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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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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시는 하나님 (고후 1:1~11)

 
오늘부터 앞으로 몇 개월 동안 고린도후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지난해에 하나님의 말씀 고린도전서를 시작해서 8월까지 다 마쳤는데요.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와 짝을 이루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가 쓰여 지게 된 간단한 배경을 말씀을 드리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보내고 난 다음에 고린도교회 안에 문제가 다 해결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대충 문제는 해결이 되었지만 완벽하게 해결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시간에 고린도전서를 읽었을 때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만찬에 관한 문제, 결혼과 이혼에 관한 문제, 교인들 간에 법정 소송에 관한 문제, 우상제물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 등 이런 갖가지 문제를 사도바울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를 해서 고린도교회 안에 문제가 해결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를 떠나고 난 후에 3년가량이 지난 후 다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해 대충 문제를 수습하고 돌아와 두 번째 편지를 다시 보냈는데, 그 편지는 현재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눈물로 쓴 편지라”이런 것으로 봐서 많은 학자들이 사도바울의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를 사랑의 편지, 눈물의 편지라고 했는데 그 내용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고린도교회 안에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문제냐 하면, 교회 안에 다른 복음! 기독교의 올바른 진리가 아닌 이상한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사도 권, 사도의 권위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행위를 교회 안에서 자행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고 다른 복음의 비 신학적인 내용을 주장하는 내용의 편지가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시기적으로 약 한 5,6 년가량의 기간이 떨어져 있고, 발신지는 서로 다르지만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문제에 대한 사도바울의 글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 고린도후서의 앞부분에서는 사도바울 자신의 사도권에 관한 이야기, 중반부에서는 다른 복음은 무엇이며, 올바른 복음은 무엇인가를 증언을 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사도의 권위에 대한 사도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변증하면서 이 편지를 마감하게 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고린도 후서의 앞부분 서론 부분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흔히 듣고 있는 위로라고 하는 단어로 이 고린도후서를 기록을 합니다. 왜 사도바울이 위로라고 하는 단어로 고린도후서를 시작을 했을까? 우리가 짐작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30여년 가까이 복음을 증언했던 사도바울로서는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과 사도권을 부정하는 이런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사도바울이 굉장히 마음의 고통과 환란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목회자이면서 어려움을 당했던 사도 바울! 그런데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셨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고 목회할 수 있었다고 하는 이 위로의 말을 사도바울이 오늘 증언합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 때문에 이 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항변적으로,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3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먼저 하나님을 규정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3절) 

고린도후서 1장3절에서 11절 가운데 위로라고 하는 단어를 사도바울이 열 번을 사용합니다. 짧은 내용 가운데 위로라고 하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도바울의 의도가 아주 분명히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 세 가지로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부하나님과 성자 아들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예수님에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과 도와주심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나, 우리의 하나님이시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고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나님이 다른 분이 아니라 그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리고 지금 우리를 구원하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규정했던 사도바울이 두 번째 세 번째 하나님을 규정합니다.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하나님을 가리켜 자비의 하나님,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비라는 말을 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허물이 많음 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캐내지 않고 덮어주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지요. 시편 86편 15절에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하나님을 규정합니다.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시편 116편 5절에서 시편 저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도다”

여기서 말하는 이 긍휼이라는 것과 자비라고 하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남들이 잘못하고 우리아이가 잘못하거나 이웃이 나에게 잘못하면 일반적으로 율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당신이 잘했다,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율법적인 반응인데 하나님은 율법을 창시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근본저인 속성은 율법대로 우리를 따지고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용서하시고 덮어주시고 그리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의 속성과 함께 본문에 하나님을 대표하는 또 다른 속성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본래 위로하다(파라칼레오)라는 동사는 ‘사람을 내 곁으로 부르다, 초청하다’라는 뜻입니다.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통과 아픔과 환란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곁에 못 본척하지 않고 그 분들을 곁에 불러서 초청해서 좋은 말로 사랑해 주고 위로해주고 권면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파라클래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곁에 두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정적인 문제로 재정적인 문제로 육체의 질병으로 인하여 또는 직장에서 사회에서 살다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받을 때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가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곁에 가까이 두시기를 원하십니다. 초청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받지 못하는 위로를 우리들에게 주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위로라고 하는 것, 용서라고 하는 것, 격려라고 하는 것, 자비와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지 인간의 속성이 아닙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것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는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위로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실재로 이 위로를 삶 속에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심하여 밤에 잠을 못 이룰 때, 하나님은 곁에 오셔서 위로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과 자비를 경험한 사람만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환난가운데 있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신 이유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4절)

