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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 극복 방법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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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극복 방법 (왕상 17:8~16)


1. 불황, 불안, 위기!

성도 여러분, 요즘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많이 어려우시죠? 뭐, 서민들의 삶이 언제는 어렵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아마 요즘 들어 어려움을 더 많이 느끼고 계실 겁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일단 고비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금융 불안 요인이 세계 도처에 늘려 있고, 우리나라 안에도 불안 요인들이 많이 있어서, 언제 어떻게 태풍 급의 금융 및 경제 위기가 올지 전문가들도 예측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불안과 불황의 시대인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지금 우리와 같은 삶의 위기를 만난 한 여인을 발견합니다. 그녀의 위기는 무엇이었으며,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통하여, 이런 불안과 불황의 시대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의 위기

주님 오시기 874년 전(B.C.874),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이스라엘 민족의 북 왕국인 이스라엘에서 아버지 “오므리”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아합”이 왕이 되었고, 그 이후 22년간 통치를 했습니다. 이 아합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유명한데요.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악한 배교자요 타락한 인물로 손꼽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과 33절을 보면, 그를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더욱 악을 행”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처럼 금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과 구원의 역사를 알면서도 외면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또한 아합 왕은 하나님께서 이방사람과의 결혼을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북쪽에 있는 시돈국(國)의 왕인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했습니다. 이 이세벨은 음행과 술수에 뛰어났고, 무엇보다 우상에 심취한, 오늘로 치면 거의 무당 수준의 여자였습니다. 이세벨과 결혼한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신당을 건축했고, 여러 곳에다 아세라 상 등 우상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아합의 모든 행위들은 마치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신앙을 없애버리려고 결심한 사람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이러한 아합의 모든 행동은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연재앙으로 아합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에 보면 하나님은 기근, 즉 가뭄으로 아합과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리고자 선지자 엘리야를 통하여 미리 알리셨고, 그리고 그 시점으로부터 수년 동안, 정확히 3년 6개월 동안(약5:17) 비를 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가뭄은 비만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슬 한 방울조차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아예 땅의 모든 물기 자체를 말려 버리는 전무후무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뭄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주변 모든 지역들까지 포함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재난’이었습니다.

2) 엘리야의 위기

이사야의 예언대로 가뭄이 시작되자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주변 지역 전체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합 왕과 이세벨이 권하는 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자신이 주님의 심판을 예언했지만, 선지자 엘리야 역시 이 엄청난 기근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어려움과 재난과 불황은 어느 한 사람 가리지 않고 겪게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독한 재난 가운데서 성도를 위하여 피할 길을 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우선 엘리야에게 피할 길을 주셨고, 그 다음으로 사르밧의 한 여인에게도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먼저 엘리야를 보실까요? 엘리야는 예언의 말씀을 전한 후, ‘그릿 시냇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머물던 그릿 시냇물(3절)이 말라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위하여 새로운 공궤지(供饋地)를 일러주셨습니다. 그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시돈 국 지역인 ‘사르밧’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엘리야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하필 원수의 나라인 시돈의 사르밧으로 보내신 것과 그것도 과부의 집으로 보내신 것은 놀라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시돈이라는 나라로 보낸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지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우상숭배의 심장부, 즉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세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한 곳에 숨어버린 셈입니다. 마치 바로의 궁전에서 양육 받은 모세처럼 대적의 심장부가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가 된 기막힌 역설인 것이죠(출 2:10).

두 번째로 엘리야가 시돈으로 간 것에 담겨 있는 진리는 시돈의 신인 바알의 무능함을 일깨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시돈은 비와 관련하여 농사에 관한 전부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던 바알신을 숭배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바알신은 신이 아닌 가짜라는 것, 오직 하나님만이 자연과 만물과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이시려는 것이 엘리야를 시돈으로 보내신 이유였습니다. 바알 아니라 바알 할애비라도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인 엘리야를 재난 가운데서 지키시고 돌보셨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그리 하셨고, 시돈의 사르밧에서도 지키셨습니다.


