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멘의 삶 (고후1:15-22)

  • 잡초 잡초
  • 771
  • 0

첨부 1


아멘의 삶 (고후1:15-22) 
 

세계는 지금 1929년 대공황 이래로 최대의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어쩌면 시작일 뿐이며,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론사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5명중 4명은 지금의 경제 위기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보다 심하거나 비슷하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말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3장에 혀는 악의 근원으로 우리 생의 바퀴를 불사를 만큼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가에 따라 그 인생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우리의 ‘예’하는 긍정적인 태도와 믿음의 자세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아멘’의 뜻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이루어 주소서’ 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1. 아멘 신앙의 중요성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원래 고린도 방문 계획은 에베소에서 출발하여 고린도에 이르고, 거기서 마게도냐에 갔다가 고린도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바울은 고린도를 두 번 방문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계획을 수정하여 고린도에 한번 머무는 것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향해 ‘말을 경솔히 하고 소홀히 하는 변덕스러운 자’라는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는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따를 뿐이며 ‘예’, ‘아니라’를 그의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는다고 변론하였습니다.

위대한 대 사도인 바울에게도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늘 따랐고, 또 그를 대항하는 자가 심지어 그가 세운 교회 안에도 항상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일을 생각하면서 그를 반대하는 자들과 또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예하며 삽시다, 아멘하며 삽시다, 긍정적인 생각을 합시다”고 강변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모든 일에 ‘아멘’의 사람이 되기를 강조한 것입니다. 

사람의 사고(思考)는 바로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하느냐? 생각을 바로 하느냐? 믿음으로 행동 하느냐? 이에 따라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끄느냐 그르치느냐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고후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사람이 생각하는 것에서 말로 표현하기까지는 상당한 담력을 요합니다. 보통 우리는 마음의 생각이 입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표현이 본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전혀 다른 차원임을 나타냅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자동차에 비유하여 보면, 마음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과 같으며 입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동차의 기어를 넣어서 차를 출발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아멘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게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예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 아비의 간절한 호소는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나게 하는 큰 믿음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아멘”등의 신앙적인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은혜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구두회사의 상품에 대한 시장성을 파악을 위해 두 명의 세일즈맨을 몇 주간 파견했습니다. 한 사람은 이곳에는 아무도 구두를 신지 않기 때문에 시장성은 없고 상황은 절망적이라 했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이곳에는 아무도 구두를 신지 않기 때문에 시장성은 무한하고 경쟁자도 없고 상황은 희망적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삶을 보는 태도에 대한 문제입니다.

  
2. 아멘의 사람

긍정적인 사람은 한마디로 아멘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멘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일을 풀어나가는 사람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에만 집착하면서 ‘못한다, 안된다, 왜 그렇게 했느냐’는 책임만을 추궁하고 다툼을 일삼습니다.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은 모두가 ‘아멘’의 사람이었고 ‘예’의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훌륭함은 그 사람의 인물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품은 생각이 위대하였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의 고린도 방문의 계획과 변경도 이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 현장에서 이 원리를 늘 적용시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부딪혔을 경우 어디에 우선권(優先權)을 두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행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민수기 13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에 앞서 정탐을 마쳤을 때의 일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10명은 모두가 가나안 정복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명만은 믿음 안에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로 모세를 지지하며 가나안 정복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 두 사람만이 가난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말씀 하시기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는 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람이 한 방향에서 불어와도 돛의 방향에 따라서 배의 방향이 다르게 이동하듯이 이처럼 믿음의 사고는 인생의 성패를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적인 일이나 비범한 사역들은 초이성적이어서 사람이 보기에 때로는 무계획적이고 모두가 평범하지 않은 비정상적인 것들로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만일 지금 우리 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면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인 신앙생활로 모든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아멘의 신앙의 원리

바울은 공격자들과 이들에게 미혹을 받거나, 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으로 설득하고 ‘변명’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변명’이란 말은 13번씩이나 나타납니다.(행 22:1, 24:10, 25:8,16, 26:1,2,24, 롬 2:15, 고후 7:11, 12:19, 빌 1:7,16, 딤후 4:16) 

‘변명’은 헬라어로 ‘아폴로기아스’(ἀπολογίας)인데 ‘말로서 방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낱말에서 ‘변증학’(Apology)이라는 학술용어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변명한 것처럼 변증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신지식(神知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즉 계시가 없이는 참된 하나님의 세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위대한 생각을 품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건 자체를 보지 말고 사건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우리의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지식(神知識)입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속단하고 포기하고 부정적인 판단을 하므로 일을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망치고 있습니다. 또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데도 너무 쉽게 주님을 포기하므로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시간과 때를 기도하며 인내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특히 예배에 있어서의 신인식을 강조하였습니다(Gotteserkenntnis und Gottesdienst). 즉 예배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인식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한 신인식도(神認識度)가 다릅니다. 따라서 믿음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큼 벌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차이는 신인식의 차이인 것입니다. 아멘의 사람은 그만큼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역사할 것을 믿고 의지하는 신인식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괴테 “강인한 의지가 있는 자는 세계를 정복한다.”

레나르 라빈힐 “영적인 성숙은 학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데서 온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지’라는 큰 힘을 부여시켰다. 믿음은 의지의 최고봉에 위치해 있다. 이 믿음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격려와 약속은 우리에게 더욱더 큰 능력과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한다. 

예수님이 각색 병자들에게 하신 명령은 그들에게 놀라운 역사와 기적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평안히 가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 격려의 말씀, 은혜와 진리의 말씀은 모든 듣는 자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었습니다. 

싱클레어 퍼거슨 “우리는 오직 순종 가운데서만 하나님의 뜻의 가장 위대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연중 추위에 시달리는 알래스카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선반으로 팔아먹은 사람이 있고, 한평생 눈을 보지 못하는 사막국가로 하여금 제설차를 태풍으로 고속도로에 가득 덮힌 모래를 제거하는 차로 수입하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1894는 영국에서 어떤 사람이 1마일(1609.4m)을 4분에 뛴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록을 단축하려고 도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최고 기록은 4분 1초였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1마일을 4분이내로 뛸 수 없다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약 50년후 1945년 어느 외과 의사가 의학적인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1마일을 4분 이내에 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발표가 난 후 2년 동안 13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1마일을 4분 내에 뛰었습니다. 
  

결 론

우리 사회는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함께 꼬리를 무는 연예인 자살 사건 등으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희망의 언어, 결려의 말, 함께 위로하며 서로 협력해야 할 시기입니다. 

긍정의 사고, 주 안에서 ‘예’할 수 있는 마음이 태도는 지금 더욱 요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족장들과 선지자들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해서 ‘예’하심으로 인해 그 약속들을 성취하셨습니다(창22:18, 사25:8, 합2:4).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그의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 매사에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아버지의 모든 약속에 대해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우리가 아멘하여’ 큰 축복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