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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과 함께 고난을 기뻐하는 사람들 (딤후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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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함께 고난을 기뻐하는 사람들 (딤후 1:6~12)

 
작년 이맘 때, 그러니까 2007년 10월 13일에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아주 특별한 제목의 방송이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그들은 왜 불신 지옥을 외치는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길거리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습니다.  방송에 나온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말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 가지 않게 하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믿고 천국에 가게 하려고"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는 겁니다.

다양한 분들이 소개되었습니다.  한 분은 서울역 근처 쪽 방에 살면서 낮에는 예수님을 전하고 밤에는 성경을 읽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은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합니다.  이렇게 기이하게 복음을 전한다고 자식에게까지 냉대를 당하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아들.  그 아들의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이런 남편을 둔 아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뒤늦게 이 방송을 보면서 제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부끄러움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쏘아 부치는 현 시대에 이런 방송이 기독교의 부정적 이미지에 불을 지필 것이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날 방송 진행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타인들을 위해서 외친다고 하는 그들을 보면 진지함마저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신학교 교수요, 목사들이라는 사실에 분노와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한신대학교의 어느 교수는 이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은 마태복음 28장에 나타난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데 이 말씀은 명백하게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는 '명백하게'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전하는 것을 무식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너는 복음을 전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  바울의 이 말은 바울이 쓴 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은 이것이 바울의 말씀이 아니라고 평가한다고 합니다.  바울의 이 말씀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똑 같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목사도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님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목사들이 잘 못 가르치는 탓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이거 신학교에서 다 배워요.  목사들 다 알아요.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렇게 가르치면 먹고 살수 없기 때문이죠.  목사들, 솔직히 깨 놓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대로 믿는 아주 무식한 교수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할 유일한 주님이라고 믿는 정말로 어리석은 목사입니다.

제가 정말 분노를 느낀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에 대하여 기독교 대표들의 공식적인 입장을 듣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결국에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이런 기회야말로 비뚤어진 기독교를 바르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면 안됩니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  저들이 때로는 여러분의 마음에 불편함을 끼쳐 드리는 것이라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들이 가족을 뒤로하고, 자신의 편안함과 행복을 뒤로하고 저렇게 외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만 생각해 보십시오.  방법적으로는 조금 세련되지 못하지만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이 있기에 저분들은 가슴이 터지도록 외치는 겁니다.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속된 말로 쪽팔리는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이토록 부끄러워합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지도 않는 교수와 목사는 예수만이 구세주라고 외치는 것이 배타적인 것이요, 잘못된 기독교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을 인권침해라고 법으로 제재하자고 떠들어대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왜 이토록 부담스러워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예수 이외에는 천하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고….  우리가 외쳐야 할 복음이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한 번 물어봐야겠습니다.
여러분,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맞습니까, 아니면 여러 사람이 짜집기한 사람의 말입니까?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 말씀대로 살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100년 전 미개한 이 땅에 들어와 콜레라에 죽어 가는 자식을 바라보며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던 저 무수한 선교사들은 모두가 바보 같은 사람들입니까?

오늘날 이 복음의 노예가 되어 중국으로, 이슬람 세계로 들어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저 사람들은 도대체 정신이상자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밝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당신이 살고, 당신의 가정이 살고, 이 민족이 사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도 건강을 잃기 전에는 길거리 전도를 했었습니다.  집집을 다니면서 노방전도를 했었습니다.  요즘 들어보면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 전하고 다니면 그 가운데 믿는 사람들이 반응할 때가 있었어요.  이제는 그 누구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한 마디를 합니다.
"그 때는 외로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생명의 위험을 겪어야만 했었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산짐승으로부터 위험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예수를 믿는 믿음의 형제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단 한 번 살다가는 이 땅 위에서의 삶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한 기쁨을 맛본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위해, 복음을 위해 내 한 생명을 바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값있는 인생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 생명을 얻은 믿음의 사람들은 적당하게 사는 것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적당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죽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을 남깁니다.  유언은 유언처럼 읽어야 합니다.  함부로 유언을 남기는 사람이 없듯이 함부로 유언을 대하는 사람도 역시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남기는 마지막 부탁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마지막 부탁을 대하면서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새롭게 결단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첫째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품으라는 겁니다.

본문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7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사랑하는 여러분, 능력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동기입니다.  절제란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합니까?  디모데가 현재 처한 네 가지 정도의 상황을 보면 잘 이해가 됩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라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목회자로서 담대함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이단들이 득실대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과 전혀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이가 어린 디모데를 혼자 두는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거짓 교사들과 사이비 복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우습게 보일 수 있는 겁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사랑,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하라."

디모데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할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적으로 바울과 달리 매우 내성적이었습니다.  겸손함과 온유함은 필요하지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담대하라고 강조합니다.

