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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 생명이 있습니까? (요일 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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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명이 있습니까? (요일 5:11~13)


이번 가을 들어 목요일 낮에 자매들의 성경공부가 매주일 진행됩니다.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은 신앙생활의 연륜이나 성숙도, 신앙성장 배경들이 다양합니다.   연령 차이도 있고 평생 살아온 삶의 색깔과 내용들이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쁘게 어린 아이를 돌보며 기르는 젊은 엄마가 있는가 하면 한창 대학 진학 준비와 대학 공부로 분주한 10대 청소년과 20대 초반의 자녀들을 둔 엄마도 있고, 자녀들이 다 장성하여 직장에 다니거나 다 출가시키고 할머니가 되신 분도 함께 한 그룹의 식구가 됩니다.   삶의 관심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쩌면 전혀 소통이 안 될 수도 있는 구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의식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그리고 매 주일 모일 때마다 그날의 주제로 정해진 하나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생각을 나누고 삶의 고백을 나누는 귀한 모임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공식으로는 세 번째 모인 이 공부반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실제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간 모임에서 주로 나누었던 주제는 ‘중생’ 그리고 ‘회개’였습니다.    

‘중생’이라는 말을 우리 말로 다시 풀면 ‘거듭남’이라는 말이 됩니다.   ‘다시 태어난다’ 또는 ‘새 생명을 가지고 출생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밖에서도 가끔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실수를 청산하고 앞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각오를 다짐할 때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으로 삶의 자세를 바꾸어 새 사람이 되어 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거듭남’이란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의미에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한 가지가 있으니 곧 ‘생명’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거듭 태어남이란 자연인으로서 나의 삶의 자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좋은 현상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거듭남, 중생은 내 속에 새로운 생명이 들어와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는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거듭남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요한일서의 말씀을 가지고 약 2년 전 주일 아침에 ‘지금 생명이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동일한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요한이 쓴 편지 속에 언급되고 있는 이 ‘생명’이라는 말이 우리를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근원이며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영생’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신 바로 그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떤 분은 이 영생이라는 말을 그 옛날 진시황제가 그렇게도 소원하여 불로 장생초를 먹어 얻으려 했던 영생불사와 같은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진시황제가 영원히 죽지 않고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그렇게도 간절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가 누리던 그 호화스런 생활을 다 누리지 못하고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아쉬웠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란 때가 되면 병들고 쇠약하여져 결국 죽어갈 육신을 위해 세상에 좋다는 약으로 또는 운동으로 지탱하면서 영원히 산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아직 정확하게 모르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데 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 죽어 흙으로 돌아갈까 그렇다면 그 영생이 도대체 무엇일까 묻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에 다루는 중생이란 것이 바로 그 생명을 받아 새롭게 그리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밤 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예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셨을 때 구약의 율법에 능통한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신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시 태어남이란 육신으로 태어남이 아니라 영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말씀하심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잃어버렸던 생명을 다시 회복하는 순간 사람은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 잃어버린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다시 회복해야 할 생명이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을 위하여 예수께서 사람들에게로 오셨고 요한은 오늘 편지에서 ‘생명이 있고 또는 없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표현을 인용하여 누구에게 그 생명이 있고 또는 없는지 살펴봅시다.   11절을 보면, 이 생명을 누가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아들 안에 있습니다.   그 아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12절을 봅니다.   누구에게 이 생명이 있습니까?    아들이 있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누구에게는 없습니까?   아들이 없는 자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아들을 낳은 사람은 생명이 있고 딸만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이나 아직 아들을 갖지 못한 사람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 아닌 것쯤은 다 아시지요?   아들이 있고 없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일까요?   아들이 있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13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음을 알려주려고 이 편지를 쓴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있고 그 이름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그 생명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가 아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그 사람에게 지금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는 성경에 기록된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독해력을 측정하는 수준입니다.  어려운 학문을 공부하시는 여러분들이기에 한 번만 읽어보면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서 누구든지 논리적으로 이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말씀이 나에게 정말 그렇다고 절실하게 다가오느냐 아닌가에 달렸습니다.   이 말씀이 내 가슴 속으로 팍 파고 들어와 내 인생을 뒤흔들어 놓고 있느냐 아니냐에 생명이 있고 없고 두 갈래의 길로 나뉘고 맙니다.    

