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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심판에 자신 있으십니까? (계 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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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에 자신 있으십니까? (계 20:11~15)


우리교회는 일 년에 두 차례 봄, 가을에 총력 전도를 합니다. 
올 가을 총력전도는 10월 26일 주일로 선포되었습니다. 

① 이번 가을 총력전도 등록목표는 200명입니다. 
경험으로 보면 등록목표에 도달하려면, 최소한 그 숫자의 4배를 전도 대상자로 선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전도대상자(태신자)가 800명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②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다니엘세이레 기도기간 동안에 태신자들을 호명하고 기도할 것입니다. 
전도는 한 영혼을 놓고 사탄과 겨루는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이 영적 전쟁을 감행할 것입니다. 

③ 오늘부터 설교 후 교우들의 전도 간증을 듣습니다. 
우리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교우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전도는 ‘나도 할 수 있는 사역’이라는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④ 강력한 전도 도전을 받기 위하여 이번 주 수요일(10월15일)에는 외부강사 초청 일일 부흥집회를 갖습니다. 

⑤ 마지막 주간(20-25일)에는 총력 전도주일을 위한 매일중보기도를 실시합니다. 

⑥ 그리고 10월 26일 총력 전도주일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로댕의 [생각 하는 사람]이란 조각 아시지요? 
한 남자가 턱에 손을 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조각상은 ‘지옥문 앞에’라는 부제가 달린 작품입니다. 
그 제목을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옥문 앞에’라는 제목은 별로 타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옥문 앞에 이르렀다면 너무 늦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지옥문 앞에서 생각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나, 또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 우리 앞에 있는 최후의 심판, 지옥(영원한 불 못) 등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에 대해 생각해야 봐야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손을 턱에 괴고 조용히 생각해 봐야합니다. 
‘정말 그런 곳이 있단 말인가?’ 
‘만약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하면 그런 곳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으면 가지 않는다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비록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나는 그곳에 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조용히 턱을 괴고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결코 웃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모른다고 덮어둘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 배짱을 가지고 부딪혀 볼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나 심판을 우습게, 가볍게 여기고, 장난기를 가지고 다루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히 9: 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육체적인 죽음을 맛보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일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백보좌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11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선과 악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구분되는 신적 사법권이 행사되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최후 심판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위엄과 엄숙함과 엄정함이 있습니다. 
최후 심판은 한 치의 어그러짐도 없는 하나님의 추상같은 판단에 따라 믿는 자는 영생에, 믿지 않는 자는 영벌에 처해지는 순간입니다. 

본문에 보면, 중요한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우선, 이 심판은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2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어른이고 어린이고,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고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이고 간에 무론대소하고 그 심판대 앞에 섭니다. 
어떤 사람도 피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죽었든지 피하지 못합니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은 바다에서 살아나고, 산에서 죽은 사람은 산에서 살아나고........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 가두어놓았던 많은 영혼들을 다 풀어놓아 부활을 통해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심판대에는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 믿는 사람도 서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롬 14: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2. 또한, 심판하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12절 하반절에 보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세상에서 했던 자신들의 행위를 따라, 하나님께서 책에 기록하신 대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13절 하반절에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리의 의식에서는 가물가물 희미해진 행위가 행위록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고, 그 행위에 따라 우리 모두가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시62:12절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다.” 

렘17:10절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롬2:6절“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벧전1: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①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의 행위가 여지없이 드러날 때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특히 자신들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삶의 기준으로 살았는지를 보고 놀랄 것입니다. 

조그만 단칸방에서 30대 남자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폐결핵 환자입니다.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눕지도 못합니다. 
그저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아내도 그냥 죽어라 하는 식으로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30대 남자가 하는 말은 “목사님, 저는 피난 나올 때 죽은 사람 시체도 밟지 않고 내려왔어요. 제가 무슨 죄가 있나요?” 합니다. 
피를 토하고 죽어갈 정도가 되었으면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고, 고백할 만한데......... 
시체를 밟지 않고 왔다는 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자랑거리이에요 . 

