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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집에 있는 교회 (시 92:12~13, 고전 1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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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있는 교회 (시 92:12~13, 고전 16:19~20)


우리교회 창립 114주년을 맞이하는 달입니다. 
한 달 동안 교회를 다시 돌아보면서 우리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난생 처음 백화점에 가 본 시골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기한 듯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 분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문이 열리고는 예쁜 아가씨가 내리니까 이 할아버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손자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니네 할머니도 저 기계 속에 넣었다가 끄집어내야겠다.”
  
교회는 들어가면 변화되는 곳입니다. 젊어지는 곳입니다. 예뻐지는 곳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우선 교회는 모여야 그 기능을 할 수 있고 모이게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어로 교회는 ‘에클레시아’라 합니다. 이 말도 함께 모인다는 말입니다. 모임으로 교회가 되고 모이기를 힘써야 교회답습니다. ‘에클레시아’란 말은 ‘에크’란 말과 ‘칼레오’란 말의 합성어인데 ‘밖으로 불러내다’란 뜻입니다. 로마의 원로원을 ‘에클레시아’(ecclesia)라 불렀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회중 또는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은 조직이 아닌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조직을 가지고 있지만 조직 이상의 유기적 관계를 가집니다. 교회는 조직을 넘어서는 유기체이며 영적 운동이어야 합니다. 교회란 세상의 물결에 시달리는 배를 상징하는 것이며 아울러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도 통합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노아의 부인, 세 아들, 세 며느리가 타고 있었습니다. 이 여덟 사람은 큰 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여덟 사람은 한 가족입니다. 방주에 함께 탔던 동물도 한 쌍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동물부부였습니다. 방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가 한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불교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것이 대웅전과 부처상입니다. 이슬람을 생각하면 모스크나 첨탑을 떠올립니다. 힌두교는 온갖 신으로 장식한 사원을 생각할 것입니다. 미국 유타 주에 가면 몰몬교의 본부가 있습니다. 몰몬교는 어디에 가나 교회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뾰쪽탑에 나팔 부는 상이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몰몬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상징은 교회나 종탑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가정이 교회의 원형이라는 것입니다.
  
중세의 교회는 웅장하고 종탑이 높고 교회 내부도 근엄했습니다. 당시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정서를 상징했습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신앙이 표현된 건축 양식이었습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찬송은 우리 신앙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에 한참 어려울 때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제일 많이 불렀습니다. 도망가는 남편을 찾을 때는 “돌아와 돌아와”를 부릅니다. 도망갔던 남편이 돌아올 때는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를 부를 것입니다. 교회의 양식은 당시의 신앙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강단의 위치, 목사의 가운 등도 다 신앙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는 가정의 시대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부각되는 시대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면 친근함, 온화, 교제, 사랑, 따뜻함, 풍성 등 온갖 좋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교회를 기대합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가정과 같은 교회, 교회와 같은 가정이 이상적입니다. 오늘 성경이 가르치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교회처럼 우리의 가정들이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 가정이 가장 모범적 가정일 때에 우리 교회가 모범적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들이 좋은 가정이 되어 이런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처음 교회는 집이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6:19에는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이 교회였습니다. 우리의 집은 교회입니까? 아니면 전쟁터입니까? 여러분의 집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보는 관점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볼까요?
  
초대교회는 집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디모데전서 3:15에는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집은 교회입니다.
  
좋은 가정, 좋은 부부가 좋은 교회를 만듭니다. 초대교회는 집이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의 집이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가이오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외에도 초대교회는 모두가 집에서 시작하였고 집이 곧 교회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에는 교회는 가정 속에 있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가정 안에 숨어 있던 교회였습니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교회가 고딕체 건물을 가지고, 높은 뾰족 종탑을 세웠습니다. 교회가 밖으로 나와 높아지게 되자 이때부터 가정적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만드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은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완벽한 가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한번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고 떠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탈출해 갈 수 있는 완벽한 교회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완벽해서 우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면 그 완벽함 때문에 우리는 그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개 보면 완벽하지 못한 남녀가 가정을 이룹니다. 완벽한 사람들은 가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 결혼은 철없을 때 해야 합니다. 철이 들고 나면 너무 따지는 게 많아서 필이 꽂히지 않아요.
  
오래 전에 모 일간지에서 앙케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과 같이 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90%의 부부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문 밑에 이렇게 썼습니다. “골 비었나?”. 여러분 사실은 골이 비고 눈이 삐어야 좋은 부부가 되고 오래 잘 삽니다.
  
최근 줄 이은 연예인의 자살을 보며 마음이 답답합니다. 자살할 때마다 ‘성도’래요. 교회에 간다면서 왜 이렇게 성도가 자살합니까? 예수를 믿되 제대로 믿지 않으면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아예 완전히 예수님께 맡기든지 아니면 술에 맡기든지 해야 하는데 둘 다 아니면 더 우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의가 가정문제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정말 잘 잡아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의 가정이 교회가 아니면 장례식장이 됩니다.
  
