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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는 사람들 (고후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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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는 사람들 (고후 5:13~16)


우리는 모두 다 자기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부족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공적인 인생을 사셨습니까?    인생을 사시는데, 오늘이 나의 생애 처음 세상에 나온 날처럼, 그리고 오늘이 나의 생애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렇게 최선을 다하여 사셔야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하루도 버릴 날이 없고, 하루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하루를 알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자훈련을 받을 때에 ‘광인론: 당신은 미쳐야 한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성에 미친 사람, 향락에 미친 사람, 도박에 미친 사람, 돈에 미친 사람, 권력에 미친 이들이 있습니다.  “미쳤다”는 말이 너무나 강하고, 듣기에 거북하여 사용하기 꺼리고 있지만, 사실은 신념에 넘치는 사람이요, 몰두하고 몰입할 수 있다는 것으로 좋은 말입니다. 

여러분, 미친 사람을 보셨습니까?   저는 목회하면서 미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미친 사람에게 당신 미쳤다고 하면 자기는 미쳤다고 수궁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가장 정상적인 사람인데, 자기를 몰라준다고 합니다.  처녀가 미쳤는데, 참으로 무서운 힘을 쏟아내 는데, 정말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자기 힘이 아니고, 위에서 주어지는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제자훈련에서 광인론의 요지는 예수에게 미치자는 것이요, 제자훈련에 미치고, 말씀에 미친 사람이 되라는 요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목회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미쳤다는 말을 듣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요, 그쯤 되어야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접어들면서 집안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다니자, 가족들을 예수가 이상해졌다느니, 완전히 돌았다느니, 이젠 미쳤다는 말을 드러내놓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정된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데, 그 기준에 훨씬 넘치거나 모자라면, 이상한 사람, 돌아버린 사람,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자기는 극히 정상이고, 다른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의 초기에 12제자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전도할 것을 명하신 후에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였습니다.  갈릴리의 가버나움의 한 집이었습니다.  

막3:20-21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을로 돌아오셨고, 한 집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가족들이 있었고, 친족들이 있었습니다.  친족들에 대한 자세한 말씀을 하지 않았지만, 친족들이 예수님이 동리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몰려와서 예수님을 붙들고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미쳤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인격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잘못된 열심이라고 딴죽을 걸고, 폄하하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 예수님이 살아가는 모습, 예수님이 가지신 정신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도저히 예수님의 열심을 따를 수 없고,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귀신들렸다, 그것도 귀신의 왕에 들렸다, 바알세불에 들렸다, 사탄에 들렸다는 말로 공격한 것입니다. 

미친 사람의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미친 사람을 들어보라고 하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렘20:9에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신들린 사람이요, 신 지핀 사람의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기 스스로 미쳤다는 말을 하는 사도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해주는 것인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자기 스스로 미쳤다는 말을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미쳤다는 말을 합니다.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은 복음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13)라고 하셨습니다.  

정신이 온전하다는 말은 제정신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미칠 수 있고, 온전한 정신, 제정신 차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총독 베스도라는 사람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유대의 가이사랴 감옥에 2년 동안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의 총독이 주둔하는 해변 도시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사도바울을 심문하였습니다.  바울은 거침없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이 때다 싶어서 간증하였습니다.  

행26:24-25에 보면,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행26:24-25)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사도바울은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복음전파를 위하여 수없는 매를 맞고, 죽을 고생하면서 헌신하고 다녔습니다.  그것이 제정신을 가지고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미쳤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원하십니까?  광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신념이 있습니까? 불타는 정열이 있습니까? 결코 버릴 수 없는 비전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는 미친 사람이요, 그는 세상이 말리지 못할 것입니다. 

