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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뿌리 없는 섬김에 취하지 말라 (마 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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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없는 섬김에 취하지 말라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Ⅰ. 본문해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말씀을 하셨던 무렵에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대목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 노릇을 하며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많은 능력을 행하였지만 본질상 하나님에 의해 변화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경건한 백성들의 삶을 어지럽히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에게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섬긴다고 하지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과 변화가 없는 거짓 신자의 모습과도 본질상 동일한 것입니다. 


Ⅱ. 섬김을 판단하심 

거짓된 섬김은 일시적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백성들의 삶과 구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날에 그들의 섬김과 본질에 대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판단하실 때 사람들의 기억과 그리스도의 판단에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A. 사람들의 기억 

사람들은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많이 섬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주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이런저런 모양으로 일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며 그들은 원리야 어찌 되었든지 모든 것들이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고 장소가 교회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그것을 통해 자신은 훌륭하게 봉사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 때문에 자신은 능히 받아질 만하다고 생각하며 섬김의 이력을 내세우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섬김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는 외식으로 끝마침 할 뿐입니다. 

B. 그리스도의 판단 

하지만 예수님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알고 싶었지만 전혀 알 수 없다고 예수님은 일이 아니라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뿌리가 잘린 섬김에 취해 살아가는 거짓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현저한 시각 차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원하신 것은 자기 의에 취해 모든 행위로 인하여 자부심을 느끼는 불법적인 섬김이 아니라 사랑과 질서에서 나오는 올바른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섬김이 무엇이고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처럼 하나님은 제일 먼저 우리에게 법을 가르쳐주시기 원하십니다. 

회심치 못했을 때 우리 안에는 자기가 주인 노릇하는 세계와 자기 사랑의 법이 있었습니다. 내가 모든 일의 판단자이며 섬김의 대상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원수로 행하던 자”라고 기록합니다. 그런 법을 가지고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한 회개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전에 가장 미워하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던 육적인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후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 아래서 그 법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배워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고 사랑에 흠뻑 젖을수록 점점 진정한 사랑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니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법이자 경건의 법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셨던 모든 섬김과 인격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형상과 자신의 더러움을 비교하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안에 주님의 형상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보여주는 거울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만이 우리를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불법한 인간들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다시 사랑의 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 거짓 선지자를 따르는 거짓 신자들의 섬김에는 자기 깨어져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사랑에 깊이 붙잡힌 가운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비롯되는 섬김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뿌리가 잘린 섬김은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통만을 안겨다 줍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 가운데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그들의 인격과 삶이 구정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그들의 섬김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 탐욕과 쓰레기 같은 욕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이것들이 순수한 것들과 섞여 있어서 오히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섬김이 하찮게 여김을 받고 그들의 그릇된 섬김이 존경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께서 판단하시는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또 그날이 반드시 우주의 종말일 필요는 없습니다. 수시로 당신의 판단하심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썩은 자들의 썩은 것이 예수님의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이실 것입니다. 


Ⅲ. 섬김의 뿌리, 그리스도를 앎 

예수님께서는 오늘 거짓 신앙에 대한 책망을 통해 진정한 섬김의 뿌리는 일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이십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A. '아는 것'과 '섬기는 것' 

