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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14) :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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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14)


언젠가부터 우리 스스로 우리 나라를 가리켜 자살 공화국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심정을 몰라준다고 자살하고, 억울해서 못 살고, 가난하여 못 살겠고,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허탈감에 못 살겠다 부끄러워 못 살겠다고 너도나도 목숨을 내 던집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도 5분 마다 한 사람씩 자살을 시도하고 있으며 하루에 33.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지난 해 우리 나라 전체 사망자의 5%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는데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에 이어 자살이 사망 원인 네 번째 자리에 올라왔습니다.  OECD 국가들 중에 5년 연속 자살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자살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안재환 씨나 최진실 씨는 유명 연예인이니까 매스컴을 통해 안타까운 죽음 소식이 알려지고 사람들의 동정도 사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그런 유명인사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알려지지도 않고 지나갑니다.   

자존심 상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로 한다면 이보다 더한 치욕이 없을 정도로 일생을 고통과 함께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다윗은 최고의 자리에서 최저의 바닥 인생까지 내려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인격과 자존심, 제물과 명예 등 자아를 상실 당하는 위기가 올 때마다 치욕을 못 이겨 죽음을 생각했다면 다윗은 그의 일생 중에 죽기를 자청한 적이 손꼽을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경험했던 고통의 시간들을 나열하면 어떻게 다윗처럼 영화롭고 굳건한 나라를 통치했던 왕에게 이런 아픔들이 있었을까 놀라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고 3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영광스런 나라의 통치자로 존경을 받는 다윗도 그의 일생 가운데 수 없는 절망과 죽음을 눈 앞에 두었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소시 적에 아버지의 양떼를 맡아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시절에 그는 막내아들이기도 했지만 일곱 형들의 기세에 눌려 자신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던 작은 소년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왕이 될 후보를 택하러 왔을 때에도 아버지는 일곱 형들을 차례대로 선 보였지만 막내 다윗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아 들에서 양이나 돌보고 있도록 하였습니다.  관심 밖의 어린아이였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음식을 싸 들고 형들이 출전한 전쟁터에 위문을 갔을 때 골리앗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이스라엘의 형편을 목격한 그는 순간 의분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러나 큰 형 엘리압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저 이방인을 그냥 둘 수 없다고 분노하는 막내 동생을 영접하기는커녕 동생에게 화를 내며 네가 전쟁터를 놀이터로 알고 구경하러 왔느냐 하며 꾸짖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 앞에 양을 치는 막대기와 물맷돌을 가지고 나갔을 때 골리앗에게 여지없이 업신여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어리다는 이유로 막내라는 것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아픔이 있던 다윗의 어린 시절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스라엘의 성읍의 모든 여인들에게 칭찬의 노래를 듣는 그 날로부터 다윗은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사울이 죽는 날까지 십 수년을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 없이 왕의 미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공주 메랍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마음이 변하여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딸을 시집 보냄으로 다윗의 체면을 의도적으로 짓밟았던 일도 있습니다. 또 다른 공주 미갈이 다윗을 사모하게 되어 신하들이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줄 것을 권할 때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양피를 가져오는 조건으로 미갈을 주겠다고 합니다. 사울의 본심은 딸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니 다윗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정도가 어떠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죄값을 치르기 위해 벌을 받는다면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왕보다 더 인기가 좋다는 이유로 오해를 받아 미움을 당하는 다윗이었습니다. 미움은 증오와 살해의 위협으로 자랐고 사울 앞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자가 되어 이스라엘 광야를 방랑하며 살아야 했었습니다.  한 번은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적국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 블레셋 왕에게 간청하여 그 땅에서 잠시 지내려다 골리앗의 일로 다윗을 경계하는 블레셋 신하들의 고발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두려움을 느낀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 즉시 행동을 바꾸어 미친 체 하고 대문짝을 긁적이며 수염에 침을 흘리는 행동을 하여 미치광이로 인정받고 겨우 죽임 당함을 모면하였던 수치스런 순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과 그 일행을 숨겨준 일이 사울에게 알려졌을 때 사울이 제사장들 85인을 죽이고 그들의 어린 아기들까지 칼로 치는 끔찍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 어린 아기들을 포함해 죄 없는 수 많은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어찌 얼굴을 들고 사람들 앞에 설 용기가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통일왕국 왕이 된 후 나라가 강건해지고 왕권이 든든해졌을 때 우리야의 처 밧세바를 탐하여 성적 범죄를 저지른 후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징계로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기가 이레 만에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심장은 찢어질 듯 괴로웠습니다. 다윗의 간음 사건으로 인하여 다윗의 집안에 칼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예고대로 다윗은 자식들끼리 칼부림이 나는 사건을 목격해야만 하는 비운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복 누이 다말을 겁탈한 왕자 암논에 대한 복수로 다말의 친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일을 시작으로 다윗의 집안에는 기어코 왕자의 난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이 일로 아버지의 진노를 얻어 귀양을 갔던 압살롬이 다시 돌아온 후 아버지 왕으로부터 신하들과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결국 아버지 다윗을 왕좌에서 몰아내는 반역의 쓰라림까지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부왕의 후궁들과 옥상에서 백주에 동침하는 행동으로 아버지의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왕 자리를 빼앗았던 압살롬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얼마 못 가 아버지의 신하들에게 붙들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고 아버지 다윗은 그 일 때문에 다시 한 번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아들 대신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하며 반역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던 다윗은 나의 삶이 왜 이렇게 거칠고 평안이 없을까 탄식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던 왕이었습니다.   

