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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사람*새교회*새역사를 이루기 위해 (마 9:36~ 마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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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람*새교회*새역사를 이루기 위해 (마 9:36~ 마 10:1~4)


지금 장로님으로부터 내년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새 사람· 새 교회·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공천 후보를 발표를 들었습니다. 뭐, 여기에 뽑혔다고 해서 여느 사람보다 저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여기에 자신의 이름이 들지 않았다고 해서 조금도 서운해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내년이면 40주년입니다. 성경에서 40은 참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무엇보다 출애굽한 성도들이 광야 40년의 연단을 끝내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새일을 감당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람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나아가게 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일꾼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언젠가 이야기를 드렸지만, 정광호 씨는 「우화경영」에서 솔개의 장수비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솔개의 수명은 70년입니다. 솔개가 40년쯤 살면, 입과 발톱이 날카로움을 잃고 무뎌지고, 털은 점점 불필요하게 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솔개 특유의 날카로움과 날쌤이 없어집니다. 이 때 솔개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살 것이라고 결심한 솔개는 높은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서 둥지를 틀고 바위에 자신의 부리를 사정없이 박기 시작합니다. 그것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도 부리가 완전히 깨질 때까지 계속해서 박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리가 새로이 자라는데 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때까지 솔개는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고통과 아픔 가운데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리가 다 자라고 나면, 날카로워진 부리를 가지고 자신의 무뎌진 발톱을 모두 뽑습니다. 발톱이 새로이 나는데 또다시 2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발톱이 다 나고 나면, 발톱과 부리를 가지고 털을 다 뽑기 시작합니다. 깃털이 다 뽑힌 솔개는 볼품 없고 나약하고 초라해져 보입니다. 2개월쯤 지나면 솔개에게 새로운 깃털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 고난의 과정이 5~6개월쯤 지나면, 솔개는 새로이 태어나, 남은 30년을 옛날처럼 찬란하고 의미 있게 살아간다고 조류학자들은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개에게 자신을 갱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주셨다고 해서 모든 솔개가 그 지혜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솔개는 4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지혜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리가 깨어지고, 발톱과 깃털이 뽑히는 아픔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일평생 살아온 것을 깨는 것은 아픈 일입니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지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뜨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좋고 귀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이 아무리 귀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보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실 때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본문에만 표현되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구름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마4:24절에 보면 이들 대부분은 병든 자들이요, 귀신들린 사람들이요, 어떤 면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외로운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들이며 죄인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실패자들입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였습니다. 이들을 보는 주님의 마음은 편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무리들을 보실 때 그들을 늘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36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은,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깊은 통증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20,000여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관원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6,000여명이나 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자타가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牧者)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눅 6,39절에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무리들을 고생시키고 기진 하게 만드는 그들을 '소경'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이 왜 소경입니까? 육신의 눈이 보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소경 됨은, '잘못된 눈' 곧 '잘못된 시각'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고, 기진 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로 그 다음 말씀, 마태복음 10,1-4절 말씀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언급된 12제자의 이름은, 그저 단순한 12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 12사람의 '이름'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당시의 소경 같은 목자들, 소경 같은 지도자들과는 구별되는 '이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던 '새로운 목자'라는 겁니다. '새로운 리더십'을 말합니다. '새로운 일꾼'을 말합니다. 그들이 바로, 12 사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정도의 일을 할 사람이라면 뭔가 당시에 세상 앞에 검증된 자라야 하지 않습니까? 자 여기 12명의 제자들을 보세요. 오늘 본문 2-4절에 12명으로 뽑힌 제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자라"

