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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날마다 죽는 삶 (고전 15: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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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죽는 삶 (고전 15:29~34)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우리에게 개인의 믿음이나 또는 교회가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제가 대했던 많은 글들 중에 제게 충격이었던 두 토막의 글과 한 가지의 일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먼저는 종교개혁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본 문장입니다.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만일 마틴 루터와 쯔빙글리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들은 우리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전혀 개신교인이 아니다 너희는 단지 우리가 일으켰던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에 부패했던 교회에 대해 우리가 외쳤던 것을 오늘날에도 외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너희는 모르느냐. 탐욕과 욕정으로 깊이 병들어 있는 이 사회를 향하여 그 옛날 우리가 외쳤던 것을 그대로 외쳐야 한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너희의 냉담한 마음을 버리고 다시금 대항하여 싸워라. 옛날에 악령들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적들을 향하여.’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글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으며 망치로 한 대 얻어맞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글은 지난 주간 익명의 우리교인으로부터 받은 편지 중에 한 문장이었습니다. 우리교회의 여러 분야에 대한 문제점과 소상한 의견이 들어있는 편지였습니다. 익명이라 답장을 드릴 수는 없고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내용 모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참고 하겠습니다. 이 편지 중 한 문장입니다. ‘교회 지도자와 교인이 타락해서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다고 설교때만 말씀하실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부터 지금부터 하나하나 변화되는 것이 먼저이지 않겠습니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일은 지난 금요일 오후에 90세가 넘은 이영수 안수집사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1983년 12월 21일자 발행한 세례증서를 들고 오셨습니다. 25년전 제가 미국 애틀란타에서 목회할 때에 저에게 세례를 받으신 분이시고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되셨고, 지금은 물론 은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제게 충격이었던 것은 제가 너무 몸이 비대해져서 길거리에서 보면 몰라보겠습니다. 목사님 몸을 빼셔야겠습니다. 는 말씀이셨습니다. 

제가 그 때 마침 종교개혁주일 설교에 대하여 준비하고 있을 때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말씀이 자꾸 제게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들려왔습니다. 그 때보다 뭔가 비대해져 있는 나의 모습, 뭔가 나태하고 영적으로 예민하지 못한 나의 모습, 목사님 몸을 좀 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르신은 나의 몸과는 대조적인 날렵한 몸매로 훌쩍 떠나셨습니다. 그동안 서로 연락도 한번 없던 그 어르신이 왜 굳이 찾아오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남기고 가신 그 한 마디가 내 귓전에 계속 들려오며 마치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천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개혁이라하면 우리는 종종 사회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하여 외형의 변화나 구조조정 등을 먼저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그런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개혁은 오직 하나 그의 신앙이 개혁된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선행에 기초했던 신앙을 십자가 중심의 신앙으로 개혁한 것입니다. 나 자신의 신앙이 개혁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 때에 구교 가톨릭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생긴것이지, 처음부터 개신교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신앙개혁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요구되는 것은 어떤 조직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개인의 신앙의 변화신앙의 개혁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491주년을 맞아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이 우리 개인의 신앙에 큰 깨달음과 변화를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도 합니다. 루터는 이것을 ‘Daily Baptism’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매일세례, 우리는 매일같이 십자가 앞에 죽고 또 그 십자가 앞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것이 바로 매일세례입니다. ‘Daily Baptism’ 이것이 바로 바른 신앙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루터의 신앙은 바울의 신앙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곧 십자가 중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는 십자가의 신비한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함으로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아는 것이 많습니다마는 사도바울은 그렇지 못합니다. 바울은 예수님 생애에 대하여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고 재림을 알 뿐입니다. 오직 십자가 중심적 신학으로 그가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로써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지사가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이면서 우주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그래서 그의 기독론에 보면, 계속해서 그는 말하기를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 가야바 때문에, 심지어는 빌라도 때문에 가룟유다 때문도 아닙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아랑곳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의 애정과 경륜과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만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십자가 사건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계시적 사건으로 풀이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십자가 이해입니다. 특별히 그는 모든 것의 성취와 만족한 대답이 이 십자가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헬라사람들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사람들은 표적을 구하나 나는 십자가를 전하노라 합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속에 지혜가 충족하고 능력을 구하는 마음 표적을 구하는 마음도 다 충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적 만족도 종교적 만족도 거기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능력이라고 생각해보신 일이 있습니까. 