디모데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상황은 바로 그의 스승이요,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이 감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따라야 할 스승이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제자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까?  마치 아버지를 잃어버린 자식의 마음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디모데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상황은 바로 그의 스승이요,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이 감옥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따라야 할 스승이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제자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는 어떻게 들려 옵니까?  오늘날 바울이 우리 곁에 있다면 이런 시대를 바라보면서 무엇이라고 권면할 것 같습니까?  자신의 연소함과 이단들, 그리고 스승이 잡혀 있는 상황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바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처한 모습을 바라보고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치는 바울.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한 외적인 모습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 연약할지라도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도록 만드는 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상황이 터널을 지나는 어둠 같을지라도 여전히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을 기대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입니다.  내가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으로 사는가, 아니면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 사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너무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환경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사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당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에 사로잡혀 염려하고 방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으로 담대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사람을 상대적으로 대하려고 합니다.  그의 직업이나 학교, 또는 가정적인 배경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우위라는 느낌이 들면 안심해 하거나 우쭐해 하고, 열등하면 기가 죽는 사람들.  좀 더 좀 더 성공적인 자신을 만들려고 달려가는 인생이 아닙니까?  때로는 상황에 매몰되어 휩쓸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상황이 순조로우면 힘을 내고 잘 되지 않으면 풀이 죽는 사람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좀 더 좀 더"의 상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주님의 보혈의 피가 너무나 고귀합니다.

상황에 매몰되어 사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태양 빛을 본 사람들입니다.  태양 빛을 본 사람이 어찌 땅 위의 등불과 화려한 샹들리에에 마음을 빼앗기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부족함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보시는 주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기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상황이 찾아올 때 우리에게 주어진 짐이 너무나 무겁기에 가볍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무거운 짐을 거뜬히 감당할 수 있는 튼튼한 어깨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인간적인 한계를 뚫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승리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부탁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겁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주님을 증거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주를 위하여 갇힌 나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바울이 주님을 증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대답을 듣기 위해서 당시의 상황을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인정되지 못한 시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냥 뛰어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볼 뿐 유일한 메시아로 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나아와 예수님 이외의 복음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때로는 독신생활을 강조하기도 하고 부당한 금욕주의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바울은 디모데가 예수님이 유일한 주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할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이 감옥에 잡혀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은 로마정부의 잘못된 법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억울한 누명 때문도 아니라고 합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는 자신이 감옥살이를 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을 조금도 억울하다거나 불평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주님이 복음을 위하여 행하시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바울이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외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예수님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이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입니까?  예수님이 유일한 주님이라는 것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목적이 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에 "저는 예수님과 복음 전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저희들에게 바울은 죽음을 앞둔 비장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은 단순한 권면의 말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자신의 아들과도 같은 디모데에게 들려주는 명령입니다.  복음과 고난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기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나아가 고난이 없는 삶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난을 각오하는 삶입니다.
 
오늘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나온 저희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정말 나를 따라오려느냐?  그렇다면 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좁은 길을 걸을지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좁은 길, 험난한 길,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는 축복은 강조하지만 고난은 강조하지 않는 종교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찾아오는 행복은 강조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서 감당해야 할 고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이 사라지는 것을 축복이라고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도 겸하여 받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신에게 이렇게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는 예수님을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고난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있다면 마지막으로 그 고난을 받아 본 경험이 언제였던가?  만일 현재 나의 삶에 주님과 복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잠시 신중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인생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힘이 나오게 한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사명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 대답을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러니까 복음과 영혼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며 살 것을 부탁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반드시 바울과 그의 사명을 지킬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기독교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를 때 감수할 희생의 복음을 희석시키고 고난을 거부하는 종교로 전락하는 기독교.  기독교의 근거인 십자가의 복음의 자리에 윤리와 철학과 행복 강연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생활 태도가 복음으로 미화되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현대의 강단.
 
오늘날 기독교는 신앙으로 인하여 고난 없는 안락을 가르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누리는 평안을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당했던 수 많은 사람들의 역사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진리의 복음을 위해 감옥에서 비참하게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모든 명예와 권력과 행복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의 제물로 주님께 드려졌습니다.

복음을 위해 온갖 멸시와 조롱을 참으시고 모든 고난을 감당하셨던 또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받기를 진심으로 원하십니까?  아니면 한 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님도 믿고 세상에서 고난 없이 누릴 것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단 한번 살아가는 땅 위의 인생입니다.  예수를 유일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세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앞에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5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도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하며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이 있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외쳐야 할 때입니다.  때로 그 음성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들려져야 합니다.  때로는 조용히 한 사람과 깊은 대화를 통해 속삭이듯 들려져야 합니다.  죽어 가는 한 형제를 가슴에 품고 들려주는 사랑의 전화와 흑암 가운데 놓여 있는 한 자매를 위한 한 통의 편지를 통해서도 우리 예수님은 전해져야 합니다.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할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부흥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으면 사탄의 세력이 이 땅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이 활개치지 않게 하려면 교회가 크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녔던 이름 없는 성도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뜨거운 여름날, 이마로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가며 때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아가며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사들이 있었기에 이 땅의 교회가 이 만큼이라도 부흥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과 시간을 주를 위해 내 놓으면서 지금도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며 조심스럽게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큰 교회, 부흥하는 교회는 반드시 한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을 걸었던 이름 없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물과 그들의 기도와 그들의 헌신과 그들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있었기에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고난받는 일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허물진 나를 이렇게 사용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무엇이관대 주님의 이름으로 감히 고난을 받는 영광에 동참한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이 은혜, 이 사랑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우리들은 이 땅을 떠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땅 위에서 선한 싸움 마치고 주님을 만나는 그 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했다, 충성된 종아.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 해 주었구나.  내가 전해야 할 그 복음을 네가 대신 전해 주었고,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을 네가 대신 받아 주었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주님의 눈에 감동의 눈물을 볼 그 날까지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을 기뻐하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면서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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