2년 전에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질문했던 것인데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이 말씀을 빌어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대답하셔도 좋고 옆 사람 보기에 민망하거든 마음 속으로 대답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나를 살리셨고 이제는 그분이 내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고 대답하신 분들은 오늘 사도 요한이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이며 영생이 있는 분들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알게 하려고 이 편지를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이미 요한복음 1장12절, 13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잃었던 생명을 다시 얻은 사람이며 영원히 죽을 인생이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오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잃어버린 생명, 회복해야 할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또 다른 무슨 생명이 필요합니까?    만일 그 생명이 그렇게도 꼭 필요한 것이라면 사람들이 언제 그 생명을 잃어버렸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중요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마음껏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만일 먹으면 분명히 죽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꾀임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기어코 따 먹고 말았습니다.   따먹으면 분명히 죽는다는 말씀을 따라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영원히 교제하시기 위하여 지으신 사람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 아름답던 교제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육신의 죽음이 찾아왔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존재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관계단절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그 영이 죽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로부터 떠나버린 가련한 존재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 이후로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사망의 세력에 붙들린 존재가 되었고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존재로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없으니 육신으로는 살았으나 영으로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이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 이 생명을 주십니다.    요한일서 5장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영생이란,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지금 내가 하나님의 생명과 교제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그 교제가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해봅니다.    교우 여러분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과 영원히 교제하는 그 생명을 지금 소유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또 다시 바꾸어 말하면, 교우 여러분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구원이란?  죄인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전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구원은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걷다가 내가 지금 가는 길이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길, 영원한 죽음의 길, 죄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이 곧 회개라고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심령을 그 죽음의 길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구원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을 벗어난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의 사건이 곧 나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입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를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을 합니다.   세례 교인들은 이미 세례 받을 때 확인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때 나의 대답이 본심이 아니었다면 다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한 놀라운 사랑이었음을 믿습니까?   그리하여 죄 사함을 받아 죽음의 길에서 돌이켜 지금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입니까?    교회에 다닌다고 저절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 집사라는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여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한다고 저절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예수를 믿는 분들이시니 내가 그분들 덕에 자동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예수를 잘 믿으니 나도 아내 허리춤 붙들고 천당에 간다는 식으로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얻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 일대일로 해결해야 할 개인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이전에 행하던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 구원 얻은 성도의 삶입니다.

누구나 이 생명을 얻어야만 삽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지만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친구들 중에 어떤 사람은 친구 부모님을 아버지 어머니라 천연덕스럽게 부르는 넉살 좋은 친구들도 있습니다.   보통 친한 친구 어머니들에게는 어머니 소리가 그런대로 나오는데 아버지들에게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르는 호칭이 ‘아저씨’ 입니다.   내 아버지가 아닌데 어떻게 아버지라는 말이 입에서 술술 나올 수 있습니까?   그냥 이웃집 아저씨일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버지이십니까?   그냥 아저씨입니까?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아버지입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면 그냥 아저씨입니다.   여러분이 주일마다 교회에 나아서 찬송을 부르며 말씀을 들으며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분이 습관적으로 부르는 아버지이거나 나와 거리가 먼 이웃집 아저씨처럼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이 전달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갑니다.    어렸을 때는 잘 안 나타나다가 나이 먹으면서 점점 닮은 부분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외모도 (붕어빵처럼)성격도 행동까지 닮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정말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얻어 거듭난 성도는 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뿐 아닙니다.   자녀는 부모의 상속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이웃집 아들이라도 상속권은 없습니다.   그러나 친 자녀는 자동적으로 부모의 상속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아 그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한 생명을 받은 자녀들이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은 주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가족들은 한 부모 아래 자라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는 혈육입니다.   한 집에 산다고 하여 다 가족은 아닙니다.   홈스테이 가족이 아무리 친절하고 날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밥도 해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지만 분명히 내 가족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 서로 주 안에서 한 가족으로 사랑하며 아껴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명, 아들의 생명이 있는 삶이 이렇게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슴 벅찬 선물을 받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에 다시 한 번 질문을 하고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이 나에게 있습니까?’  오늘은 이 질문을 드림으로 한 주간 고민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살피는 기회를 갖도록 합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참 자녀인가 아닌가 심각하게 질문하고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주 안에서 중생한 사람에게는 어떤 증거가 있을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눕니다.   한 주간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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