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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와 거듭남, 그 이후 (요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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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와 거듭남, 그 이후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고 입회를 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이런 예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주 복된 일입니다. 본문은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와 대화하시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산헤드린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국회의원입니다. 동시에 그는 한 나라의 종교지도자요 국가지도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 찾아와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님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거듭나는 일을 설명하면서 신앙생활의 순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 

먼저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호흡하고 숨이고 생기이고 영이십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은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흡이 내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어 영에서 떠났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단절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이 영이 다시 내게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고로 나는 하나님과 다시 영적 교제가 시작되고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다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고 거듭남입니다. 신앙생활의 첫 번째 순서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선언하는 일 

세례는 물로 이루어집니다. 물로 씻기고 정결하게 씻어내는 일입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들고 성전에 들어갈 때는 먼저 물로 몸을 씻었습니다. 에세넷파에서는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물로 세례를 행한 후에 받아들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죄사함을 촉구했습니다. 그 말에 순종하고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사람들에게 중생하고 거듭남의 표시로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고넬료 집안에도 세례받기 전에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베드로로 하여금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례는 거듭남의 외적인 표시이고 동시에 공식적인 선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서 물로 세례 받음으로 만인 앞에 이제 나는 죄의 멍에를 쓰지 않고 하나님의 거듭난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입니다. 때로 이 선언이 중요합니다. 결혼식도 하나의 선언입니다. 만인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제 부부가 되었습니다” 하는 선언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언에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죄를 짓지 않고 살겠다는 선포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일과 만인 앞에서 선언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회개를 통하여 

이런 역사는 회개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구원의 길은 거듭남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방법은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면서 처음 경고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 4:17)는 선포였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 필수조건이 회개입니다. 회개 없는 거듭남도 있을 수 없고 회개 없는 천국도 없습니다.  

 회개는 용서받는 길(행 5:31)이고 방법입니다. 용서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깨닫게 되고 죄의 길을 포기하게 됩니다. 회개는 잘못된 길을 가다가 다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만 바꾸는 것이 아니고 180도 삶을 회전하고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회개의 열매는 돌아섬이고 포기이고 청산이고 전환입니다. 변화 없는 뉘우침이나 고백만 있는 회개는 거짓 회개입니다. 사울과 가룟유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뉘우치고 인정하고 후회만 했습니다. 회개는 후회하고 다시 돌아섬입니다. 그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회개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입니다. 그때에 참 믿음이 주어지게 됩니다. 


참 믿음 

믿음에도 참 믿음이 있고 거짓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대부분 믿음이 아닌 것들도 많습니다. 우선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생각”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주관을 믿음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생각이나 내 철학 그리고 내 신조는 믿음이 아니고 내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때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신이나 광신도 믿음”이 아닙니다. 어려움 당할 때 무조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맹신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맹신의 사례가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산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제 이것이 우리의 신이다”하고 경배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맹신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경배했습니다. 순간적으로 믿음의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왜 금송아지가 우리의 하나님인지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몇몇이 하자고 하니까 그냥 따라간 것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광신때문”입니다. 왜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믿음의 결과는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또 “적극적 사고”도 믿음이 아닙니다. 한때 “하면된다”는 말이 진리처럼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적극적 사고를 신봉하는 목회자들도 있어 적극적 사고를 진리인 양 설교를 했습니다. 이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확신이고 신념이고 내 생각일 뿐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누구를 믿으며 무엇을 믿는가를 아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다음과 같은 뜻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는 “알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알기 위해서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55:3)”고 했습니다. 들음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자신이 들은 어떤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들음에서, 들음을 통해서, 구원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 나아갈 때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또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알았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12절을 보면 “나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 믿음은 “신뢰하는 일”입니다. 신뢰는 믿음에 있어서 심장과 같은 것입니다. 몸이 있어도 심장이 뛰지 않으면 죽은 것처럼 신뢰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신뢰는 “상대방을 믿는 것”입니다. “믿고 서로 기대는 삶”입니다. 믿으니까 기대는 것입니다. 친구를 신뢰하면 의지하고 기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알고 믿고 신뢰하게 되면 우리들이 그 주님께 인생 전부를 내 영혼까지 의지하고 기대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뢰입니다. 그때 믿음의 열매가 열리고 결실이 주어지고 믿음의 효과가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동이고 액션입니다.   


