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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내 평생에 부를 노래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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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 부를 노래 (시 23:1~6)


[여러분 인생의 최고 자산은? 내 인생 최고의 자산은?]

제 인생에는, 세상에 그 어떤 값진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매우 소중한 자산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그 엄청난 축복을 부모님과 집안의 윗대 어른들을 통해 주셨습니다. 만일, 제 부모님과 어른들께서 예수 믿지 않으셨더라면, 제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상대적인 안정지수는 훨씬 낮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예수 믿게 되는 것보다, 불신 가정에서 첫 믿음의 개척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컸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기적이요 제 인생 최고의 자산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하나님 없는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만 해도 그냥 아득해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제가 받은 이 엄청난 인생의 축복을, 다시 한 번 갑절의 복으로 부어주셨습니다. 목사는 아니지만 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열정과 믿음을 가진 아내를 주심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갑절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아내를 주심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갑절의 복입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내 인생의 진정한 복은 무엇일까?]

용서하고 들어주십시오(저는 시편 23편을 제 인생의 걸음걸이에 비교해서, 적용해보았습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이고, 감사이며, 노래이고, 신앙입니다. 바람이라면 이 시가 다윗의 것만이 아니라 저의 것이 되고, 또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것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편 23편이 그저 3,000년 전에 다윗이 노래한 노래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무익한 말씀일 뿐입니다. 이 말씀의 고백이 나의 노래가 되고, 감사가 되고, 고백이 되고,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시면서, 나에게도 이 노래가 있는지 보셔야 할 것입니다. 

20여 년 전, 여러분의 인생을 한 번 회상해보십시오(20년이라는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15년 前도/ 혹은 10년 전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20여 년 뒤의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지, 자신의 인생을 Design해 보시기 바랍니다. 20년을 내다보기엔, 이미 너무 많은 인생을 사셨습니까? 그러시다면 남은 인생을 가늠해보시면서, 내 인생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곰곰이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내가 추구하였던 인생의 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지금도 변함없는 내 인생의 진정한 福이었다는 확신에는 조금도 의심 없으십니까? 그렇잖으면, 내 인생의 복을 다시 찾으셔야 하는지요? 이대로도 그냥 좋으십니까? 


[나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복]

지나온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서, 제 인생을 돌아봅니다. 20여 년 전만 돌아보아도 정말 저는 그 때, 가진 것이라곤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이것저것을 누리기도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그저 사용하고 있는 것뿐이지, 제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랄 때, 저는 배불리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못한 것이 아니라). 동생들을 많이 거느리다보니 맏이로서 음식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우리 어머니께서 보시기에 뭘 잘 먹지 않는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어머니께서 입버릇처럼 “우리 집 큰 놈은 입이 짜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들도 저를 아는 사람들도, 정말 제가 입짜른 사람인 줄로만 압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0여 명 학생 중에 번호가 52(3,4)번 했는데, 몸무게가 겨우 27kg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큰 아이를 낳았을 때, 분유나 이유식 사 먹일 형편이 못 되어서, 엄마 젖을 13개월이나 먹였습니다. 요즘 멜라민 분유 때문에 걱정이 많은 데, 분유 한 통 사보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하지 않습니까? 기적 같지만, 아이들이 아파서 단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하거나 가본 적이 없습니다. 집 사람이 큰 아이 가졌을 때, 9개월 될 때까지 산부인과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해산을 앞두고 산부인과 갔더니 선생님이 “무슨 배짱으로 이제 왔느냐면서 야단하셨지만, 다행이 다 정상입니다”하시던 말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약혼식 때 받은 18금반지를 전당포에(제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맡기고 받은 돈 3만원으로 책을 사보고는, 기한 내 돈을 갚지 못해서 결국 그 반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두 교회에서 8년간 부목사로 사역할 때, 예전보다는 경제적으로 나아졌지만, 넉넉하지 못한 것은 매 한 가지였습니다. 그 때, 기억으로는 사례비 받고 (쬐끔 과장하면) 한 주간만 지나면, 먹고 사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의 쓸 여유 돈이 없을 만큼 힘들게 살았습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버티는 생활을 했습니다. 

37되던 해에 첫 담임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사택이 너무 넓었습니다. 50평 조금 못되는 아파트였는데(화장실도 두 개?, 살림도 없는데 집이 너무 넓어서 운동장 같았습니다. 다리가 다 아팠습니다. 적응이 안 되어서, 교회 가까운 자그마한 빌라로 옮겨 걸어 다니면서 목회했습니다. 집은 좁았지만 그게 더 좋았습니다(그 때까지 계산해보니, 결혼 후 이사를 무려 10번이나 했음, 햇수로 치면 1년에 한 번씩 이사한 셈). 7년 전 2001년 10월 7일에, 남산에 있는 숭의여자대학에서 세 목사가 높은뜻 숭의교회를 공동개척하였을 때, 숭의교회에서 당회결의로 처음으로, 팀목회하는 세 목사에게 각각 사택을 교회소유가 아닌 개인명의 소유로 하는 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었습니다(한국교회 최초가 아닐까). 

