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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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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의 복 (마 5:9)


여러분!  
만약 누가 우리 삶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여러분들에게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많습니다.  꽃도 아름답고, 갓난아기의 순결하고 해맑은 모습도 아름답고, 부모로써 자식 사랑하는 마음도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 아름다움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귀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조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화라고 하니까 놀라실 분들도 있는 거 같은데 사람들이 만든 꽃이 아니고 이것, 저것이 서로 모순됨이 없이 잘 어울리는 상태를 두고 조화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조화가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 아가씨들이 자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누구를 만날 때든지 동행할 때 보면 자기보다 못생긴 친구들을 끼고 동행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래서 자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려고 하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조화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서로가 그 모양과 개성은 각각 다르지만 서로가 모순됨이 없이 잘 어울릴 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그 배경과 어울리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주일날 교회마다 귀한 성가대원들이 찬양을 부릅니다.  이 찬양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찬양이 아름다운 것은 여러 대원들이 서로 목소리는 다르지만 다만 한 가지 소프라노와 알토와 테너와 베이스가 찬양을 부를 때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면서 하모니를 이루니까 아름다운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어느 꾀꼬리 같은 목소리 하나 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가 아닌 다수가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이런 아름다움이 나타나게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나타나고,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나타나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답게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도 이 말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결코 화평치 못하기 때문에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갈등과 다툼의 역사는 인류 역사만큼 기~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 사랑하는 부부간의 갈등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이념분쟁, 민족분쟁, 영토분쟁, 종교분쟁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갈등의 역사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원래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그야말로 해와 달과 별들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세상이었었는데 어느 날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사단이가 뿌려 놓은 탐욕과 세상유혹에 넘어간 뒤로 인류의 역사는 겉잡을 수없이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느 면으로 보나 결코 화평치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불화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첫째: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

갈등과 분쟁의 원인은 지극히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문제가 야기 됩니다.  나 혼자라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항상 나와 너란 존재가 대립될 때 문제가 됩니다.  서로 가치관과 목표가 다르고 관심과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관계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일어날 수 있는 문제가 갈등과 분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곁에 하와를 지으신 것은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돕는 배필”로 지어주신 관계인데 그것이 엇나가 버리니까 싸우게 되는 겁니다.  
아내의 생각이 다르고 남편의 생각이 다르고 부모의 생각이 다르고 자녀의 생각이 다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낳고 키웠지만 사실 부모자식간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가까운 한 가족도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이 세상은 어떻겠습니까?  오죽하면 요즈음 이것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항간에 나온 드라마가 있는데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저자는 남녀가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다른 별나라에서 온 것처럼 서로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우리네 이야기를 잘 묘사한 드라마입니다.  

사람들마다 성품과 성격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결코 나쁘거나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대가 나와 같지 않으면 용납하려들지 않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선을 긋고 다르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너도 나처럼 생각해라.  나처럼 생활태도를 가져라.  나처럼 가치관을 가져라.” 상대방에게 획일화된 삶을 강요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남들과 부닥치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속상해하고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싸우기도 하고 분노하면서 남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미워하면서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결코 화평치가 않습니다.  서로 상호간에 용납이 되지 못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입장과 너의 입장이 다르지만 함께 공존하는 세상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바로 조화라는 것입니다.  조화만큼 아름다운 것이 세상 또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지남철(magnetic) 아시죠?  우리는 지남철의 원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지남철의 원리는 이쪽과 저쪽 끝이 서로 다른 S극과 N극으로 전혀 성질이 다릅니다.  다르지만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상하죠?  다르지만 서로 합치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힘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불 일 듯 일어나야만 하겠습니다.  아멘

우리 주님은 이 지남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극치죠?  
우리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데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몸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둘째: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이라는 것.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탐심이 나쁜 건가요?  전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탐심이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이상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이것 없으면 노력도 안하려고 할 겁니다.  이것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꿈을 이루며 살죠.  이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탐욕도 과하면 문제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구의 땅덩어리와 자원은 제한되어 있는데 사람마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과욕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됩니다.  

