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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출 3: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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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출 3:16~22)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세상 스스로 진행되게 내버려 두었을까요? 아니면 직접 계획하고 인도하길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 개개인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따라 오시길 원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계획하고 살도록 원하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들을 철저히 우리 스스로 계획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춰 계획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2)”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편 32편 8절).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의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니라”(잠16:9).

하나님은 인도하심을 구하는 자에게 세심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사 58:11).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시 37:23).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이상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인생이란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 좋은 것과 더 좋은 것 사이의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항상 여러 길이 열려있습니다. 둘 다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잇습니다. 그러나 한 길 밖에 걸을 수 없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처음은 작은 차이지만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됩니다. 

이럴 때 인간의 지혜와 통찰력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앞길을 알고 인도하시는 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고 앞에 있는 길은 불확실하고, 우리의 통찰력에는 결함이 있고, 우리의 지혜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들을 배치하는 것은 우리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보다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홀로 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16-18)

하나님을 통해 부름을 받고 애굽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지상명령을 받았지만 모세를 선뜻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모세는 민족 해방에 대한 아무런 계획안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입니다. 애굽의 궁중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앞뒤 다 잴 수 있는 지성인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이 80살입니다. 인생의 원숙한 단계에 이른 분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을 이끄는데 아무런 계획 없이 덤빌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 말씀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데는 세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서 자존하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보냈다고 말하면 그들이 모세를 말을 듣고 따르겠느냐는 것입니다. 과거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40년 전에 모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살인자, 도망자가 되어 애굽 왕실의 부귀영화를 다 잃어버린 자가 된 사람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애굽의 왕 바로 앞에 가서 자존하신 여호와께서 보내셨다고 말하며 내 백성을 내어 달라고 하면 순순히 보내주겠냐는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를 죽이려는 바로는 죽었지만 지금의 왕도 마찬가지로 모세에게 결코 동정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이 400여 년 동안 노예로 부렸는데 내어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셋째는 설령 백성들이 모세를 말을 따르고 바로가 출애굽을 허락해 준다고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을 광야로 이끌어 무엇으로 먹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미래에 대한 이러한 근심과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런 질문에 하나님은 한 마디로 말씀합니다. 내가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순종만 하면 내가 내 백성을 인도해 내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도하겠다는 것입니까? 아주 구체적으로 인도에 대한 설계도를 보여주십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로드맵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지혜롭게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인간의 어떤 지혜보다 뛰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의 말을 가장 잘 듣겠습니까? 바로의 말보다는 장로들의 말입니다. 당시 장로들은 한 가문의 어른들로서 추앙받을 만한 재덕을 겸비한 자들입니다(6:14, 25). 체계적 행정 체제가 미비하였던 당 시대에 이들은 백성의 대표자 역할을 폭넓게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민족적 연대의 구심점 역할을 한 분들입니다. 그들이 모세를 따르면 200여만 명이 넘는 백성들은 자연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것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세 하실 것이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장로들이 반응할 것이라고 말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말을 들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모세가 전하는 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품고 있는 첫 번째 문제인 백성들이 자신을 멸시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과 불안을 제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장로들이 들으면 백성을 설득하는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에 당한 것을 생각하고 모세가 백성들에게 먼저 설득하려고 했다면 문제는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세밀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장로들이 모세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장로들과 함께 애굽왕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대표들과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나무 하나면 쉽게 부러집니다. 그러나 여럿이면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홀로 가면 얼마든지 아무도 몰래 처형해 버릴 수 있지만 민족의 대표 장로들과 함께 가면 아무리 포악한 바로도 즉각적으로 처형할 수 없게 됩니다. 대중들의 대대적인 항의를 받을 것이고 국제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다 처형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결코 패권국의 신뢰에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권력자들의 속성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애굽왕 바로에게 이르러 무어라고 말씀하라고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였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게 하소서”라고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야훼)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히브리사람의 하나님(엘로힘)이라고 소개하게 합니다. 최고의 지위를 가지신 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애굽인은 다신교이기 때문에 그에게 거슬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즉각적인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 나가 하나님께 제사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들어 주기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들어 줄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육체적 고통과 노예적 굴욕을 강요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여호와 신앙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괴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구속사를 궁극적으로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다루지 않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도록 3일만 광야로 나가게 해 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속임수가 아닙니다. 전체를 말하지 않고 부분을 말할 따름입니다.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로운 인도 방법을 모세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직접 가지 않고 장로에게 먼저 가서 설득하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로운 인도방법입니다. 
장로들과 함께 바로에게 가서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로운 인도방법입니다. 
바로에게 가서 출애굽하여 해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 나가 제사를 요구하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로운 인도 방법입니다. 

