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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생명 (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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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롬 6:23)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납니다. 무엇인가를 붙잡아 보려는 욕망 인생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떠나 갈 때 두 주먹을 쫙 펴고 빈손으로 떠나갑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정복할 땅에 없었다는 알렉산더 대제는 이 세상을 떠나가기 전 유명한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들어갈 관에는 양쪽에 구멍을 파서 내 두 팔, 두 손을 관 밖으로 나가게 하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 입니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무엇인가를 이 땅에 남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고상하게 말하면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영원을 붙잡아 보려는 헛되고 헛된 몸부림이고,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영원을 사모하는 몸짓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도서의 기자는 전3:11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 모나리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그녀의 신비한 미소입니다. 모나리자를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하여 왔습니다. 가장 전통적인 것으로는 그녀의 남편이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드 다빈치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한 기쁨의 미소라든가, 가문의 대를 이을 잘 생긴 둘째 아들의 출산을 기대하는 남편의 사랑을 확인한 행복한 여인의 미소라든가의 설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미술 사학자요 미술 평론가인 다니엘 아라스는 아주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짧게 스치는 미소야 말로 인생의 덧없음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천재 작가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이 여인의 그림의 왼쪽 어깨 넘어에 작은 ‘다리’(bridge) 하나를 그려 넣습니다. 다리가 있다는 말은 강물이 흐른다는 말이고 그것은 덧없는 시간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뒤의 풍경은 평범한 마을 풍경이나 자연이 아닌 사람들이 하나도 살지 않는 태고의 괴기한 원시적 풍경입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태고부터 흘러오는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의 덧없는 한 찰나의 미소로서 모나리자의 그림의 본질은 ‘시간에 대한 명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건강도 부도 인기도 행복도 그리고 행복한 미소조차도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는 그런 덧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이 덧없는 인생이 인생의 전부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두 가지 인생의 대조적인 실존을 소개합니다. 하나의 인생이 허무의 실존이라면, 또 하나의 인생은 영원한 실존입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허무의 실존’입니다.

자 그러면 먼저 우리는 허무의 실존으로서의 인생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바울은 이 허무의 실존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인간 모두는 결국 죽어야 하고 그것은 인생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모두는 죽어야 합니까? 성경의 설명은 단순하고 직설적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사들은 서로가 만나 인사를 주고받을 때의 유일한 인사로 라전어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시오”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를 좋게 여긴 로마의 한 황제도 자신의 신하들이 스스로를 알현할 때마다 “죽음을 기억하시오”(메멘토 모리)라고 인사를 하게 함으로 죽음의 실존인 자신의 인생을 상기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미국의 코미디안 자니 칼슨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또한 “죽음의 확률은 100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죽습니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죽습니다. 배운 사람도 별로 배우지 못한 사람도 죽습니다. 유명한 사람도 무명한 사람도 죽습니다.

문제는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의 죽음은 존재의 중단이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죄를 범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아담이 죄를 범하고 바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성경에서 죽음이란 단어는 일관성있게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생명도 떠나간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멸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것입니다. 그는 살아도 죽은 것입니다. 삶의 의미도 삶의 보람도 삶의 영광도 없는 인생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죄를 범함으로 인함인 것입니다. 롬3:23에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고.

문제는 이런 결과를 알고서도,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인생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가져다주는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미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쾌락의 정체를 “잠시(for a short time, for a season)의 죄의 낙”(히11:25)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잠시의 쾌락, 그 찰나의 쾌락의 순간, 길어야 한 시즌이 지나가면 죄가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삯은 곧 사망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죽음-창조주 하나님과의 단절이요, 더 나아가 육체적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망조차 마지막 우리의 실존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된 인생의 결국을 히9:2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죄인에게)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이 심판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희망이 없이 그 분에게서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실존 혹은 하나님을 떠난 허무의 실존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실존의 비극성을 하나님이 기억 못하시는 인생이라고 묘사합니다.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인생-행여나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실존, 우리의 실존, 그 허무한 실존의 모습이 아닌가요?
그러면 이제 다음으로 그와 대조적인 영원한 실존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둘째로, ‘영원한 실존’입니다.

본문 롬6:23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받아 누리는 인생입니다. 자, 이 성경 구절에는 세 개의 대조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죄/하나님, 
*삯/선물, 
*사망/영생

죄의 삯으로 사망을 피할 수 없었던 인생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셔 우리에게 은사 곧 선물로 영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에서는 다른 표현으로 ‘은혜’(grace)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란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느냐구요? 사랑이 그분의 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8) 이어지는 요일4:10의 말씀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드리심으로 우리 죄는 사함 받고 사망을 피할 수 없었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17:3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깊은 관계를 체험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남자를 알았다, 알지 못했다는 말은 관계적 체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뜻으로 다시 요17:3을 읽어 보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고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영생의 선물을 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곧 그의 사랑, 그의 기쁨, 그의 평화, 그의 인내, 그의 자비, 그의 온유, 그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원한 생명의 실존을 갈망하지 않으십니까?

수년전 미국에서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라는 AIDS걸린 소년이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13세 되던 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수혈 중 잘못되어 이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년이 워낙 밝고 명랑하고 주변에 감동을 주어 그는 병을 앓으면서 이 병을 퇴치하는 홍보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을 위시해서, 마이클 잭슨, 부자 도날드 트럼프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방문을 받고 선물들을 전달받았습니다. 투병 5년여 만인 만 18세가 되던 해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가기 전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라이언, 이제 우리는 부모로서 너에게 더 이상 아무 선물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오직 너를 위해 기도할 따름이다.” 

이때 이 소년은 그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버지, 잊으셨나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교회로 인도해 주셨구요.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생의 선물을 받도록 해 주셨잖아요. 다시 한번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예수 믿고 영생의 선물을 받고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해 주신 것을!” 

그리고 보면 이 소년의 그 동안의 당당함은 바로 이 영생을 소유하고 누리는 자의 특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 사는 영원한 실존의 특권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화두에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모나리자의 미소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레오나르드가 어떻게 임종을 맞이 했는지는 몇가지의 엇갈린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조르조 바사리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마지막 병상에서 그의 예술을 이해하고 존경하고 후원했던 프랑소아 1세의 방문을 받고 이제는 여한이 없다고 하면서 사제를 불러 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의 질문에 그는 이제 세례를 받고 싶다고, 그동안 그는 숱한 성화를 그려왔습니다만 그의 신중한 결벽증으로 미루어 두었던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가 마지막 병상 세례를 받은 후 그의 제자요 상속자인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는 스승 레오나르드의 얼굴에 떠오르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떤 행복한 미소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미소는 모나리자도 가질 수 없었던 영생을 선물로 받은 자의 영원한 미소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 영원한 미소와 함께 영원한 나라로 떠나간 것입니다. 

오늘 당신에게는 이 영원한 미소, 이 영원한 행복, 이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책 성경은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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