교회에서 세 목사에게 그 때 돈으로 1억 7천만 원씩 무이자로 빌려주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각자의 형편대로 아파트를 개인소유로 사서, 각자가 대출금과 교회의 무이자지원금을 상환하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목사가 자기 명의로 구입한 집을 가지기 위해서, 대출금을 상환하면서 생활한다는 것(국민들이 살아가는 지극히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나아가 목회생활과 영성생활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 악성 글들로 교계의 큰 파장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예산공동의회 이후, 높은뜻 숭의교회는 세 목사에게 사택도 개인소유의 주택으로 제공해 주었다는 둥, 사실이 아니지만 목사들의 연봉이 억대 연봉이라는 둥의 인터넷 악성 글들로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어 교계의 빅뉴스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우 중 각계전문가들로 Task Force Team을 구성해서, 연구결과대로 시행하기로 하고, 결국 사택정책을 예전과 같이 교회소유의 집으로 교회가 제공하는 것으로 환원하게 되었습니다(개인명의의 집을 팔고, 무이자로 준 돈과 은행대출금을 갚음). 받고 있던 사례비도, 삭감되는 조치가 취해졌습니다(기준을 숭의여대교수 2/3). 소유하고 있던 아파트를 팔면서, 사택을 옮기게 되었는데 둘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2달 만에 전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불가피하게 전학하면서 사춘기시절(내성적인 아이에게), 적잖은 아픔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산 제 삶의 복이 무엇일까요? 예전보다 나아진 사례비였을까요? 개인명의의 아파트 소유였을까요? 제 지나간 목회생활을 돌아보건대, 그런 것이 저와 우리 가정의 복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시 그것이 복 인줄 알고, 제 20년 과거 인생을 돌이켜 다시 그런 과정을 겪으라고 한다면 저는 거절하겠습니다. 분명한 제 고백은 다윗의 노래처럼,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므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이 말씀 외에는 제 복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족함 없음의 고백은, 환경에 있지 않음]

저는 제가 목사로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변함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저와는 생각이 다른 분도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목회자는 사례비가 많든 적든, 교회가 주는 사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 목회자가 생활비문제로, 교회가 주는 사례비 이외의 다른 수입원을 가지는 것은, 목회생활에 그다지 유익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족함 없음의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부족함 없음의 문제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냐?에 있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고백만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답입니다. 백만장자라고 해서, 그 인생이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더 긴 말씀이 필요치 않지 않습니까?

미국의 최대부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하워드 휴즈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죽을 때 영양실조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우리에게 示唆하는 바가 큽니다. “Nothing. Nothing.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 말을 반복하면서 영양실조상태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에게 돈도, 미녀도, 부도, 명예도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미국 월가의 금융위기로 시작된 전세계 경제환경은, 말 그대로 위기입니다. 여건이 어려워지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 끝이 언제일지 누구도 예건못합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신문을 펼치기가 무섭게 연일, 환율폭등 주가폭락이 주요뉴스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시작된 오늘의 금융위기가 만일 터지지 않았더라면, 세계 경제는 더 큰 재앙을 맞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금 터진 것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융위기의 핵심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경제적인 환경에만 인생의 전부를 걸고 산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지나친 물질지향적인 삶의 태도, 가치 때문에, 사람들의 그릇된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서 앞장서서 총대를 맨 사람들이 미국의 월가의 금융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교묘한 금융기법으로, 사람들이 자기의 실력(능력)보다 훨씬 더 큰 몸집을 만들게 했습니다. 금융거품을 만든 것이지요. 뻥튀기를 해도, 너무 심하게 해서, 무조건 크게크게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커진 경제규모에 감탄했고, 그들을 좇아가기에 바빴습니다. 그것이 오래갈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거품은 꺼지게 되어 있고, 뻥튀기한 것은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속고, 온 세계를 금융위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만 것입니다. 집값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걱정들입니다. 사실은, 집값이 터무니없이 너무 비쌌던 것이지요.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지금의 위기는, 21세기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은총의 기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다 무너지고 만다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이 경고를, 절망과 탄식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목자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목자되시므로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리는, 형통함의 씨실과 곤고함의 날실로 촘촘히 짜여져 있음]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 7, 13이하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다윗의 노래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시므로 부족함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그의 삶의 자리가 어떻습니까? 형통함만 있지 않습니다. 곤고함도 있습니다. 형통함과 곤고함이, 아주 조밀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푸른 풀밭에 누이기도 하셨습니다.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목자 되시는 다윗의 삶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었습니다.󰡔사망의 음침한 골짜기(히, 찰마웨트)󰡕는, 광산갱도의 암흑을 말합니다.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지하갱도, 산소공급도 원활치 않는 곳입니다. 죽은 자가 거하는 어두운 곳입니다. 이와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목자 되시므로 부족함 없다고 고백한 다윗이 다닌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 되시는 사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닙니다. 다른 것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입니다. 심지어, 원수의 目前에까지 앉기도 합니다. 원수의 목전이 어떤 자리입니까? 위기의 자리입니다. 죽음의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도 하나님이 목자 되신 다윗이 걸었던 삶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통함과 곤고함의 길을 걸었던 다윗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6절 말씀 보십시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 반드시라는 말씀은, 형통함만 있다는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곤고함도 있는데, 그러나 그 결국은 하나님의 선하심이고 인자하심이라는 고백 아닙니까? 사도바울의 증언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28). 아멘. 

그렇습니다! 다윗의 감사, 노래의 이유는 환경이 아닙니다. 형통함만이 아닙니다. 그의 노래에는, 형통함과 곤고함이라는 씨실과 날실이 엮어진 인생 속에 계시는 목자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그의 평생에 선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셨다는 고백입니다. 

찬송가 495장처럼,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멘.

형통함의 씨실과 곤고함의 날실로 조밀하게 짜여진 내 인생이지만,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므로,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이 노래와 감사가 우리 모두의 추수감사절의 노래와 감사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 하나님 아버지, 추수감사주일에 우리 인생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형통함도 있고 곤고함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임을 믿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내 인생의 복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정과 교회와 온 세계가 복 되신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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