행 동 

믿음은 신뢰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고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고 묻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2:17)”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세례 받는 것으로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그 행동은 어디까지나 원리와 기본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히딩크 감독은 원칙에 충실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축구를 4강까지 올려놓았습니다. 원칙이 무너지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발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기본이 약하면 불평을 하게 되고 원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아이들이 철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원망하고 불평하고 타령을 합니다. 기본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한 아이가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왜 돈을 못 벌어서 날 고생하게 하고 무시당하게 하느냐”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오늘 아이들이 이렇게 철이 없습니다. 막무가내 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처음에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막무가내인 아들에게 생각하다 못해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는 너는 왜 박태환이처럼 못되냐.” 아이들은 기본이 약하기 때문에 늘 불평을 하고 감사를 모릅니다. 

비좁은 전철에 무섭게 생긴 아줌마 한분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만만한 여학생 앞으로 가서 큰소리로 “요새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 나이 많은 사람이 서 있으면 자리를 양보해야지”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학생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이 “아줌마가 할머니예요”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아줌마가 더 큰 소리로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냐”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이 여학생이 “그럼 아줌마는 눈을 네모로 뜰 수 있어요”하고 덤벼들었습니다. 요새 아이들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기본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감사도 없고 매사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원리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원리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과 늘 상담하는 삶”입니다. 성령과 언제나 의논하고 상담하고 호소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미래를 지켜주세요,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까요.”하고 물어야 합니다. 상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나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또 인생을 살다보면 갈림길을 만나게 될 때가옵니다. 그때 온갖 고민과 갈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원칙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사 선택은 원리에 충실해서 결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에 충실한 삶입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자유분방한 헬라인이었고 어머니는 경건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디모데가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세속적으로 성공하기를 원했을 것이고 어머니는 아들이 장차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이 두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에 어머니의 문화를 따르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전도자가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원칙을 따라 선택하는 삶입니다.    

 또 변화된 삶의 수칙을 지켜야 합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예수 때문에 손해 볼지라도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원칙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은 또라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라이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또라이들이 많은 사회는 어지럽습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어느 공항에서 손님 한분이 비행시간이 취소되어 낭패를 보았습니다.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카운터에 사정을 해 보았지만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한 중년 신사가 카운터에 가더니 표를 들고 나왔습니다. 어떻게 표를 받았느냐고 물으니까 “간단합니다, 가서 고함치고 욕하고 뒤집어엎고 인터넷에 올리겠다 협박했더니 표를 줍디다, 당신도 한번 해 보라”며 유유히 비행기를 타고 집에 갔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또라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분이 가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나도 저 사람처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인격과 신앙 때문에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조용히 말하니 표를 달라.” 그러니까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공항에서 하룻밤을 새웠습니다. 

여러분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어떤 유형의 삶의 방법을 선택하겠습니까. 인격의 삶, 신앙의 삶은 언제나 성공하고 이득을 주지 않습니다. 때로 이득은커녕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숙한 인격과 신앙인의 삶의 원칙을 지키려는 것은 이득을 위함이 아니고 그것이 올바른 일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세례 받아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기로 서원하고 작정하고 선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원칙을 따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는 또라이처럼 살아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격적으로 신앙기본을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대부분 상처받은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구원받은 삶을 살아가다가 상처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상처가 때로 영광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칠기에는 옻나무 진액이 최고입니다. 매년 6월에서 10월 사이에 왕성해진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체액이 흘러나옵니다. 그것이 옻나무 진액인데 그것을 옻나무 고름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람이나 나무나 상처를 입으면 속에서 고름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름이 치료제로 사용됩니다. 상처를 입어본 사람이 누군가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이라는 설교학자는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미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고 예수의 제자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추호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재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복과 형통을 막 내려 주실 것이라 하는 생각은 도무지 가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형통보다는 상처를 주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름이 나오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고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고 중보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효과적으로 치유하라고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상처도 주시고 시험도 주시고 아픔과 고름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 고름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고쳐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런 각오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세례자이고 그리스도인이고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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