여러분, 그 12명 제자들의 이름을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중에는 사실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 다른 랍비들이 자기들의 제자를 뽑을 때 적용했던 기준을 제시한다면, 12명의 제자 가운데 제자가 될만한 인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어쩌면 그런 사람들만을 불러서-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 같이 세상 적으로 볼 때 어떤 기대가치가 없는 저들을 붙잡고 주님은 새 시대를 열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단순히 말씀으로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가르침을 하십니다. 그건 바로 삶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이 12명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하루 24시간 늘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그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현대 교육학에서 그런 교육을 '도제교육'이라고 하고, 그런 도제교육을 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도제지간이라고 합니다. 도제제도의 교육적 특징은 첫째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인격적 관계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 특징은 단순한 학문이나 기술 교육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교육(전인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며, 세 번째 특징은 장래의 지위를 보장하는 교육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삶으로 제자들에게 바로 그런 교육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두 번째 이유는 '전도하러 파송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택된 12명의 제자들은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5절에 보면- 곧바로 전도자로 파송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우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붙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 곁을 떠나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게 됩니다.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세상 속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게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신 세 번째 이유는 나중에 그들을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자! 보십시오. 이 12명은 예수님 살아 계실 때에는 주님으로부터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얼마나 많이 책망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12명 가운데 10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나 같이 주님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아낌없이 주님이 자신들을 믿어주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의 인생 송두리째 다 헌신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에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것 사실이지만, 이들은 정말 하나되기 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그들의 관심의 초점이 바뀐 것입니다. 강인선(姜仁仙) 씨가 쓴 '하버드 졸업식 날엔 비가 내리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여러 내용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버드 대학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가 말하는 하버드 대학의 힘은,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에서 온다는 겁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하는 공부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창의적인 대안(代案)을 제시하는 공부를 한다는 겁니다. 남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대안(代案)을 찾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버드 대학의 힘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저는 우리교회가 지금 이대로 좋은 교회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이 시대적인 교회 중 하나인가는 저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요즘에 와서 솔직히 많은 걱정과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우들 중에는, 대안적인 새로운 시각을 가지기 위해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여러분 나름대로의 가치와 전통,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신앙이 기준이고, 바른 신앙이라는 것을 고수하고, 그것을 주장하려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고, 주님을 또 다시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이 시대 우리도 한번 쓰임을 받는 일꾼으로 살아가려면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소경 같은, 전통적인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랍비들의 시각을 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시각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내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이 시대의 세속적인 목표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 목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그 삶은 의욕이 넘치고 또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 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삶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잘못 치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한번 공이 엉뚱한 곳으로 가면 그 다음 골프 경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경우에 따라 산만해지기도 합니다. 최신 유행이나 따라 다닙니다. 다니면서 값싸게 얻은 인스턴트 해답이 만고 불변의 진리인양 맹신합니다. 그리고 이 일 하다가 안되면 저 일을 하고, 전략도 없고 목표도 없고 일정한 우선순위도 없어 보이게 행동합니다. 결국은 작은 일을 붙잡으려고 큰 일을 놓쳐 버리는 참 안타까운 인생을 살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틴어로 목표라고 하는 말이 '피니스(finis)' 인데 이것은 종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종말입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끝입니다. 인생의 진짜 목표는 인생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아니하는 목표라야 진짜 목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생 목표를 바로 정하고 달려 왔다는 증거입니다.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그는 환호하듯이 외친 것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표를 정할 바에는 우리가 그런 목표를 정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목표를 갖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교회는 주님이 제자를 삼아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일꾼을 뽑기 위해 장로 두 분과 7명의 안수 집사와 그리고 7분의 권사를 세우려고 합니다. 나는 이 분들이 대안적 시각을 갖고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이 일상화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장로, 안수 집사, 권사를 투표할 때도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직분이 참 존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이 직분은 영적으로 보면 지도자이지만 육적으로는 머슴입니다. 저와 같은 멍에를 메야 합니다. 직분이 그 사람의 신앙의 연륜이 깊어서 ‘장로님’ '안수 집사님,' 권사님'이란 호칭으로 올려드리고 높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후보 가운데 어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자신이 먼저 희생하고 또 섬겨 가는 모습을 가지 분들이 뽑힘을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만을 발하는 그런 모습이 일어나는 분들로 세워져야합니다.

직분자들은 앉아서 결제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직분자들의 우선순위입니다.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다거나 높임을 받는 위치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영적으로 세워져 있는 분들을 우리가 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안적 시각을 가진 자들이 세워져야합니다.

로렌스 형제가 있는데 그는 깔멩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배움도 부족하고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었습니다. 여러 번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번번히 좌절이 됩니다. 마침내 48세에 겨우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속에 들어가 또 한번 실망을 하게 됩니다. 로렌스 형제는 여생을 아름답고 보람 있게 살고자 들어간 수도원에서 정작 자신에게 주방에서 밥하고 설거지하는 일만 시키는데 몹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인생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나에게 기껏 맡기는 일이 설거지란 말인가!’ 그러나 곧 하찮은 일상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로렌스 형제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설거지하는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 삶 어느 구석에라도 함께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대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수도원 원장과 주고받았는데, 바로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리려 아픔을 겪는 동안 그는 놀랍도록 주님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변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적인 삶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그가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그의 일상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로렌스 형제가 그릇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사제가 성찬식을 준비하는 엄숙함과 경건함을 느낀다. 그는 경건함으로 엄숙함으로 정성을 다하여 그릇을 하나하나 닦고 있었다. 그리고 주어진 모든 임무를 마치고 부엌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로렌스 형제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거기서 신의 임재를 볼 수 있었다.” 설것이를 하는 것도 성찬식을 하는 자세로 했던 그는 마침내 자기를 여러 번 거절한 그 수도원의 원장으로 한 생을 보람 있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큰 일을 하든지, 작은 일을 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향한, 대안적인 지혜와 정신과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으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감당할 때, 이 시대를 향한 대안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과 같은 이 시대의 인물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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