인기가 많고 소유한 것이 많을수록 가진 것을 잃었을 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더 심하게 느끼고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 인기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스캔들이 폭로되거나 추락해버린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게 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약물을 의지하거나 알코올과 마약에 빠져들고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던져버리는 일도 발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가진 것, 의지할 것이 오직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알고 살아왔으니 그것을 잃고 나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 당해 버틸 힘이 없어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누구보다도 자의식이 강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다윗은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요?  그는 누구보다도 화려한 권력의 맛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아들과 심복들의 반역에 힘 없이 쫓겨나 신발을 벗은 채 머리를 풀고 울면서 궁을 빠져 나와 도망해야 했다면 그 체면은 얼마나 손상이 되었을까요?   피난 길에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돌을 던지며 ‘쓸모 없는 인간아 떠나가라’ 하고 조롱할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이런 꼴 안볼 텐데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다윗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마치 고난 당하던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이 있던 사람입니다.   오늘 내가 사람들 앞에서 끌어내려져 길바닥에서 망신을 당하고 있지만 이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뿌린 죄악의 열매이니 겸손하게 받아야 한다는 솔직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억울하게 쫓기고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는 혈기를 부리고 눈에 독을 품고 원수를 찾아 악으로 갚은 사람이 아니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그 손으로 더러운 피를 흘리지 않으려 자신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던 인내의 사람입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다윗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시의 내용들은 악인의 손으로부터 건져주시기를 구하는 애절한 기도와 찬양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 만큼 다윗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 시편을 봅시다. 그가 가장 험악한 세월을 보낼 때 지은 탄식의 시들 가운데 한 편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원수의 칼날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며 하나님이 나의 빛과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여호와가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겠습니까?”  하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군대가 나를 잡으려 사방에 진을 치고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두렵지 않고 오히려 편안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장막 깊은 곳에 감추어주시고 나를 원수들 앞에서 오히려 높이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집에서 평안을 얻고 위로를 얻으며 종국에는 원수들의 꾀가 실패로 돌아가 나로 하여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니 내가 하나님의 집에서 감사의 찬양과 제사를 드립니다.

