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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만 잃지 않으면... (눅 8: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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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만 잃지 않으면...  (눅 8:22~25) 

 
[슐로모 브레즈니츠]라는 심리학자가 4개조의 군인들에게 20km를 행군하게 하면서 그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를 조사했습니다. 1조에게는 미리 20km의 행군거리를 예고하고 5Km마다 남은 거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2조에게는 단지 먼 거리를 행군한다고만 알렸습니다. 3조에게는 15km를 행군한다고 말했다가 14km지점에서 20km행군으로 변경했습니다. 반면 4조에게는 25km행군한다고 말한 후 14km지점에서 20km로 단축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20km행군이라는 정확한 거리와 중간에 남은 거리를 알고 행군한 1조가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조는 행군거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먼 거리를 행군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던 2조였습니다. 그런데 25km로 알고 시작해서 중간에 단축거리를 행군한 4조가 처음거리보다 더 많이 행군한 3조에 비해 스트레스를 훨씬 더 받았다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 [브레즈니츠]의 분석에 따르면 생각보다 더 늘어난 거리를 가야했던 3조의 군인들은 물론 화가 났지만 목적지가 남아있고 완주해야하는 소망이 있었기에 넉넉히 행군할 수 있었던 반면에 같은 20km였지만 예상한 거리보다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중간에 들은 군인들은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급격한 피로가 몰려 왔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소망이 없는 일은 무의미하고 불평과 실패로 이어지지만 소망은 삶의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목적까지 이를 수 있는 동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곧 죽을 것 같은 불안 속에 사는 듯하지만 그 곳에 생명이 있고, 늘 풍랑 속에 있는듯하지만 그 한 귀퉁이에는 평안이 숨 쉬고 있는 이것이 인생입니다. 별의 별 풍랑이 다 일어납니다. 희한한 파도가 치는가 싶더니 요상한 바람이 불어 닥치기도 합니다. 혼자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서 이것 저 것을 의지해 보지만 잠깐은 피할 수 있으나 금방 또 다시 불안해 지고 맙니다. 

그래서 이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고 자살에 이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가닥의 소망만 볼 수 있다면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삶 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소망을 보며, 무엇에서 희망을 찾을까가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도 세상은 온통 소망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의 소망을 찾는 모습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환경에서 소망을 찾으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소망이란 외적조건에 의해서 지배되고, 보이는 것에 의해 주도되고, 손에 잡히는 것에 종속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뭔가 조금 가지면 살만하다하다가도 조금만 부족하면 죽겠다 합니다. 자기보다 부자 앞에서는 머리 조아리고 자기보다 못하다 생각하면 업신여깁니다. 나에게 이득이 있다 생각하면 목숨 걸고 대들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는 일에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늘 환경에 따라 그 쪽으로 기울어져 살아오면서 이미 습관화되고, 문화 화되고, 성품 화되고, 체질화까지 되었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를 인정할 줄 모릅니다. 내가 행복 한가 불행한가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무엇 때문이라는 환경에서, 누구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찾는 아주 습관화되고 성품 화되고 체질화 된 사람입니다. 참 고치기 어려운 불행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쁨도 슬픔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남에게서 항상 빌려오고 있습니다. 무슨이야기냐 하면 웃는 사람 속에 웃는 척합니다. 우는 사람 속에 우는 척합니다. 완전히 주변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 내가 좌우되고 종속되고 끌려가다 보니 감정마저도 그렇습니다. 사는 것이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중요하고, 내 진실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환경 때문에 웃고 울고, 배경 때문에 살고 죽고 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인간상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지식과 자기 경험 속에서 소망을 찾으려는 사람입니다. 

