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가 사는 까닭 (요 4:31~38)

  • 잡초 잡초
  • 184
  • 0

첨부 1


내가 사는 까닭 (요 4:31~38)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가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수가성의 한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러 나왔던 한 여성을 만나며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는 종결부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예수와 사마리아여성 사이의 만남을 이름 붙여서 ‘최악의 상황 속에서의 최악의 만남’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시는 예수가 너무 탈진하고 피곤해서 도저히 한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았고... 제자들은 급하게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한 사마리아 여성이 물을 긷기 위해서 우물가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물 좀 달라고 하여도 물을 주지 않는... 유대인 남자가 어떻게 사마리아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할 수가 있느냐며 목마르고 지친 나그네에게 물 한 모금 주기도 싫어할 정도로 마음이 닫힌 여자였습니다.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서 여자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여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리고 스스로도 어떤 품위와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여성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어도 그런 사람을 보내신 것인지... 우리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성의 만남을 가리켜서 ‘최악의 상황 속에서의 최악의 만남’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가장 지치고 탈진한 상태였고... 여성은 정말 문제가 많고...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으려하는 상대하기가 정말로 힘든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비록 몸은 피곤하지만... 길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대화 속에서 그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너를 버렸다고 하더라도... 네 스스로도 이제는 자신에 대하여 어떤 기대나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결코 너를 버리지 않으시고 너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증거가 ‘지금 네 앞에 있는 나 자신’이라는 것... 예수는 이런 것들을 그녀에게 알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마음이 열려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실로 그를 얽매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지는... 그리고 단절되었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들이 다시금 회복되어지는 구원의 순간이 그녀에게 찾아오게 된 것이지요. 시작은 최악의 상황에서의 최악의 만남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감격스럽고 행복으로 가득한 순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양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모습은 그들이 조금 전에 보았던 지치고 탈진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생기가 넘쳤고 무척이나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준비한 음식을 드립니다. ‘선생님 드십시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더 궁금해졌습니다. ‘우리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가 양식을 갖다 드렸는가?’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생각해보면 바로 이 말씀 속에 예수가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이라고 할까... 예수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비결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최악의 상황에서의 최악의 만남이었지만... 그 자리를 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바꾸어가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바로 이 말씀 속에 예수가 오늘 우리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삶의 비결이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를 위하여... 그가 몹시 지쳐있고 힘이 드니까... 무엇인가 먹을 것을 드림으로써 그가 새로운 힘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음식을 구해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그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의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피곤한 나를 더욱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고... 지친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지 내가 서 있는 그 자리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을 그에게 베풀어 주는 것...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보다... 세상에서 가장 호화스럽고 사치스런 대접을 받는 것보다 더욱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활기에 넘치는 삶을 살게 하여주는 나의 삶의 소중한 비결이지...’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가 깨닫고 터득하신 삶의 비결... 그것은 예수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다시 말하면 자의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예수는 가장 어렵고 힘든 환경에 직면해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만난 사람은 그를 아주 하찮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여성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이런 상황에서도 결국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결과를 끄집어 낼 수가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독특한 자기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하면 자의식이 있었고 이것이 결국 그를 지탱해 나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나라가 적의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모든 왕족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왕은 한 가지 생각을 해내었습니다. 훗날을 위하여 핏덩이인 어린 왕자를 걸인에게 맡기고, 종의 핏덩이인 어린 자식을 왕자로 삼았습니다. 왕궁에 남은 종의 자식은 비록 갇혀 있었고 종의 핏줄이었지만, 자신이 왕자로만 알고 자랐습니다. 반면 걸인에게 간 왕자는 비록 왕의 핏줄이었지만 왕자를 맡았던 걸인은 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왕자는 자신이 걸인인 줄로만 알고 자랐습니다. 그 결과 진짜 왕의 자식은 커서 비루한 인생을 살다가 끝내 걸인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왕궁에 갇힌 채 살아야만 했으나, 왕궁에 남았던 걸인의 자식은 자신이 왕자라 여기며 꿈을 키우고 능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결국 그가 기회를 틈타 다시 왕국을 되찾고 말았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자의식은 DNA보다 강하다...’라고 말을 하더군요... 내가 누구라는 자기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의식... 이것이 결국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소중한 힘이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예수가 하신 말씀 가운데서 그가 가진 자의식이 어떤 것인지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먼저 자기를 하나님께서 보낸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여기서 예수가 ‘나를 보내신 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는 스스로를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우리가 자기 자신의 존재나 기원에 대하여 호기심이 막 발동할 때에... 우리는 한번쯤 그런 질문을 던져본 일이 있습니다. ‘난 어떻게 해서 세상에 태어났어?’ 그때에 우리에게 돌아오는 대답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은 무엇인가요?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대답하지니 좀 골치가 아프고 난감하기도 해서 그런 지는 몰라도... 미안하지만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을 알지만... 그래도 좀 실망스럽지요... 정말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인가? 한 동안 이런 고민에 휩싸이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좀 더 근사한 말을 쓰기도 하지요.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 우연히... 어떤 생각이나 목적이 없이... 그냥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게 된 존재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말은 근사하기는 하지만,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이 말하고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는 우리들에게 자기의 존재와 기원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우리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보내심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지구라는 별에 떨어진 존재도 아니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존재도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까닭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에 지금 나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이렇듯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이러한 자의식은 우리들의 든든한 삶의 기반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로 새롭게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삶의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섭리와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보내고 맞이하는 모든 시간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이 모든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은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그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와 사마리아 여성의 만남... 