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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표적을 주신 이유 (요 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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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표적을 주신 이유 (요 5:1~18)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악어의 표정이라고 한답니다. 얼굴에 감정의 표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얼굴 표정으로 잘 나타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좋고, 싫음의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습니다. 항상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묵뚝뚝한 표정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표정을 악어의 표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항존직 피택자들과 양주시에 있는 중증 장애우들이 기거하는 ‘요셉의 집’에 가서 한나절 봉사하고 왔습니다. 오는 길에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직장에서는 별로 웃을 일이 없답니다. 항상 심각하답니다. 회의를 해도 웃는 분위기가 아니라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랍니다. 웃으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웃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실없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웃지도 못하니 묵뚝뚝한 표정일 수 밖에 없답니다. 

어느 집사님은 다니는 회사의 구호가 ‘사랑합니다’인데 아침에 출근하면 ‘고객님, 사랑합니다’ 라고 밝은 표정으로 외치고는 바로 본래의 굳은 얼굴 표정으로 돌아간답니다. 힘든 세상을 살면서 밝게 웃는 얼굴을 하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고단하지만 밝게 웃는 훈련을 해서 웃는 얼굴로 밝게 살아갑시다. 

이 시간에 내 주변에서 함께 예배하는 분들과 밝은 얼굴로 인사를 나눕시다. ‘웃으면서 삽시다. 밝게 삽시다. 사랑합니다’ 서로 인사한 후에 바로 본래의 굳은 얼굴로 바로 돌아가지 마시고 웃음 띤 얼굴을 예배가 끝날 때까지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예배를 끝나고 집에 돌아가셔서도 그 웃음을 그대로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기적에 대한 기록이 적습니다. 요한복음 안에는 일곱 개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일으킨 기적은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입니다. 그 기적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 2장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의 기적은 헤롯 왕의 신하 중에 아들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 4장 54절을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일괄되게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적은 영어로 ‘SIGN’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국도나, 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이정표가 있습니다. 서울, 부산, 광주라는 ‘사인’ 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그 사인은 그 표지판 자체가 서울이나 부산, 광주가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방향을 보여주는 방향 안내판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표적들은 그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표적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이 달리 있는 것입니다. 표적은 단지 목적을 가리키는 안내판 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런 표적들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표적들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행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잘못하면 우리 신앙을 표적을 구하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기 쉽습니다. 표적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합니다. 항상 표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 표적을 통해서만이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고 합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게 하는 몽학선생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구주로 확인되면 표적이 없어도 불안할 것없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년된 중풍 병자가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는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또 삼십 팔년된 병자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이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영혼 사랑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려면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과 그 배경 속에서 38년된 중풍병자의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절에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는 말씀에서 오늘 사건의 배경이 유대인의 명절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명절이 유월절이었다고 말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최대의 축제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축제의 시간을 갖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일주일간은 예루살렘이 풍성한 음식과 음악, 그리고 웃음과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예루살렘성은 축제의 분위기 속에 일주일 동안 불야성을 이룹니다. 

그 최대의 유월절 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예루살렘성의 축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와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이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본문에 예루살렘의 명암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에는 유월절 축제의 기쁨과 환호가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축제가 열리는 예루살렘성 뒷면에는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고독감에 쌓여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명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우리 인생의 명암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모습은 화려하고, 당당하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삶의 뒷면에는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환자들처럼 우울하고, 고독하고, 무기력한 부분을 끌어 안고 힘들어 하며, 지쳐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성 안에서 벌어지는 유월절의 축제와 베데스다 연못의 어두운 면은 우리 인생에 가지고 있는 밝음과 어두움의 양면성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가장 침울하고 어두운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 가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을 찾으신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는 많은 환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워하는 삼십 팔년된 병자를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해방의 축제인 유월절에 진정한 해방이 필요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병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뜻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자비의 집에 누워 있지만 그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절망적인 사람을 찾아 가셨습니다. 

7절에서 병자는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것은 삼십 팔년된 병자와 다른 병자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에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 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Seeking God이라고 합니다. 찾아가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 나무 밑에 숨었을 때도 아담을 찾아 가셨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사람들을 보는데서 시작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주위 깊게 살펴보면 모두가 외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삶에 치여 지치고 고독해 합니다. 가정을 보면 가장은 가장대로 지쳐있고 외롭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힘들어 하고 고독해 합니다. 자녀는 자녀들대로 유치원생부터 장성한 자녀들까지 모두가 지쳐있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자들은 경영자대로 불안하고 힘들어 합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인들대로 불안해 하고 지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픔과 걱정, 그리고 외로움을 알아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진실하게 귀담아 들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인생의 원리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며 삽니다. 유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며 삽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면서 삽니다. 건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도우며 삽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으로, 재물로, 건강으로, 세상적인 명예로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영혼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채우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전도는 사랑으로 지쳐있는 영혼들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빈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채우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 남편을 향해, 아내를 향해, 자녀를 향해, 부모님을 향해, 직장의 동료를 향해, 사랑하는 친구를 향해, 우리 이웃 가운데 지치고 외로움 속에 있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며 지친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의 싹은 사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삼십 팔년된 병자에게 아주 어리석은 질문을 하십니다.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삼십 팔년된 병자를 보시면서 ‘벌써 오랜줄 아시고’ 라고 말합니다. 그가 얼마나 중한 병에 걸려 있는지 아셨습니다. 7절에서 병자가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들은 그의 대답에서 절망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입니까? 그러나 이 질문은 삼십 팔년된 병자의 마음에 꺼져 가는 희망을 다시 점화 시키는 질문입니다. 절망과 포기에 익숙해져 있는 그에게 다시 희망의 불을 지피시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린은 유대인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기적처럼 살아 남았습니다. 수용소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을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자신과 함께 있었던 수만명의 동료들이 끌려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콩 한 쪽이 들어 있는 스프 한 그릇이 하루 식사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전쟁이 끝나고 그는 얼마 안되는 생존자들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정신력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고통 속에서도 끄떡 없는 강철같은 체력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프랭클린 박사는 ‘나는 지옥같은 극한 상황에서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그곳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내가 정한 대상은 나의 아내의 손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 손을 한번 더 잡아 보고 싶었고, 아내의 눈을 한번 더 들여다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다시 끌어 안고 가슴과 가슴을 맞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이, 그 희망이 수용소에서의 지옥같은 순간 순간을 버텨 내게 했고 결국 살아남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희망은 곧 생명이며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삼심 팔년 된 병자에게 오셔서 그를 향해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네가 낫고자 하는 그 희망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가지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과거의 실패와 아픔,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믿음을 보기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고되고 힘든 삶에 지쳐 있는 우리을 향해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믿음 안에서 회복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주저하지 말고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의 자리지만 주님 안에서 다시 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찾아 오셔서 저의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에 손을 대주시고, 희망을 노래하며 일어설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십시요’라고 적극적으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예수님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삶에 지쳐 있는 이웃들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언어로 희망을 선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안에서 선포되는 희망의 노래는 생활에 지쳐 잇는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고 그들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는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희망의 노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만들어 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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