2.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법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엘리야는 선지자니까, 소위 “주님의 종”이니까 특별하게 보호하셨다고 쳐도, 일반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보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의 한 과부에게로 보내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정리해 봅시다. 그릿 시냇가에서 아합과 이세벨의 탄압을 피하고 있던 엘리야는 그릿 시냇물이 말라버리자 하나님의 인도로 바알교의 본산지인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로 갔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남편이 죽고 홀로 남겨진 여인들이 살아갈 방법은 사실 거의 없었습니다.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단순히 한 여성으로서도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다면, 남편 없는 '과부'들은 오죽 했겠습니까? 생계수단이 없어 먹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지독한 가뭄의 때에는 더더욱 살 길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로 빵을 해 먹고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을 땔 나무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고는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렇게 절망 중에 그 삶을 끝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 여인에게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불쌍하고 가난한 이방의 여인,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였기에 그녀를 위하여 엘리야를 그에게 보내셔서 그의 위기를 이기게 하시고, 그 이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로부터 섬김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하여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그 과부에게는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렇게 절망적인 가운데 거하는 것을 지켜보시지 않으며 그들을 그 위기에서 건지시며, 당신의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우리는 이 여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르밧 여인의 입장에서, 그가 어떠했길래 이러한 고난의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명자는 살아남는다! 

사르밧의 이 과부가 그 혹독한 불황과 어려움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 보면,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양식을 먹고 죽을 일만 남은 줄 알았던 사르밧 과부에게는 죽을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작은 어촌 마을인 사르밧의 과부이고, 남편 없이 어린 아들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으며, 어느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녀에게 관심을 두고 계셨고, 그리고 그녀에게 사명까지 주셨다는 말씀이지요. 그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를 공궤하는 일이었습니다. 

9절에 나오는 이 “공궤(供饋)하다”는 말란 말은 '음식을 제공함'(providing with food)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어 '레칼레켈레카'에는 단순한 음식 제공을 넘어서 '정성을 다해 보살핌'의 의미까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르밧의 이 여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자 그녀의 사명은 엘리야라는 한 사역자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엘리야가 사르밧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어떤 메시지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사람인 엘리야가 자신에게 떡을 요구했을 때 그 의미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 사르밧 여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25,26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엄청난 가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 모두 힘들고 어려웠다는 것, 그렇게 힘든 중에 가장 힘이 들었을 과부들은 이 여인 말고도 많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독 이 여인에게 엘리야를 보내신 것은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사명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북돋우어 주고 위기의 때를 안전하고 편하게 피하여 쉴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봐주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황과 재난과 환난을 넘어서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사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생존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사명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존으로 사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떤 집에서 살까? 무슨 차를 탈까?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할까?’ 온통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생존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존'은 인간이 고민해야 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마6:19-34). 반면에 사명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어떤 목적과 목표를 두고서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일을 하겠다’며 아무리 말리고 방해를 하고 고통을 주고 조롱하고 비웃어도, 반드시 그 일을 하고야 마는 사람이 '사명'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땅에 '사명'을 이루라고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사명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뒤집어지는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인천 주안장로교회 나겸일 목사님의 「생명을 건 목회이야기」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님 병명이 간암이래요. 앞으로 3일 이상은 못 산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처음엔 청천벽력인 듯 놀랐다. 그러나 곧 내 마음에는 이상한 평온이 찾아왔다. 순간, 지금의 내 형편이 그리스도의 한 손에 매달려 있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의 다른 한 손이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으니 이제는 주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도 찾아왔다. 

“아버지 하나님, 이 기도가 이 땅에서 드리는 마지막 기도가 될지라도 그 모두가 당신의 뜻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주님의 손에 저의 전부를 맡긴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제 힘으로 살아 보려 바둥거린 적도 많았습니다. … 저는 이제 사나 죽으나 완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이제는 위태로운 불씨가 아닌 주님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될 것입니다.” 