그게 그의 도덕적 기준입니다. 
끝까지 잘했다는 겁니다. 
나만큼 산사람은 나와 보라고 합니다. 
세상 남자들, 세상 여자들, 다 그렇게 산다고 호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자기가 설정한 기준이 얼마나 유치한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얼마나 웃기는 것인지 놀랄 것입니다. 


②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가 여지없이 드러날 때 송구스러움과 감사함을 느낄 것입니다. 

송구스럽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25장에 보면, 심판의 날에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을 칭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25:34-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때 의인들이 송구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25:37-39절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임금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마25: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진작 당사자들은 다 잊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기억하고 칭찬하신다는 사실에 의인은 몸 둘 바를 모르고 송구스러워 할 것입니다.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은, 여지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부끄러움과 더불어 이런 죄인을 구원하신 주님의 은총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죄의 확신을 얻어 감격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영생과 영벌이 결정되는 순간에 사죄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죄인을 용서하시다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할 뻔 했겠는가?” 


3. 지옥은 영원한 고통입니다. 

14절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첫째 사망’은 육체적 죽음으로서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사망’은 ‘불못에 던지우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것을 말합니다. 

계20:10절에 보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세토록!(for ever and ever)’ 

그래서 지옥의 고민은 ‘죽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 힘든 상황을 만나면 “죽기 밖에 더 하겠느냐.”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요즘 많이들 ‘콱’ 죽잖아요. 
그러면 ‘악플’에서도 벗어나고, 빚 독촉에서도 벗어나는 것 같지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둘째 사망, 지옥은 죽지 않는 곳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고통 받는 곳입니다. 

존 웨슬리는 ‘구더기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지옥에 가야할 사람으로 판결이 되면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아십니까? 
‘이를 간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같이 그 모습을 ‘이를 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24:51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25: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왜 이를 갑니까? 
언제 이를 갈게 됩니까? 
저는 아직 이를 갈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정변이 한참 일어나던 조선시대에 억울하게 자기 집안이 몰살하는 것을 본 한 어머니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이를 갈다가 이가 부러져서 뱉어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를 간다.’는 말씀을 자꾸 하시기에 ‘왜 점잖은 분이 이를 간다고 말씀하실까?’라고 언짢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무서운 말이잖아요? 
그런데도 예수님의 입에서 사정없이 “이를 갈리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그 무서운 심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곳이기에 주님이 그곳에 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십니까? 
이 말씀을 좀 귀담아들으세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을 믿는다면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옷을 벗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복음성가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그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탕자를 살려준 주님 말씀에 죄인의 두 다리 묻어 두었네. 
아들이여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남은 몸 모든 영혼 바치라 하네. 

골고다 언덕길 오르신 예수 추수할 일꾼들 찾아 부르네.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막장인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40도가 넘는 깊은 땅 속에서, 온 몸에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쓰고, 석탄을 캐는 삶을 막장인생이라고 하잖아요. 
지금은 작업환경이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연탄 가루가 폐에 들어가 규폐병이라고 하는 직업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막장인생을 산 사람이 자기의 어린 자식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오 사랑하는 아들아, 공부 열심히 해서 너도 나를 따라 탄광에 와서 일해라”하는 아버지는 천하에 없을 것입니다. 

탄광 광부의 아들이 쓴 시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광부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난 어차피 광부니까 열심히 일해야 되겠지만 너는 커서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막장 속에 들어오지는 말라.’ 

피맺힌 아버지의 소원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광부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것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이 무서운 심판과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사랑하는 남편에게 “당신,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아는데도 자식들에게 “너희들 원하는 대로 인생 살아라. 신앙은 자유니까!”라고 방심할 수 있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막아야지요.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옥을 면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옥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죄를 홀로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는 길만이 지옥을 면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석가모니가 이런 말을 했나요? 
마호메트가 이런 말을 했나요? 
아니면 공자가 이런 말을 했나요? 
모르니까 못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만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오직 이 길 뿐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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