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3) (롬 12:14~16)

  • 잡초 잡초
  • 241
  • 0

첨부 1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3) (롬 12:14~16)
  

이전에 읽었던 책에서 너무 잘 아는 링컨의 어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40이 되면 자기의 얼굴을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너무 잘 아는 글이었습니다.
이 말이 위대했던 미국의 대통령이 했던 말이었기에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실상 이제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는 어간에 있다 보니 정말로 중요한 삶의 좌표가 되어야 할 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난 아버님 장례식에 교우들이 함께 위로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교우들이 장례식에 참석을 하셔서 상주인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을 처음 보셨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대심방을 하는 어간에 교제를 할 때 교우 한 분이 저에게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을 보는 순간 너무 놀랐다는 것입니다. 형님들의 얼굴 자체가 거의 조폭 수준이었는데 그 형제의 피에서 목사님이 나왔습니까? 정말로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순간, 이 말을 듣고 웃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울어야 하는지 한참 동안 갈등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에 그 교우에게 이렇게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집이 외탁을 많이 했는데 어머니를 닮아서 치아 상태가 좋지를 않습니다. 형님들이 치아를 교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틀니를 했는데 그 틀니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얼굴이 많이 주저앉아 그렇지 원래는 괜찮은 얼굴이었습니다.”

진실을 말하면서도 땀을 뺏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감사한 것은 그래도 담임목사의 얼굴은 목사로 봐주는 것 같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삶의 흔적이 배어 있다는 어떤 현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하더라도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이 번쩍 들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우리들의 얼굴에 그리스도인이라는 흔적이 보여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갈 6: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흔적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흔적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면 한 가지 분명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2주 전부터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의 제목을 갖고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복습합니다.

① 거짓 없는 사랑을 행하라
② 형제 사랑을 먼저 하라
③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라
④ 도무지 절망하지 말라
⑤ 이기적인 삶을 이타적인 삶으로 바꾸라  

이러한 삶을 사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또 다른 두 가지의 이어지는 삶의 태도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6. 저주하는 인생이 아니라 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바울이 아주 간결한 문구로 정리한 이 말씀이 얼마나 부담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문자적으로 그대로 읽어보면 이 말처럼 귀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나에게 적용할 때부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이 적용될 때는 너무 귀한 말씀이라고 아멘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나에게 적용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갈등에 사로잡힙니다.
마 5:44절을 아십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합니까?
어떻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축복을 빌라는 것입니까?
저주를 해도 시원치 않은 인간인데 그를 축복하라는 이게 어디 될 법한 말입니까?

그런데 본문은 내 마음을 통타하고 있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있는 여지도 넘겨놓지 않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설교를 하는 목사인 저도 사실은 이 말씀 선포에 대한 상당한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주님이 명령하셔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수 없는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 부분이 고민이 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말씀에 대한 정말로 엄청난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격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보면 만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 21:24절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주님의 엄위하신 이 율법의 말씀은 누구에게 준 말씀입니까?
타인에게 눈의 상처를 준 사람, 이의 상처를 준 사람, 손의 상처를 사람, 그리고 발의 상처를 입힌 자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육체적인 피해를 입히지 말라는 경고성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 주님이 이 말씀을 뒤집어엎으십니다.
마 5:38-42절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은 율법을 정면으로 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잘못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수여 대상은 이번에는 피해를 준 사람이 아니라 피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방법으로 오늘 본문을 해석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 14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교우들에게 묻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저주하는 자에게 준 말씀일까요? 아니면 축복하는 자에게 준 말씀일까요?

조금만 깊이 생각을 하면 충분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정답은 당연히 저주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저주를 당하고 있고 박해를 당하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왜 당하는 자에게 축복하라는 말씀을 또 주셨습니까?

엄청난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저주하는 자의 인생은 자기가 계속 저주를 받는 인생이지만 축복하는 자는 자기가 계속하여 축복을 받는 인생이 된다는 은혜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목회를 하는 동안에 현실적으로, 피부로 체감한 산 사람입니다.
제가 너무 잘 아는 신실한 권사님이 한 분 있습니다.
그 분은 새벽에 나오면 한동안 기도를 하시는 기도의 어머니입니다.