인간의 어떤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는 뛰어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한 결과 어떻게 나타납니까? 애굽의 강력한 압제 하에 신음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일개 초라한 망명객의 말에 순복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4장 31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출 4:31)”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3-36)”

세상을 지으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를 따라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미약한가를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세계인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 최강, 세계 최고의 부가 있는 미국, 최고로 지혜로운 자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의 경제를 이끄는 월가의 중심 그룹들인 리먼 브레드스, 메릴린치 등 투자은행들이 태풍을 만났습니다. AIG 보험회사 등이 사정없이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돈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인간의 탐욕과 부패의 결과로 흔들리는 세계 금융시작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난 방종의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탐욕의 실상을 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세우지 않고 반석위에 세운다고 했습니다. 

자본주의 지혜는 돈은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15)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탁월합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길은 자아 탐구나 수련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나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 자녀를 잘 가르치는 길, 인간이 평안해 지는 길, 가족이 함께 잘 사는 길,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 기업이 잘되는 길, 세상이 함께 춤을 추는 길 얼마나 많은 지혜를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고 인도받기를 원하십니까? 인간이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시 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우리는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19-20)

모세의 두 번째 고민은 완악한 바로의 마음을 어떻게 여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내 주지 않으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립을 소원해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로를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아는 것보다 바로를 더욱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를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까? 사실 지금 바로는 모세가 살인자로 도망 나올 때 바로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은 대를 이러 전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뇌는 어떤 일을 경험할 때 감정을 세 가지로 분류해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유쾌한 감정', '불쾌한 감정', '중립적 감정'입니다. 뇌는 유쾌한 감정은 오래도록 느끼려고 하지만 불쾌한 감정은 아주 싫어해서 피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마음에 '불쾌한 감정이다'라는 빨간불이 들어오면 절대로 그냥 꺼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이 100건이 넘는 연구 보소서를 분석해 본 결과 불쾌한 감성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안 없어지고 온갖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감정을 자식들이 이어받아 대대로 원수 삼는 것이 옛날의 관습니다. 바로는 모세에 대한 적대감이 없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해가 맞으면 이용하지만 이해가 맡지 않으면 버리는 것이 권력자들의 속성인데 애굽의 경제와 사회는 노예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노예의 가치는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와 건축 등에서 무한정한 노동력을 쏟아내었으므로 바로에게는 굉장한 재산입니다. 바로가 보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 드리러 간다고 말해도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 보다 낮은 힘 앞에서는 절대 굴복하지 않을 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도움을 주었습니까? 흉년으로 죽어가는 나라를 살려 놓았습니다. 그 때는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살만하니까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생각하고 은혜를 끼친 백성을 노예로 부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이고, 자신이 법이고, 자신이 절대 권력자인 바로가 순순히 보낼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로는 그 권력이 영원할 것으로 알고 그 권력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권력 중독자입니다. 

데이비드 L. 와이너는 그의 책 [권력중독자]에서 권력중독자는 "외면적으로는 순진하고 따뜻한 성품"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를 보통사람과 구분시켜주는 특성은 "좀더 높은 수준의 지배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종종 도덕이나 윤리, 예의, 상식마저 무시한 채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권력중독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과대 망상적 신념"을 가지고 있고 "역지사지"나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 등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서든지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울 방도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고 합니다. 

권력중독자는 독특한 견해 내지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도전받거나 침범당할 경우 현실에 대해 맹목적이고 사나우며 포악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권력 욕구가 극단적으로 높은 상태의 사람은 강렬한 욕망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심각한 사람들은 으름장을 놓고 무례한 태도를 취하거나 괴로움을 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아돌프 히틀러, 폴 포트, 요시프 스탈린,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처럼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대상은 누구든 무엇이든 무자비하게 제거해버린다고 합니다. 바로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순수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줄 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최고인줄 알고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조금만 힘을 가지면 안하무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요즈음 세계적인 기업이라고 힘자랑하던 기업들이 순식간에 쓰러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158년 역사의 역사를 가진 리먼이 퇴출되는 데는 불과 2시간 걸리지 않지 않습니까? 20년의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이 그 모든 것을 놓고 떠나는 데는 불과 3분밖에 걸리지 않지 않습니까?

"3일 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잘생기고 체격이 좋은 노예를 3일 동안 왕으로 삼았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3일 천하" 그야말로 짧은 시한 부 왕을 말합니다. 이 3일 동안 "시한부 왕"은 세상에서 좋다는 옷을 다 입어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다 먹어 보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해 본다고 합니다. 3일이 지난 후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3일 천하"를 호령하던 노예 왕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힘은 잠깐입니다. 힘자랑하며 하나님처럼 굴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기업들의 전쟁"에서는 60년 동안 미국의 오토바이 시장, 70%를 석권했던 할리가 일본 회사 혼다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할 정도로 힘을 잃은 이유를 3 C로 진단했습니다. 자기만족(complacenct), 과신(confidence), 오만(conceit)라고 했습니다. 보수 파워도, 관계 파워도, 권력 파워도, 전문 파워도, 강제 파워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권력에 중독된 바로의 속성을 아신 하나님께서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나타내어 재앙을 내리면 그 때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힘으로 보여 주어야 자신보다 더 힘 있는 분이 있음을 알고 보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출애굽기 12장 31절을 보십시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출 12:31-32)” 

