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대상 15:11~15)

  • 잡초 잡초
  • 333
  • 0

첨부 1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대상 15:11~15)


오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을 두 번째로 시도한 사실을 전하는 기록의 일부입니다. 왜 두 번째입니까?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를 끌던 소들이 갑자기 뛰는 바람에 수레를 몰던 사람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그 자리에서 죽자 다윗이 두려워하며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는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기를 중단했기 때문입니다(삼하6:1-10). 그러면 두 번째 시도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성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궤가 두 번의 시도 끝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일은 이미 삼하6:1-14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같은 사실을 역대기는 다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전하는 두 기록 사이에서 우리는 의미 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장에서는 다윗이 웃사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의 궤 옮기는 일을 중단했었지만 석 달 동안 하나님의 궤를 맡고 있던 가드 사람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하는 말을 들은 다윗이 다시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고 간단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은 다윗이 처음 하나님의 궤를 옮겨올 때 일어난 웃사의 죽음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으며 두 번째로 하나님의 궤를 옮겨올 때의 다윗의 신중함을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먼저 대상13:1에 보면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에는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데 있어서 군대의 지휘관들과 의논하는 것은 필요 없는 일입니다. 다윗이 그 문제를 천부장과 백부장 등 군 지휘관들과 더불어 의논한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데 처음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 데 있어서 다윗이 잘못한 일을 역대기 기자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첫 머리에서 “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부르고 또 레위 사람 우리엘과 아사야와 요엘과 스마야와 엘리엘과 암미나답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한 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두 번째로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는 바르게 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처럼 천부장과 백부장 등 군 지휘관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불러 그들과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을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서 실패했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해서 성공했음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그저 단순히 반복해서 쓰지 않고 쓰라린 실패의 역사를 반성하며 쓴 것입니다. 다윗의 실패의 이유와 성공의 열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치려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불러 한 말이 무엇인지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본문 12-13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다윗의 이 말도 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다윗의 말 속에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 한 첫 번째 시도에서의 자신의 실수나 부주의에 대한 분명한 반성과 깨달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라.” 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옮기는 일에 합당한 준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의 부주의를 인정하는 말입니다. 다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일임을 확실히 가르치려 한 것입니다. 

13절의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번역된 말의 원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원문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을 레위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의미 같기도 하고,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 어깨에 메고 옮기지 않았다는 뜻 같기도 합니다. 그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하나님의 규례대로 행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으셨다.”는 것이 다윗이 내린 결론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는 수레에 실어서 아무나 끌고 갈 것이 아니라 레위인들이 채를 꿰어 어깨에 메고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규례였던 것입니다(민4:4-15). 그 규례 중에는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민4:15)는 경고도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두 번째 옮겨올 때는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세심하고 진지하게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그 당부를 철저히 따랐습니다. 

본문 14-15절을 봅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그리고 그 결과는 다윗뿐 아니라 이스라엘 온 백성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과 축복이었습니다(대상15:25-16:4). 웃사의 죽음이라는 비극이 극복된 것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의 다윗의 과오와 다윗 자신의 반성과 깨달음과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옴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 자신의 경험과 반성을 통해 역대기 기자 자신이 과거 자기 민족의 잘못된 역사를 반성적으로 새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 역대기 기자의 반성적 역사서술의 결론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무슨 일이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의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한 데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라고 한 말이 역대기 기자의 역사관을 대변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이스라엘에게는 평안과 번영과 행복의 역사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이스라엘에게는 재앙과 고난과 오욕의 역사가 닥쳐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했느냐 아니냐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는 역대기 기자의 관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대기 기자의 역사관을 앞서서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죽음과 그의 가문의 몰락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 은 그 마지막 장에서 사울의 죽음을 그저 사실적으로 전하기만 하고 끝나고 있는 데 반해, 은 먼저 사울의 죽음의 전말을 그대로 다시 기술한 후에 그의 죽음의 근본원인을 성찰하고 신학적인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대상10:13-14) 역대기 기자가 판단한 대로의 사울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를 범한 결과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되었던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된 사실과 예루살렘을 쳐서 빼앗은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도 은 와의 차이를 드러내주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했지만 역대기 기자는 에는 없는 말 즉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라는 한 마디 말을 덧붙임으로써 같은 역사서이면서도 역대기가 갖는 독특성을 또 한 번 드러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기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나라를 빼앗기고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눈물과 탄식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백성이 뒤늦게 뼈아프게 깨달은 역사적 교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교훈이란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복을 베푸시는 말씀이든 징벌을 경고하시는 말씀이든 헛되이 주어진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든 주의 깊게 듣고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나 한 민족에게 있어서 역사를 반추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과거를 돌이켜볼 줄 모르거나 과거를 그저 잊어버리는 사람은 현재를 바로 살 수도 미래를 바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중요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교과서 수정에 관한 논의가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해온 좌편향적인 국사교과서를 고쳐 써야 한다는 문제제기를 두고 논쟁이 뜨겁습니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며 무슨 역사관으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이 사회와 나라 전체를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역대기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의 좋은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라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과거나 이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로 살았는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반성적으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삶의 주인이시고 만유와 역사의 주인이시라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혼돈과 불안의 시대에 바로 설 수 있고 바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온통 경제붕괴와 대공황의 위기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각 나라마다 주가와 환율이 심한 널뛰기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미 엄청난 재산손실을 입고 망연자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국가부도를 선언하기에 이른 나라들이 줄지어 에 도움의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는지 때늦은 탄식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그 해결의 길이 있는지, 언제나 이 불안한 상황이 끝날 것인지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모든 문제의 해결의 길은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거기에 회복이 있고 치유가 있으며 거기에서 희망과 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앞이 완전히 캄캄할 때가 참 빛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때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야말로 영원하신 진리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때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너나 할 것 없이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어 근시안적인 탐욕을 추구하며 분수를 모르고 살아온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이 살고 나라가 살고 세계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 모두 이 확신 속에서 희망을 잃지 맙시다. 이 믿음으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모두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