그 분의 기도의 특징은 중보기도입니다.
정말로 그분은 타고난 중보자입니다.
그 분의 기도의 대부분은 잘 알고 있는 지인들을 위하여 축복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식들이나 식솔들을 위해서 전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분의 기도는 축복 중보기도가 주류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 분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배웠습니다.
도대체 자식들을 위한 기도보다 타인을 위하여 축복하며 중보 하는 기도를 더 많이 하시는데 그 분의 자녀들이 너무나 잘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그 분의 자녀들을 드라마처럼 인도하시는 은혜 가운데 철저하게 간섭하셔서 범사에 승리하는 보고를 드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과 교제하면서 들은 이야기는 목회를 하는 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권사님, 남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힘드시지 않아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두 가지 때문에 힘이 든 것이 아니라 신이 나는데요. 하나는 내가 축복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여 축복된 삶을 보게 되어 기쁘고, 또 하나는 마음에 합하지 않아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게 응답하시지 않는 축복은 나에게 오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인 고백입니까?
나는 우리 교우들도 이런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명의 권사님을 압니다.
이 사람은 정 반대의 사람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목사에게든, 다른 교인에게든 자기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이 교회에서 생기면 그는 영락없이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기도 바쁜데 사악한 어둠의 영에 붙들려 새벽마다 기도하는 내용이 저주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저주 기도의 결과가 무섭습니다.
그 권사님의 심령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피폐합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식구 중에 한명은 횡령 사건으로 형사적인 책임을 지고 구속이 되고 남편과 아들의 심령은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영적인 황량함에서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구입한 아파트에 먼저 들어가면 2년 내에 식구 중에 한 명이 죽는다고 하여 그 집을 세를 주고 2년이 지난 뒤에 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영적인 사망의 삶을 살면서도 더욱 비극적인 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가 행한 일들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는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저주하는 인생이 아니라 축복하는 인생이 되어야함은 수없이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는 일이 정말로 어렵습니다.
문자적으로 그대로 실행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만은 명심하십시다.
나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자라 할지라도 저주하는 삶을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영에 이끌려 가능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5:10-12절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하는 영적인 도전입니다.
  

7. 이웃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바울의 선포는 깊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찌 보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또 가슴을 쥐어짜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입니다.

왜 이 선포에 가슴을 쥐어짜야 합니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아픔을 함께 하며 함께 우는 것은 정말로 어느 정도의 기본적이고 영적이고 윤리적인 소양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웃과 성도들이 잘 되는 일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스승이었던 크리소스톰이 이렇게 일찍이 갈파했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보다 쉽다. 왜냐하면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매한 인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인 가인인 동생인 아벨을 죽인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는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동생이 잘 되는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웃이 잘 되는 것에 대하여 함께 웃어주고 축하해 주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죄악일 수 있습니다.
어떤 죄일까요?
이기주의라는 죄입니다.

인간을 가장 영적으로 피폐하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입니다.
울어줄 일이 있음에도 함께 울지 않는 것,
웃어 줄 일이 있음에도 함께 웃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길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이 이것을 통쾌하게 알려줍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무엇입니까?
내려오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을 뽑으라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이라고 서슴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요 1:1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이렇게 주석을 했습니다.

빌 2: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내려오지 않으셨다면’의 가정은 우리들을 끔찍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내려오셨기에’의 은혜는 우리들에게 무한 감사의 조건으로 다가옵니다.
이웃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로 내려갈 때 가능합니다.  

일전에 주일학교 설교를 할 때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농촌에 아주 마음씨가 착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농부는 아름답고 신앙심까지 좋은 아내와 착한 아들, 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농부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농부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높으신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이 농부의 아내와 자녀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로 향했습니다.

농부는 홀로 집에 남아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농부가 책을 읽고 있는데 어디선가 탁탁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농부의 집은 위아래의 서랍식으로 되어 있는 유리 창문이었는데 추위를 피해서 새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자꾸만 닫혀 있는 유리에 부딪쳐서 미끌어 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농부는 창문의 반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새가 들어올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는 이번에 열려 있는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닫혀 있는 유리창 윗부분에 와서 부딪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쓰러움이 더 생긴 이 농부는 또 다른 고민 끝에 이번에 열려진 공간 턱에 새 먹잇감을 올려놓았습니다.
먹이를 먹다가 들어오게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매일반이었습니다.

이제는 안타까움이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저 새는 머리가 돌이라고 푸념을 하면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다가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창문의 턱으로 올라가 새의 모양을 하고 앉아 있다가 뛰어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박수를 치고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는 창문턱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새의 Gesture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방 안으로 새처럼 뛰어 내렸습니다.
이제 새가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새가 자신이 했던 방식으로 창문턱에 앉아 있다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농부는 깨달았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렇게 비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주 오래 전에 우연히 성공회 미사에 참석했다가 그 날 신부님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이웃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선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려면 나는 내려가는 겸손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네, 그리스도인입니다. 라고 확실하게 대답하는 우리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또 묻겠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인 것을 증명하시겠습니까?

구원파의 상투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구원의 교리적인 증거를 대라고 말하는 것이 구원파의 공격루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확신은 교리에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삶에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 지체들이 삶에서 축복하는 삶으로, 그리고 이웃들과 선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