‘안다’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지식사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창세기에 제일 먼저 나오는데.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 아이를 나으니”라는 표현에서 등장합니다. 바로 부부의 친밀함까지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은 체험을 통해 그 사람과의 인격적인 결합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부부가 결혼을 통하여 서로를 깊이 알게 되듯이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알 수 있는 이중적인 지식을 주셨습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희미하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고 이교도를 만듭니다. 하지만 택하신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가 구속주 되심을 보이셨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을 앎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구속의 중심이시며, 우주의 중심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모르고 자기 사랑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무릎을 꿇고 은혜에 감격하게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제일 먼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아무런 죄 없이 고난당하신 그 모습을 뵈올 때 그는 엄위로우신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티끌 같은 죄도 허용치 아니 하신다는 사실에 무릎 꿇고 두려움 속에 떨며 통회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형벌이 타락한 우리에게 왔어야 마땅하며 그동안의 삶과 존재가 하나님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과 악한 행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첫 번째 지식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우리는 우리 형벌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그 분의 십자가 이외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나 같이 더러운 죄인을 구속해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적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예전에는 없던 놀라운 일을 영혼 안에 행하십니다. 자기를 주인 삼던 삶의 원리를 뽑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며 살 수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으시는 일입니다. 일단 이 법이 심기우면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중생한 신자의 결정적 특징인 은혜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견딜 수 없는 갈증을 느끼는 것과 같이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부족을 끊임없이 깨달으며 주님 아래 자신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감각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은 인격을 갖게 됩니다. 포악함은 오래 참음으로 완악함은 온유함과 친절함으로 사람의 마음에서 질서를 갖추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때 그 사람 자신이 주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인격 안에서 그가 무엇을 행하던지 그 인격은 물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경건한 삶을 형성하게 되는데 결국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갔을 때 하셨던 삶을 본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이 세상에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인간들은 경건의 비밀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사랑과 질서를 따르는 진정한 변화가 심령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에 대한 앎은 티끌만큼도 없으니 일의 재미와 자기실현의 성취감,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동기들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은 아는 것만큼 섬길 수 있고 주님을 섬기는 것만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주님을 향한 값진 섬김이 사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랑과 거룩한 경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일하는 장소만 달라졌지 근본에서 바뀐 섬김이 없지는 않으십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일할수록 주님을 많이 알고 사랑에 이끌리는 섬김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열매는 나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나무가 열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섬김 역시 선함을 통해서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행위의 열매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썩은 나무로 부터 오는 것일 수 있지만 행위를 통해 악인이 선한 사람이 되는 본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결국 예배와 섬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나게 해줍니다. 

B. 예배와 섬김 

예배와 섬김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는 이렇게 저렇게 섬기고 예배하고 공적을 쌓는 것이 사랑의 법 때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일할 때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핏대를 세우던 사람들이 정말로 섬김의 궁극적인 동기인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잠에 빠져들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배에 열심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러 직분에서 섬기는 것은 정말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땀, 목숨을 바친 헌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아무 것도 섬기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영혼이 죽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자기를 드리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예수님께 하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와서 죽으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지 않게 만드는 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이 없는 삶은 결국 무위도식하는 삶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가 깨드려지고 진리의 말씀 앞에 책망을 받으며 곧은 목을 숙이고 마음을 녹이는 은혜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직분을 맡아 일하면서도 분란을 일으키고 서로 미워하게 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동기에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주님이 일을 맡기실 때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권리가 있다면 기쁨으로 종노릇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원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내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임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발견은 없습니다. 결국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참된 경배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거액의 헌금이 아니더라도 동전 몇 푼의 헌금은 주님을 향한 최고의 섬김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아무것도 섬기지 않고 제 멋대로 살아갈 때에는 쓰레기 같은 인격을 가졌던 사람이 놀랍게 변화되어 고난 속에 주님을 섬기고나니 정말 아름다운 인격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아닙니다. 올바른 원리에 따라 주님을 위해 일하게 되면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은 일로 생각하면 내 힘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일을 행하는 진정한 마음의 동기와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그 심령의 질까지 생각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은혜를 전심으로 구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일이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이 계기가 되어 매달리는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고치고 변화시키게됩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이 가지는 영적인 쇄신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법에 의해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도 안하기로 뜻을 세운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의 법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떨며 무능력함을 고백하고 전심으로 의지하며 매달리게 될 때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눈물로 섬기면서 중심으로 일주일을 드린 사람들에게 예배는 일주일 동안 살았던 삶을 농축한 시간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을 깊이 찬양할 때 주님을 섬겼던 일주일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지푸라기와 같아서 주님의지 할 수 밖에 없다는 자각을 가지고 더욱 복음의 선포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Ⅳ. 결론 

우리가 원래 핍박자이며 포행자였으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따라 죄인 중 괴수인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좋은 것들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커다란 감격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삶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섬기는 과정에서 오는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많은 일들을 소화하며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임금을 따라간다면 세상에 영화만을 누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를 따라간다면 우리에게는 미래에 영광에 나타나는 그날까지 멸시와 모욕 그리고 수치 같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경험하며 우리의 삶으로 참된 예배가 되도록 복종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를 통해 주님은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섬기는 것이 없다면 각성하시고 병든 여러분들의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을 고치십시오. 그리고 만약 뿌리 없는 섬김에 취한다면 그만두시고 회개부터 하십시오. 또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데 행동으로 섬기는 습관적인 봉사가 예배 시간에 은혜를 구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우선 마음을 온전히 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십시오. 그렇게 진정한 예배자로 돌아오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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