루터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義認)!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조금 어렵습니다). 『우리는, 義人인 동시에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 이 말은, 우리가 義人(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죄인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무엇입니까? 우리가 義人(의로운 사람)인 동시에 罪人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논리적인 모순이 아닙니까?

루터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던 한 환자가 의사에게 찾아왔습니다. 진료를 받습니다. 의사가 그 사람의 병이 무엇인지 진단을 했습니다. 드디어 의사는 그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그 환자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 환자에게는, 의사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서 치료를 받게 되면 곧 건강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그 환자에게 일어난 변화를 두고 루터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환자는 건강한 자입니까? 아니면 아픈 사람입니까?” 루터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이 환자는 건강한 동시에 아프다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환자는 건강을 약속한 의사를 처방과 치료를 믿을 때, 그는 이미 건강하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그 환자는 의사가 반드시 자기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환자의 지금 형편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아픕니다. 마찬가지로, 루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義人인 동시에 罪人이라는 관계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희망 가운데서 의인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구원의 확신을 순간적으로 느끼고, 확신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한 평생 살아가면서 이 구원의 확신을 계속해서 느껴야만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내 義와 내 功勞, 나의 行爲를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역사적인 신앙의 위인들은 다 죄인 됨의 고백···]

우리는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절규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클라이막스와도 같은 그 순간에 (죄를 모르시는 주님께서) 아사셀 염소처럼, 속죄제물처럼, 온 세상의 죄를 다 걸머지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셨습니다.

그 아픔은, 우리 주님께서도 감당하시기 어려운 아픔이셨습니다. 그래서 절규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버림당하심 때문에, 온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닙니까? 새롭고 산길이 열린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사람일수록, 역사를 순화하고, 빛을 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밝히 드러내는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이렇게 말하는 사도 바울, 역시 그는 유대교에서 교만했던 사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던 사람, 자랑할 것 많다던 사람 아닙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절규가 떠나지 않던 인물이, 바울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고백이요, 자기 정체성입니다.

자기 자랑 없습니다. 내 의, 자랑치 않습니다. 도리어 탄식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입니다. 이런 고백을 가진 자가 가지고 있는 역설적인 확신, 자랑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이것이 교회와 역사를 바꾼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베드로의 부르심도, 죄인 됨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서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을 첨 만났을 때의 고백입니다. 죄인 됨의 고백, 깨달음에서부터, 사람 낚는 어부로의 변화가 시작된 겁니다. 그런 그의 믿음과 고백 위에, 주님은 주님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이들이 누굽니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자부심, 자기 의를 자랑하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뭐라십니까?) 더 낫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하신 말씀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義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義를 붙잡읍시다. 이것이 자신과 가정과 교회, 이 시대를 살리고 축복하는 개혁적인 신앙의 첫 출발입니다.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 종교개혁 491년주년 기념주일에, 루터처럼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가진 모든 종교적인 의를 다 내려놓습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덧입혀 주옵소서. 나의 변화로 가정과 교회와 이 시대와 역사가 새로워지는 전환점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