내가 곤란할 때 부르짖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오니 내게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주의 얼굴을 찾으리니 주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나를 떠나지 마시며 나의 도움이 되옵소서.  비록 나의 부모도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내 생명을 원수의 손에 그냥 두지 마시고 나를 모함하고 거짓으로 음해하는 위증자들이 토해내는 그 위협으로부터 나를 막아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체험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소망합니다. 강하고 담대하여 오직 여호와만 소망합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살아서 평생에 하나님을 향해 나의 죄를 토하고 죄 사함을 얻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얻어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하기를 소원한다는 그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진정한 용기를 봅니다.  나는 다윗도 아니고 다윗처럼 큰 사람도 아니라 그런 시련을 감당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고 싶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일까요? 죽은 다음 그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음만이 해결책이라면 다윗 같은 사람은 목숨이 수 십 개가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그렇게 값없이 던지라고 주신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사랑 때문에, 인기와 명예 때문에, ‘베르테르 효과’라고 이름하는 모방자살로 그 소중한 생명을 던져버립니다. 유명한 사람도 어려움이 닥치면 저렇게 죽는데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더 살아서 뭐하나 하고 유명인을 모방하여 던질 목숨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몇 개의 생명을 여분으로 더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죽을 용기 있으면 그 용기로 더 악착같이 살라고들 합니다.   진정 강하여지길 바랍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아야 할 이유도 더 강하게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목숨을 던짐으로 추락한 명예를 회복하고, 내가 피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길은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사죄하기를 원한다면 살아서 평생토록 갚아가는 것이 용기 있는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요?   자살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죽음을 핑계한 책임회피이고 나만 사라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 남겨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더 큰 짐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억울함을 죽음으로 표시하여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만과 고통을 떠넘기고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이야말로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담보로 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함입니다. 나 자신만 바라지 말고, 물질만 바라지도 말고, 사람만 바라지도 말고 ‘그가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그가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는 고백으로 소중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 

사랑하는 제자의 손에 팔린 예수 그리스도는 재판장 뜰에서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의 배신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순간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던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인들의 세상으로 내려와 그 죄 짐을 한 몸에 지고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 주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거룩한 죽음을 가장 굴욕적인 방식으로 가장 잔인한 사람들에 의해 당하신 분입니다.   

제사장들과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서 그 지독한 모욕과 멸시를 당할 때 한 마디 변호해 주는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감당하신 주님은 세상 모든 사람의 아픔을 한 몸에 짊어 지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 짐이 어떤 종류의 짐이든 얼마나 크고 무겁든 상관이 없이 가지고 오기만 하면 대신 지신다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 안에서 맛보라고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리고 그분 앞에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무엇이 주저되고 망설여집니까?   나의 죄와 허물이 너무 무거워 감히 넘겨드리기 죄송함 때문인가요?   아니면 세상 어느 누가 나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인지 못 미더워서인가요?   왜 예수께서 내 짐을 대신 져주실 기회를 안 드리고 스스로 움켜쥐고 떠메고 있으며 그 짐에 짓눌려 고달파하고 불안하여 합니까? 왜 악한 사람들의 평판과 수군거림에 내 생명을 맡기고 나의 불행을 기대하는 그들의 뜻에 허무하게 지고 맙니까?  그들보다 더 크신 분이 내 대신 감당하신다고 하는데 그 짐보다 더 크신 분이 맡아주신다고 하는데 무엇이 두렵고 무서운가요?  

나를 향한 사람들의 평판이 두렵습니까?  사람들의 얼굴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여 드시고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구하고 또 구하며 내 짐을 내려놓읍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 짐을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내가 영원히 지고 갈 죄의 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짐을 맡아줄 분에게 드리고 떠나야 됩니다. 

다윗은 시편22편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니 정말 구원하시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합니다. 하나님 어찌하면 좋을까요?’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처한 비참함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고통스런 경험이 또 있을까요? 벌레 취급 당하는 경험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세상에 내던져졌습니까? 믿음 좋다고 자랑하더니 이게 왠 일인가?   정말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 맞나?  하고 비쭉이는 소리가 들려와 힘이 듭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시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 앞에 나를 낮추고 엎드려 기다리는 길 외에 없습니다. 내 깊은 속에 감추어진 죄악의 쓴 뿌리를 제거하고 주의 선하신 손으로 나를 치료하시기를 구하며 기다립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단이 두렵습니다. 그가 나를 고치시면 내가 삽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노염은 잠간이지만 그 은총은 평생입니다.  지금은 울음이 머무는 저녁이지만 기쁨의 아침이 옵니다(시30:5). 울음이 머무는 저녁에도 주님과 함께 하고 기쁨의 아침 또한 주님과 함께 맞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로마서 8:31-39을 함께 읽음으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런즉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리요.  이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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