피 재앙(7:20), 개구리 재앙(8:6), 이 재앙(8:17), 파리 재앙(8 :21), 악질 재앙(9:3), 독종 재앙(9:10), 우박 재앙(9:23), 메뚜기 재앙(10:13), 암흑 재앙(10:22) 등 9가지 재앙을 내려도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알던 자가 자식이 죽자 교만이 무너집니다. 밤중에 서둘러 보내고 하나님이 축복해야 살 줄 알고 하나님의 축복을 부탁합니다. 다급해 지니까 하나님의 능력에 항복하고 백성들을 내어 보냅니다. 인간은 권력에 대한 의지와 우월함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권력의 화신이 되어 하나님의 권능의 손 강한 손으로 쳐야 포기합니다. 잠언 14:3에는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들어" 구체적으로 초자연적 개입하여야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힘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힘 있으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40년 동안 입법, 사법, 행정권을 잡고 최고의 힘을 가지고 통치했던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하나님께서 골리앗의 강력한 군사적 힘 앞에서도 그를 하나님의 힘으로 인도하여 승리하게 하였습니다. 사울의 폭력적 권력 앞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힘으로 그를 인도하여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려 주었습니다. 노년에 자식이 반역하였을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힘으로 그를 지켜 주셨고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는 시편을 통하여 고백합니다. 

“시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59: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 68:35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시 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는 바로 앞에 서 있는 모세처럼 험난하고 힘든 세상에 서 있지만 힘의 근원이신 우리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 115: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희망의 땅, 젓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일끌어 주실 것입니다. 


3.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21-22)

세 번째 모세의 걱정은 설령 바로가 허락해 준다고 해도 200여만 명이나 되는 이 많은 백성을 어떻게 먹일까라는 돈 문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애굽 사람에게 은혜을 입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를 입힌다는 것입니까?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과 의복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사는 애굽 사람, 종으로 살고 있는 집에서 그 집에 함께 살고 있는 애굽 사람에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녀들을 꾸미라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물건을 마치 착취하는 것처럼 취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노예처럼 비참하게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처럼 당당하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은 착취나 도둑질이 아닙니다. 400여 년 동안 노예 생활하며 정당한 월급을 받고 일한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악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공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3-14)”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약속을 쉽게 어깁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한 것 신실하게 치켜 주시면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출12:3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출 12:35-36)”

그런데 사실 왜 이런 은금이 필요할까요? 광야에서 패션쇼할 일 있습니까? 광야에서 중요한 것은 먹을 것입니다. 은금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모세가 걱정하는 먹는 문제는 광야에서 먹을 것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신신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출25:1절 이하를 보십시오. 성소를 짓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물을 가져 오라고 합니다. 조건은 한 가지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입니다. 

출36장 3절 이하를 보십시오. 자원하여 가져오는 사람이 너무 많음으로 더 가져 오지 말라고 합니다. 결국 성소를 지어 우리 하나님께 제사드리게 합니다. 속죄제를 드리게 합니다. 속건제를 드리게 합니다. 감사제를 드리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부터 약속하신 인류 구원의 언약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신실하게 성취해 주심으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예배를 드리며 용서받고 감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로는 약속한 것을 쉽게 어기지만 우리 하나님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멘으로 고백할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확실하고 분명하시고 꼭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주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참된 안식과 기쁨 나 누리겠네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 폭풍 속에 내 등불 내 노래시라... 평화 내려주신 하나님 나로 고통 받는 자를 위로하게 하소서 나의 평생에 주의 사랑을 전하리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주 나의 주 하나님은 신실하신 주님“

창조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신실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심에 신실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심에 신실하십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실행하심에 신실하십니다. 미래를 계획하면서 이익에 따라 기분에 따라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인간들 의지하지 말고 우리가 변할지라도 끝까지 우리를 믿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민 23:19)”

하나님은 절대 식언치 아니하십니다. 복을 주신다고 하면 복을 주십니다. 벌을 주신다고 하면 벌을 주십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 7:9)”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받듯이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길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인생은 하나의 긴 여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로버트처럼 강제적이 아니라 조건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알게 되리라"(요 7:1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내려갈 수 있고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별력과 판단력을 말살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기계처럼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계시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보여주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시길 원합니다. 분간하기 힘들 때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성령께서는 어떤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 끊임없이 깊은 확신을 주십니다. 자기 정당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합니다. 운명론적 회피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비전을 따라 가게 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는 길로 우리의 환경을 일치시켜 주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주변의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심, 상식 또는 생활의 예절, 명백한 의무를 무시하거나 위배하지 않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 37:4-6)”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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