일상에 자기가 기준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고 자기에 의해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자기가 주도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경험한 일 외에는 믿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아는 것만 있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미 경험한 것이 결과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내 경험에 잘 된 것은 앞으로도 잘 될 것이고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해서 잘못된 것은 누가 하더라도 잘못되는 겁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철저하게 자기 과거 지식, 자신의 과거 경험에 뿌리를 두고 오늘의 중심에는 나 자신만 있습니다. 내가 못하는 건 누구도 못하는 겁니다. 내가 실패한 일은 누구도 어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얼마나 미련한 생각입니까? 내 능력, 내 지식, 내 경험, 거기에 집착하고 그 이상의 세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철저하게 자기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 지식이나 내 경험이라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통하지 않을 때 그 경험과 지식이란 소용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그런 내용이 나타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배가 있습니다. 그 배 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주동적인 사람들이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다 직업이 어부 입니다. 한평생 이 바다에서 물고기 잡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 속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여기에 그들의 지식이 있고, 무엇보다도 풍부한 바다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지식도 있고 경험도 있는 이 사람들이 풍랑이 좀 일어났다고 해서 아주 절망을 합니다. 그리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 동안 바람과 싸워본 일도 많고 폭풍에 대한 지식도 있고, 풍랑에 대해서 많은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이러한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큰 사건을 만납니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이 당황해 합니다. 불안해합니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세상 경험이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면 누구든지 꼼짝 못하고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험이 아무리 자랑할 만한 것일지라도 자기 경험의 한계를 넘어설 때는 손을 들고 마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세상 겪어보지 않은 일이 없고 아무리 오래 살아 보았다 하더라도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일 앞에는 두려운 것입니다. 또 경험해 보았다 할지라도 자기의 경험한 것 이상의 일을 만나면 당황하다가 마침내는 불안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는 두려워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가보았다는 사람은 있습니다만 죽어본 사람은 많지 않거든요. 몇 명은 있다고 합니다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죽음은 두렵더라는 것입니다. 경험했어도 또 죽는 것은 역시 두렵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오랜 동안 축적 된 경험과 지식 속에서도 마침내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지식과 경험이 이렇게 소용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목숨 걸고 소망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결국 허탈하고 두려움만 남는 것이 자기지식이요, 자기 경험입니다. 심리학자[롤로메이]라는 사람이 현대인의 가장 큰 무서운 병을 <불안과 공허>라고 말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한계의 끝이거든요.

자, 그러면 우리의 소망이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그 세 번째는 바로 신앙에서 소망을 찾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우리의 결론적인 교훈입니다. 아무리 눈앞이 깜깜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힘든 일이 닥친다 해도 모든 것을 신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며 신앙 안에서 해결하고 살아가려는 그런 사람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너무 어이가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보고 당황하면서 자기들마음대로 내린 결론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죽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하는 말을 보십시오. 상당한 문제가 있는 말입니다.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 말 속에는 자기들의 경험에 의한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들의 지식이나 자기들의 경험한 바로는 이 정도의 풍랑이면 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결론은 너무나 분명하고 다른 해결의 길은 없다는 진단입니다. 참 명쾌해 보입니다. 구질구질하게 끌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만약에 기도해보고 물어도 봤는데 하나님이 안 된다 그랬다면 오늘 이 제자들의 결론은 정말 멋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결정적인 실수가 무엇입니까? 신앙적인 해결방법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배에 함께 타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해결의 열쇠는 주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절망하고 스스로 소망의 끈을 놓아버린 것입니다. 

25절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후에 이들이 하는 말로 봐서는 말이 제자들이지 이들에게 믿음이란 없었습니다. "그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이제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으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한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모든 문제를 믿음 문제로 돌립니다. 

여러 말할 것 없습니다. 믿음이 문제입니다. 어떤 경험 이상의 문제가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현실 속에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하고, 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경륜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기, 이 풍랑 속에서 돌아가실 분이십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같이 타고 있는 저들도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소망만 잃지 않고 붙잡고 있으면 다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임스 와트]라는 사람이 그린 <소망>이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내용은 지구가 있는데 그 지구 위에 남루하게 옷을 입은 어떤 한 소녀가 앉은 자세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 줄을 자세히 보면 가닥가닥 끊겨 있고 오직 하나의 줄만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녀는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 줄을 가지고 열심히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것입니다. 줄이 정상적으로 모두 있어도 바이올린을 켜기 어려운데 가닥가닥 끊어지고 하나밖에 없으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줄을 가지고 열심히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소녀의 그림의 제목이 소망입니다. 참 의미 있는 그림이지요.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갈릴리 같은 이 세상은 언제나 폭풍우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는 거센 바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파도가 몰아치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이 폭풍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폭풍이 끝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풍랑을 잔잔하게 하실 능력을 가지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소망만 잃지 않으면 우리는 그 잔잔함의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에 승리하시는 해성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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