객관적으로 십자가는 무능함과 어리석음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왜 초라하게 말씀한마디 없이 죽어가시는 것입니까.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뛰어 내리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소리치는데, 그 때 짠하고 뛰어 내렸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아무 능력도 없는 것처럼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하시며 죽어가신 것입니까. 무능함과 어리석음의 극치가 십자가입니다. 그처럼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일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믿는 사람으로서 볼 때는 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그 속에 엄청난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요. 그렇지요.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이 어째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말리지 못하셨습니까. 그건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능력이라고 하면, 물리적인 능력이 있고 정치적인 능력이 있는가하면, 또 인격적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격적 능력이 진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사랑이 지혜로운 것입니까. 어리석은 것입니까. 불신앙적인 차원에서 보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새같이 악한세상에 뭐 베푼다, 준다, 봉사한다, 희생한다 하는 것 다 미련한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지금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빼앗아도 현찮은 이 세상에서 내것을 왜 준다는 것입니까.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러나 사랑하면 그렇게 됩니다. 사랑하면 주게됩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어리석어 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누가 더 지혜로운 어머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주에도 말했습니다. 자식이 열 번 실수 하고도 어머니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요. 라고 하면 어머니는 그저 아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것입니까. 똑똑한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어지는 것이 어머니의 매력입니다. 그런데 똑똑한 체하는 어머니는 어떠냐. 내가 속을 줄 아냐, 어림도 없다. 그리고 대듭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지요. 사랑은 참고, 인내하고, 베풀고, 용서하고, 포용하는데 있는 것인데, 그것이 어리석어 보여도 그것이 없이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랑은 약한 것입니까? 아이를 보고 아버지가 근엄하게 ‘앉아! 서라! 가라!’ 하고 군대식으로 말하면 순종하겠지요. 그러나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를 붙들고 ‘애야 네가 그래서 되겠느냐’ 하고 눈물을 흘리면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께요.’ 합니다. 어느 쪽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인격적 능력이란 그의 자유의지의 손상이 없이 그로 하여금 자원해서 내게 따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능력입니다. 십자가 그것은 사랑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계시입니다. 자기희생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오늘도 계속해서 자기 사랑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자원하여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이렇게 바울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바울에게 특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실존적 이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것이 나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대단히 신비로운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내 대신 제물이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하여 죄송합니다만, ‘I have been crucified’ ‘I have been crucified’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 ‘with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엄청난 의미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다. 혹은 그가 죽으실 때 내가 이미 죽었다. 그와의 동체성, 동시성 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십자가를 쳐다보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 내게 지금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진리가 사도바울의 유명한 십자가 이해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구체적인 표현을 그는 다시 이렇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당신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기에서 정과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이 많습니다. 정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 끈끈한 정 때문에 냉정하지를 못합니다. 이래서 의고 진리고 정의고 다 무너지고 마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정 때문에, 이게 문제입니다마는 이 정을 십자가에 이미 못 박아 버렸습니다. 또 더러운 욕심, 끝없는 욕심. 가만히 보십시오. 누가 망했다고 하면, 그 속에 욕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 잘못된 욕심 탓입니다.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하는데, 이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쳐다볼 때 마다 정도 욕심도 혈육도 다 십자가에 주님이 죽으실 때 다 죽고 없어졌다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십자가의 신앙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중국 고전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자경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손재주가 좋아서 나무를 깎아 좋은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노나라 황제가 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악기를 연주시켜 보니,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소리가 그 나무통에서 나는 것입니다. 자네는 어떻게 이렇게 좋은 악기를 만들 수 있었나? 황제가 물었습니다. 자경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목욕재개하고 사흘 동안을 명상합니다. 그러고 나면 벼슬의 욕망이나 상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다 없어집니다. 이어서 또 다시 닷새동안 명상을 합니다. 그러면 칭찬받겠다고 하는 마음이나 비난받는 데 대한 두려움까지도 다 사라집니다. 또 다시 이레 동안 명상을 하면, 그 때는 손과 발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아주 완전히 초월한 그런 무아지경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오직 음악소리만 들려옵니다. 그 음악소리를 들으며 악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내게 더러운 욕심, 정욕, 칭찬 받겠다고 하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이런대로 마음이 쓰이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걸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위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쳐다볼 때 그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내가 예수를 위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쳐다볼 때 마다 그가 나의 욕심을 나의 욕망을 나의 잘못된 나의 모습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말씀에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아덴에서의 복잡한 어떤 경험, 배경이 있습니다. 그는 앞서 아덴에 갔을 때, 헬라 철학의 본 고장인 그곳에 들어가서 자기가 옛날에 몰두했던 철학이 생각나고 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철학으로 유명해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철학자들을 철학으로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에 내려가서 깊이 실망과 좌절을 맛봅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그 때 나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비겁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중생을 합니다. 거기서 비상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때 말합니다. 나는 이제부터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이제는 인간적인 지혜나 철학적 방법 다 버리고 오직 십자가, 오로지 십자가만 생각하고, 오로지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거기에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의 힘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때 여기에 엄청난 능력이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쳐다볼 때 내 죄 짐이 다 사라져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집중적으로 생각할 때 그 속에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거룩한 은혜를 온전히 믿을 때 그 십자가가 나를 지배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이룬 루터와 많은 개혁자들이 내가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믿음의 태도로 현실을 대하였기에 그들은 개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순교적 믿음으로 현실을 대하고 순교적 생명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순교적 능력으로 사탄과 맞서게 될 때, 오늘의 어려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놀랍고 신비한 능력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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