이 말을 바꾸어 이야기 하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위로와 긍휼과 자비를 받게 되면 이 땅에서 고난과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자비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위로하신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제 안디옥 교회에서 덕양15기 아버지학교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영향력’이라는 강의를 하고 난 다음에 몇 분이 나오셔서 간증을 하였습니다. 먼저 제 간증을 했습니다. 저희 아버님 제가 어렸을 때 따뜻한 사랑을 주시거나 자상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엄하신 분이시고 무서운 아버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따뜻하게 해 주었던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결혼 초기에 가정생활이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는데, 저 자신이 이런 가정 사역을 하기 전에 은혜를 받기 전에는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제 안에 저의 아버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나와서 간증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많은 분들이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기억나는 부분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대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이렇게 사랑을 받아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부모님이 경험한 에게 위로와 사랑을 결혼 후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이웃에게 풍족하게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간혹가다 이렇게 부부간에 상담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부부간의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보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부의 부정의 문제나, 재산상의 문제나, 성격상의 문제 등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가만히 내면의 세계를 바라보면 한 가지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줄려고 하지 않고, 용서와 위로를 주려고 하지 않고 용서와 위로와 사랑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용서와 위로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것을 받아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와 용서를 많이 경험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하나님, 이렇게 더럽고 추산 죄인을 용서해 주셨군요.”하나님께 로부터 위로와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고 격려해주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환란 중에 있었던 나를 위로하신 이유는 고난과 환란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라고 위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먼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주기도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지은 죄를 내가 용서해 주게 하옵소서.” 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 같이 나도 나에 죄에 대하여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게 하옵소서. 

그런데 내가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자만이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환란과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주위에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들, 사도바울을 모략하는 사람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무시하는 사람들, 그가 30년 넘게 목회하면서 많은 고난과 환란과 어려움을 경험했지만 이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뒤에서 끊임없이 사도바울을 위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위로의 사람, 자비의 사람, 격려의 사람, 긍휼과 자비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먼저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아내를 자녀를 남편을 또는 부모님을, 이웃을 용서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 남들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남들의 실수와 잘못을 비난하고 그 사람을 환란가운데 더 어려움을 처하게 하는 사람인가요? 우리가 잘 아는 욥은 동방에 의인이었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녀들이 다 죽게 되고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게 됩니다. 우리 같으면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수 있나요? 그런데 욥기 1장 20절에 보면, 그렇게 자기 자녀들이 죽고 재산을 잃은 그 가운데서 옷을 찢고 머리를 깎고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예배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왜 욥은 그런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비방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욥은 하나님의 위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환란과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위로하지 못할지라도 때로는 부모님도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도 이해하지 못하고 위로해 줄 수 없는 극한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곁에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다가와 용서와 위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능력을 갖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도 반드시 그 고난보다 더 많은 위로를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5절)

하나님은 누구를 위로하시냐하면 주님을 위하여 환난과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시간을 내야하고 절제해야 되고 또 눈물을 흘려야 되고 땀을 흘려야 되고 어느 때에는 귀한 헌금을 내셔야 하고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눈물과 희생이 있어야만 주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하시지요?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힘들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빈손으로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주를 위하여 많은 고난이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위로를 그에게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자녀가 여러 명 있는데 그 많은 자녀들 가운데 어느 한 자녀가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돈이 많지도 않고 잘 살지도 못하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는데 그 자녀가 그렇게 잘 합니다. 다른 어느 자녀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성을 다하여 희생하고 헌신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자녀가 희생하고 고난당하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은 그 자녀를 어떻게 대하실까요? 많은 자녀들이 있지만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녀를 볼 때마다 축복해 주지 않을까요? 격려해 주지 않을까요? 위로해 주시지 않습니까? 많이 희생하고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부모님이 그 자녀를 더 많은 위로와 격려를 주시듯이 여러분도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두 가지 이유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와 위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경제적인 파산을 했거나 자녀가 이혼을 했거나 실직을 했거나 시험에 낙방을 했거나 육체적인 질병을 경험하고 있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이를 먼저 세상에 보내야하는 사별의 아픔을 경험했거나 관계없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힘들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절데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아픔을 하나님도 아파하십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 달라고, 위로해 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 하나님, 저 너무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저 너무 힘들어요.”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네 번째, 우리가 환난이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 한 하나님이 일부러 찾아 오셔서 마음의 문을 열고 위로를 담아 주시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아픔을 토로하는 것을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통회하는 자, 가슴을 치며 고통당하고 있다고, 아파하고 있다고, 밤에 잠을 못자고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하세요. 욥이 그 고난과 괴로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엎드려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예배하였던 것처럼, 여러분이 하나님께 다가와 “하나님 위로 하옵소서, 어느 누구에게도 제게 위로를 받을 수 없나이다.”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샘솟듯 하나님은 어느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하늘의 위로로 함께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위로의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시고 지금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이웃에게 받지 못한 위로, 주님이 주시려고 준비 중에 있으니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께 나아와 엎드려 고백하셔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 그 위로를 받아 이 땅에서 승리하며 사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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