병상에 있을 때 몇 분 장로님께서 나를 방문해 주셨다. 몇 마디 주고받다 보니 갑자기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가 마음속에 차올랐다. 나는 얼른 설교 수첩을 꺼내 메모를 했다. 내 모습을 본 한 장로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곧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님을 뵈니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인이란 죽음 앞에 서 있든 삶 앞에 서 있든, 오늘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뜨겁게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보다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디에 살건 무엇을 하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고, 사명을 위해서 살고, 사명을 위해서 죽을 사람들입니다. “아멘“ 입니까?
이 사명을 다 할 때에 하나님은 그냥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지요. 건강이 필요할 때는 건강을 주시고, 물질이 필요할 때는 물질을 주시고, 도울 자가 필요할 때는 도울 자를 보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며,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고, 위험을 막아주시며, 환난과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어 주시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의 큰 뜻을 기어코 이루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남는다! 

두 번째로 사르밧의 이 과부가 그 혹독한 불황과 어려움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와 오늘 우리에게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임을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시험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절망 가운데 있는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것까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왕상 17:11,15)" 여러분, 이것은 그 여인에게 아주 큰 시험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자기도 지금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게 되었는데, 엘리야는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참 어려운 것을 요구했습니다. “문둥이 콧구녕에서 마늘 빼 먹을 사람”이란 말을 아시지요? 인색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데, 어찌 보면 엘리야의 요구가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지, 정말로 순종하는지 그것을 확인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 사르밧 여인의 놀라운 것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순종한 것입니다. 즉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죽는 것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구나!” 하면서 푸념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종 엘리야를 통하여 명하시는 것에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엘리야에게 행한 대접은 하나님을 향한 그 여인의 마음의 표현이었으며, 이 헌납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아까워하지 않았고 관습으로 하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순수한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환난과 불황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입니다. 아멘! 성도 여러분, 왜 우리는 산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여겨질까요? 왜 우리는 삶의 고비들을 잘 넘어서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요,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교수는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입니다. 그는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교육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를 믿어오던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철학과 수학에 심취하면서 신앙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신앙을 버리고 교회와도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어느 날, 그 지방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외출 중이었던 그는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요. 어디선가 가냘픈 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눈 속에 파묻힌 어느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화이트헤드 교수는 서둘러 눈에 파묻힌 할머니를 구해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화이트헤드에게 거듭 고맙다고 말하면서 물었습니다. "내게 이런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당신은 분명 신앙심이 깊은 분이겠지요?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계십니까?" 화이트헤드는 겸연쩍은 듯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신앙심도 없고요." 그러자 노파는 "아니, 다 늙은 사람이 어쩌자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할머니로 하여금 두려운 죽음 앞에서 큰 확신을 갖고 찬송을 부르게 했을까? 내가 탐구하고 있는 철학이나 수학, 아니 어느 학문이라도 저 할머니가 갖고 있는 저런 확신을 줄 수 없지 않는가?' 그때부터 그는 자기가 탐구해 온 학문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할머니가 가졌던 신앙,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신앙을 다시 찾기 위하여 교회로 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눈 속에 파묻힌 이 할머니가 보여준 신앙이 바로 오늘 사르밧의 여인이 보여준 신앙입니다. 사회적인 악습과 가정적인 불행과 세계적인 궁핍의 때라는 눈 속에 파묻혔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믿음을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그것을 받을 만한 특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르밧 여인은 최악의 상태였지만 특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최선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특별한 믿음을 소유하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면 오늘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와 사업에 풍성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불황과 위기는 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사르밧의 이 과부가 그 혹독한 불황과 어려움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갈 방법도 두 가지이지요. 그것은 첫째 자신의 사명을 확인하여 그 사명을 이루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혹독한 불황과 어려움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저와 여러분의 삶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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