제자훈련에 일생 미친 사람이었던 목사님은 미침의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신념+ 정열+비전=미침  이것은 미침의 공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살아가십니까?  인생을 참으로 잘 살았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우리는 단회의 삶을 살아갑니다.  무슨 일에도 미쳐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했는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아는 것도 많고, 팔방미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미쳤다는 말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 가지고 무슨 인생을 잘 살았느니, 못 살았느니 할 것입니까?   무엇 하나는 끝낼 정도로 잘 하였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세기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면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라는 분과, ‘마더 테레사’를 들고 싶습니다.  간디의 이름이 마하트마 간디가 아닙니다.  테레사의 이름이 마더 테레사가 아닙니다.  간디에게는 인도인들이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마하트마”라는 말을 붙이고 간디라고 부릅니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은 테레사를 부를 때 어머니라는 칭호를 붙여 ‘마더’ 테레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고아의 어머니였고, 모든 심령의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인도의 문호 타고르의 방문을 받았을 때에 타고르가 간디를 가리켜“마하트마”라고 칭송한 시 한편을 받았는데,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영혼”이라는 최대의 존경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이슬람교도의 총탄에 쓰러졌을 때, 간디가 없는 인도는 희망이 없다고, 간디와 함께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을 사람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큰 꿈을 갖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가족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조금 더 확대하여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고, 기억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큰 일만 추구하고, 큰 일만 찾아다니지 말고,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멀리 가서 이방 사람들 구원한다고 하는 것도 좋지만, 내 집 근처 다니면서 영혼을 살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원하십니까?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개정판에서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쉬네코”라고 하는데, ‘포위한다’, ‘억압한다’‘강요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둘러싸고 밀어낸다는 것으로, 불가항력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힘에 눌려 그 힘을 밀려 필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사랑의 힘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생에 위대한 능력을 주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힘이란 정말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어느 정도의 사랑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도대체 어떠한 사랑입니까?  사랑에 미친 것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 선교회를 조직하고 가장 중국인으로 살아간 선교사입니다.  선교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인의 옷을 입었고, 중국 사람으로 머리를 깎았고, 중국말을 하고, 한문을 쓰고, 한문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일생 중국인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선교사들을 면접합니다.  해외로 나갈 선교사들을 면접합니다.  “왜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나섰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선교사로 나가게 되면 핍박을 받기도 하고, 또 죽을는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가진 그런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는 낙심하게 되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이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졌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갚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에 붙잡혔다는 생각에 가득차고,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만이 최선의 삶이요, 우리가 무엇을 하여도 주님의 사랑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제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야겠습니다. 

사랑의 포로가 되면, 다 좋아 보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그 집의 허물이 보입니다.  내가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는 진정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얼굴만 사랑한 것이요, 그의 몸매만 사랑한 것이요, 그의 미소만 사랑한 것입니다.   

한 청년이 처녀를 만났습니다.   교회에서 만났는데, 여자가 교회를 봉사하는데, 잘 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어른들에게 인사도 잘 하고 교회의 어려운 일은 도맡아 잘 합니다.  그래서 이런 여자를 놓치면 안 된다 싶어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의 집안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정말로 힘들게 살고 있었지만, 여자의 집안을 보니, 여자의 집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느 하나도 도움이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여자를 사랑하고 보니, 그의 어머니도 좋아 보이고, 혼자되어 어렵게 살고 있는 언니 되시는 분도 좋아 보이고, 병들어 누워계시는 여자의 아버지도 존경스럽고, 그의 여러 형제들도 그런대로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처갓집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다 볼만 합니다.  

14-1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요, 성숙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여도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보다 모두의 유익을 생각하며 더 큰 유익을 가져오기 위하여,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한 사람, 절제의 사람, 인내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6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해석이 필요한 구절입니다.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좀 어려운 번역입니다. 새번역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을 따라”라고 했는데, “육신의 잣대로”라고 했습니다. 좀 더 명확해집니다.  공동번역개정판에는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표준으로” 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일치시키려고 힘썼습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 서 자신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청년 때에 가장 많이 암송하던 성경구절은 롬14:8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확정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동참해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의 자서전을 읽다보니, 마더 테레사 수녀가 전 세계를 대표하는 수많은 대통령, 수상, 국왕들이 모이는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석자 모두가 고급 의상과 화려한 보석으로 꾸미고 나왔지만 테레사수녀는 인도 전통 의상인 낡고 단순한 사리를 옷핀으로 고정시키고서 조용히 앉아있었습니다.   모임을 진행하는 사람이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사역하는 마더 테레사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설 끝에 마더 테레사에게, “당신의 임무가 별다른 성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가끔은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더 테레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저에게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선의 임무’를 주신 것이지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성공신화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공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좌절하고 실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공의 가치관이 아니라, 섬김의 가치관, 사랑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단순하게 자선의 임무를 주셨다고 하면 좌절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선에 무슨 실망이 있을 것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실망이 찾아옵니까?  그냥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억만 죄악으로 죽어가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주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미쳤다는 말을 듣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사람,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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