미국 LA 근교의 ‘포레스트 론 공동묘지’(Forest Lawn Memorial Park)에 가면 감동적인 것을 발견합니다. 이 묘지는 휴버트 이튼(Hubert Eton)이란 분이 설립한 곳인데 공동묘지를 교회처럼 꾸며 놓았습니다. 정말 무서운 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곳이고 놀고 싶은 곳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인 얀 스티가의 ‘십자가에 달리심’(The Crucifixion)이 있고, ‘부활’ 그림도 있습니다. 설립자는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설립자의 신앙고백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설립자는 가장 더러운 것, 가장 무서운 것을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의 기독교인의 사명입니다. 하물며 가정을 교회로, 가정이 교회로 만들어야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합니까? 찬송이 우렁차고, 말씀이 은혜가 넘치고, 사랑이 풍성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희망을 심어주는 교회를 기대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대하여 기대하는 그것을 가정에서 실천하세요. 여러분의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우리 교회가 여러분이 기대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 땅에 처음 세워졌던 황해도의 솔내교회, 선교사에 의하여 처음 세워진 새문안교회, 이곳에 114년 전에 세워진 우리 연동교회, 이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가정에서 시작된 작은 교회였지만 지금은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들이 좋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름다운 부부와 부모와 자녀를 가진 가정은 이미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정 교회를 잘 지켜나가는 우리 가정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처음 교회는 거룩한 입맞춤이 있었습니다.

20절에는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입맞춤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제가 있는 곳입니다. 거룩한 교제입니다. 진정한 교제란 성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참여하여 간섭하고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한솥밥 먹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주로 운동선수들이 한 팀에 소속되어 있을 때 이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알고 보면 한 교회의 성도들이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물을 마십니다.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교제를 합니다. 그래서 식구 혹은 식솔이란 함께 밥을 먹는 입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입맞춤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입맞춤이 아닙니다. 그냥 입맞춤이 있으면 큰 일 나겠지요? 거룩한 입맞춤이란 거룩한 참여입니다. 성도에 대하여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야곱과 에서의 화해 장면을 보세요. 창세기 33:4에는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고 합니다. 교회는 모든 장벽, 미움, 투기가 사라지고 화해의 입맞춤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45:15을 보세요.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고 합니다. 교회에는 나를 죽이려고까지 한 이들과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입맞춤이 있어야 합니다. 입맞춤은 모든 원한을 물리치고 화해하고 사랑하게 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이야 말로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깊은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깊은 교제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은 바울 서신에 4번 나타납니다. 로마서 16:16에는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3:11에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6에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14에는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고 합니다. 성경 시대는 거룩한 입맞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원래 동방제국과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입맞춤의 관습이 있었습니다. 인사할 때, 헤어질 때, 화해할 때, 축복할 때 등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지금도 이들에게는 그 관습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에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사제인 스테판이란 신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배가 몹시 나온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저를 보기만 하면 꽉 껴안고 거룩한 입맞춤을 하고 강복하는 것입니다. 축복하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학교에서 그 분을 만나면 정겹고, 만나면 기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때로는 그 입맞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입맞춤의 폐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서방교회는 13세기에 거룩한 입맞춤을 폐지하였습니다. 문화적인 차이로 입맞춤은 아니지만 거룩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의 교통이 필요합니다. 동방교회는 지금도 거룩한 입맞춤의 교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성도의 교제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성도의 거룩한 교제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믿음의 내용입니다. 거룩한 교제는 신앙고백에 포함할 만큼 중요한 신앙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을 신앙적으로 잘 지켜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집에 거룩한 입맞춤이 있습니까? 매일 잠시 스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남편, 나의 아내로 거룩한 입맞춤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거룩한 영적 반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언제 들어오는지,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세상에 보낸 하나님의 최고 선물임을 알고 거룩한 입맞춤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아들, 내 딸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와 영적 교제를 함께 나눌 관계입니다.
  
프리드리히 폰 위겔은 교회는 나무껍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껍질에는 아무런 생명이 없습니다. 그것은 죽은 나무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 있는 나무의 생명을 보호해 줍니다. 그래서 나무는 자라고 또 자랍니다. 만일 껍질을 벗겨낸다면 나무는 쉽사리 병에 걸리고 탈수증에 걸려서 죽고 말 것입니다. 외형적 입맞춤, 외형적 교제, 교제의 악수, 입으로 하는 문안, 말로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한마디가 다 중요합니다. 외적인 것 같고, 생명이 없는 것 같지만 이런 모두가 교회에 생명을 가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친밀한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거룩한 입맞춤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잘 모르는 분,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에게 교제의 악수를 내 밉시다. 그들에게 따뜻한 교제가 흐르게 합시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결론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일 것입니다. 때로는 패거리, 끼리끼리, 텃새라고 욕하지만 끼리끼리 문화를 우리 교회는 선용해야 합니다. 끼리끼리가 없으면 교회는 오히려 와해될 것입니다. 동물세계의 세계를 보면 ‘혈연선택’(kin selection)이 아주 극진합니다. 생물학적 이타주의(Altruism)라 불리는 본능이 끔찍하리 만큼 대단합니다. 줄무늬 다람쥐는 자신과 이웃의 안전을 위해 교대로 집단서식지 주변을 경계합니다. 뒷발로 몸을 일으켜 세워 멀리 바라보며 경계합니다. 그들의 적인 포식자가 나타나면 경보발령을 소리로 내어 보호받게 합니다. 

암사자는 집단의 생존을 위해 협동 사냥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자가 다 배불리 먹은 다음에 자신은 가장 나중에 허기를 달랩니다. 코스타리카의 산 흡혈박쥐는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삽니다. 야간활동이 끝난 후에 먹이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한 동료를 찾아가 자신이 섭취한 피를 나누어줍니다. 

혈연선택은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혈연선택을 좀 더 넓힙시다. 우리 모두가 한 가족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교회의 식구들입니다.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한 가족이며 한 식구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제가 풍성한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남이가?’가 뿌리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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