올해 원유 값이 배럴당 100달러 가까이 치솟으면서 에너지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석유 전쟁은 곧 자원 전쟁이고 에너지 전쟁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유국이 아니기 때문에 석유 문제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영토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 간에도 독도 문제로 하루도 편 할 날이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고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문제 만해도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금 밤마다 이 문제로 촛불 시위 하느라 보통 난리가 아닙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자기 목소리 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어느 한 구석 조용한 곳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 기업인들과 노조원들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들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 이권과 권리를 찾아 먹겠다고 데모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데 과연 이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상입니까?

성경에도 인간의 갈등과 다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13장)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같은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갈대와 우르를 떠나온 두 가정이 어느 덧 대 가족이 되다 보니까,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하인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일이 잦았습니다.  서로 함께 살기에는 땅이 너무 비좁고 협소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런 제한을 합니다. 

창 13:8-9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 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삼촌이 조카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것입니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할 것이고 혹이 네가 좌하면 난 우 하리라고 하면서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롯은 얼씨구나!  하면서 사방을 둘러봅니다.  그때 만해도 소돔과 고모라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아서 앞뒤 안 가리고 기름진 쪽을 소돔과 고모라 쪽을 선택 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선택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 다툼도 의 상할 일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나누어서 새로운 땅으로 삶을 개척해서 분쟁의 소지를 끝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욕심 부리지 아니하고 손해 보는 길을 택했어도 이를 복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양치는 목자인지라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파면 그랄 목자들이 와서 시비를 겁니다.  그러면 아무 소리 안하고 내 줍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 또 우물을 팝니다.  그러면 또 그들이 와서 시비를 겁니다.  그러기를 여러 번 우물문제로 인해서 시비를 걸어왔지만 그 때마다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축복은 누가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지는 게 이기는 겁니다.  아멘


문제는 탐욕이 문제입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세상 적으로 붙잡은 거 있으면 놓으세요.  세상적인 탐욕을 버리면 하나님은 그보다 더한 신령한 복으로 채워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세상적인 탐욕을 버림으로 누렸던 귀한 축복을 여러분들도 누리시게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합니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화평하기만을 원하지 않으시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을 원하시고 계시다는 겁니다.  피동적인 자가 아니라 주동적인 자가 되라는 것이죠.  
부모가 늘 자식에게 그러죠?  나가서 싸우지 말고 지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싸우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싸우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저는 오늘 본문과 성경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본문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셋째: 성경적 평화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평화라고 말하면 단순히 갈등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담겨있는 말씀들을 보면 끊임없이 전쟁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도 있었고 블레셋과의 전쟁이야기 그 외에 수많은 전쟁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 속에 평강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악에 대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40일 금식하신 후에 마귀와 싸우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들이시냐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이라고 하는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 없고 싸우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그치고 단순한 휴전상태의 평화가 아닙니다.  악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싸우다가도 상대가 안 되면 싸움을 끝내고 와서 늘 하는 말이 있죠?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한다고들 합니다.  안하는 게 평홥니까?  평화는 타협도 아니고 휴전 상태도 아닙니다.   

성경적인 평화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치르더라도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문제를 피하거나 타협하거 안주하는 평화가 아니라 문제를 정복하고 악을 이겨서 정복하는 평화입니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어떠한 평화를 얻어야 할까요?  다윗은 늘 쫓김을 당하면서도 평강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울에게 쫓겨 가면서도 마음의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평화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을 해하려는 사울이 하나님의 손에서 제거되는 것을 보고 예비한 나라로 돌아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슨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투려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의식하지 말고 나와 함께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대적하며 공격하는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며 담대하게 서 있어야 모든 싸움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시 56: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가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다윗은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교만한 자들과 다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싸움을 이기는 지혜인 것입니다.  
원수를 탓하려 하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으려들지 말고, 오히려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스데반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듯이 기도하면 마음의 참 평강의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 홀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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