그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가장 최악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예수가 그녀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은... 예수는 이런 만남을 우연한 만남으로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힘이 다 빠지고 지친 상태에 있지만... 내가 만난 여성이 정말 상대하기가 힘든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 시간에 그녀를 내게 보내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셔... 하나님은 내가 정성을 다해서 그녀를 대하여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고 계셔...’ 이런 생각이 예수에게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어렵고 힘든 조건 속에서도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확신과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결국 오늘 나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보내셔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이러한 자의식 속에서 세상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맞이하는 모든 순간들... 그것이 좋던 나쁘건 상관없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그들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상관없이... 이 모든 것 가운데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담겨 있음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런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 갈 때에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가장 어렵고 힘든 형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결과를 드러내며 사는 사람이 될 수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다리 밑에서 주워온 존재라면... 그냥 대강 살아도 될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만일 내가 세상 밖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으로 던져진 존재라면... 그런 경우도 비슷한 것이지요. 심각하게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나 좋은 것만 생각하며 살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존재라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나를 보내신 것은 아닐 텐데... 그냥 다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단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아닐 텐데...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원과 뜻이 있을 텐데... 이런 고민을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고민하고 추구하는 것이 단지 내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것은 어떻게 하면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을까...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고민은 이제 좀 그만하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6:33)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사마리아여인을 만난 예수를 통해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마리아여인은 살면서 많은 아픔과 상처를 입은 여성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겪었던 여성... 그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그녀가 겪었던 아픔은 얼마나 심했을까요? 오늘 그녀가 물 좀 달라고 하는 예수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이런 아픔과 상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녀는 사람들과 정상적인 대화조차도 나누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기에 대하여 포기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냥 생명이 붙어 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이지... 살아 있다는 기쁨이나 감동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결국 예수를 만나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것을 도저히 혼자서만 간직하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녀가 이제껏 담을 쌓고 지내던 아웃에게로 달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그날 우물가에서 그녀에게 해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고 넉넉한 존재라고 하는 것... 예수는 단지 그것을 일깨워 준 것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이라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는 그렇게 믿고 오늘 사마리아 여성에게도 그것을 드러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에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과 소원이 있으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이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12:2) 여기서 특별히 인상적인 말이 이 대목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이름이 창대케 되게 하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에는 그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만이 복을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복과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저마다 처한 형편도 다르고 하는 일도 제각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가 만나는 이들이 누구이든...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 그 사람도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하는 일...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어떤 것인가요? 지금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다가 한 가지를 덧붙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떻게 하면 나는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내가 경험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덧붙여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생각과 고민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거룩한 고민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우리는 여기서 ‘온전히’ 라는 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완성하다... 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끝까지 한번 해보는 것이지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상대방이 받아들이던 말든... 해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여인을 향해서 예수가 보여준 자세였습니다. 그녀는 참 냉담하고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여성이었습니다. 

아마 웬만한 사람 같으면 물을 좀 청했다가 거절당하면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릴 법도 한데... 예수는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열리도록... 그녀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참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녀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기도 하고... 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녀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아름답고 빛나는 부분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둡고 침침하고 아픈 부분까지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것을 알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많이 가리고 따지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되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때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얼마 전에 책에서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다...’ 비록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맘에 들지도 않고 많은 허물과 잘못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내게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하려고 할 때에 거기서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 정말 이것은 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하면 할수록 즐겁고 신바람 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마치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진땀을 빼듯... 아무리 해봐도 별로 의미가 없고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요? 하지만 이런 일조차도 이 일을 내게 맡기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온전히 감당하려 한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사마리아 여성을 만나며 느꼈던 행복!
그것은 자신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이루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행복을 살면서 느끼며 살아가는 일은 참 소중한 것입니다. 남이 알아주던 그렇지 않던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보람과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