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 (요일 4:7~11, 20~21)

  • 잡초 잡초
  • 441
  • 0

첨부 1


사랑이 풍성한 공동체 (요일 4:7~11, 20~21)
         

우리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것을 모르는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자자의 강령이니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 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숱한 정의가 있어왔지만, 단 한 문장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없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어떤 말을 총동원하고 수백마디의 말로 하나님을 묘사한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보다 더 잘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 것이 바로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사 우리를 구원하신 일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 하네./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 사/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성도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오 하나님/제가 만일/제 마음을 다하고/뜻을 다하고/목숨을 다하고/힘을 다하여/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저는 제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다른 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제가 사랑하는 모든 것 가운데/주님을 가장 우선하게 하시어/덜 사랑하고 덜 충성해야 하는 것들로부터/저를 해방시키시고/주님을 첫 사랑으로/저의 가장 소중한 재산으로/그리고 저의 최후의 기쁨으로/받아들이게 하소서! 

제가 신학생 시절에 어떤 후배가 “나는 공부는 조금 못해도 주님을 한번 미칠 듯이 사랑해 봤으면 좋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후배 신학생은 목사가 되어 목회를 잘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후배의 말을 기억하면서 “주님, 저도 미칠 듯이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해주소서.”라고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남보다 잘해보려는 욕심이 있기 마련인데, 성도 여러분, 기왕에 욕심을 품으려면 “나도 주님을 미칠 듯이 사랑하게 해주시고,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찾아오신 사랑입니다. 곧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영원자가 유한자에게, 절대자가 상대자에게, 빛이 어두움에, 의로우신 분이 죄인에게 찾아오신 사랑입니다.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권세 있고, 돈 있고, 이익이 있을 만한 사람을 찾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낭패와 실망 당한 자, 고통 중에 있는 자, 외롭고 버림받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더 먼저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은 희생적입니다. 아가페는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이 아니고 이타적입니다. 이러한 아가페의 최대 표현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아가페는 영원한 것입니다. 끊을 수 없고, 변하거나 퇴색하지 않고, 시들지 않고, 끝이 없고, 그래서 영원한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본문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는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가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사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에 이런 장난을 해 본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자석을 사기도 힘들었을 때인데, 보통 쇠를 자석으로 만들려면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냥 쇳덩어리를 가지고 기차가 지나가는 철길에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자마자 뛰어 들어서 그 쇠를 철로에 비벼대는 것입니다. 방금 엄청난 마찰로 기차가 지나갔기 때문에 철길은 잠시 자성을 띄게 되고, 그 위에 쇠를 비비면 자성이 전달이 되어서 미미하게나마 물체를 당길 수 있는 자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석이나 쇠나 겉보기에는 똑같이 쇠붙이로 보입니다. 하지만 쇠나 자석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 바로 다른 쇠를 붙여 보면 압니다. 다른 쇠를 잡아당기느냐, 아니냐에 그 쇠가 자성을 갖고 있느냐? 아니면 평범한 쇠냐?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자석 옆에 오랫동안 놔둔 쇠붙이는 저절로 자석이 되고 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가지는 독특한 향기와 힘이 배어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냐? 를 알아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 사람에게서 사랑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 유명한 사랑의 장에서 역설하기를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력과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며 살게 됩니다. 잠언 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였고, 잠언 17:19에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라고 했으며,  벧전 4:8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죄지은 사람을 무턱대고 옹호하거나, 덮어놓고 두둔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가페는 남의 잘못이나 허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거나 퍼트리는 대신에,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것들을 교정시켜 주려고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우리 눈에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이 자꾸만 눈에 뜨입니다. 시기하는 눈,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허물과 잘못만 보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잘못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고 신일 것입니다. 사람에게 허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이 미워하는 눈으로 보면, 이 허물이 눈에 크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이 내 눈에 뜨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게 사랑이 없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시작해서 세 마디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허물만 자꾸 들추어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이렇게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하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고 계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길가에 한 마리의 개가 죽은 지 오래되어 썩어서 구더기가 쓸었는데, 그런 것을 본 제자들이 “선생님, 저 죽은 개를 보십시오. 구더기가 생기고 더럽기 한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니까, 예수께서 옆에서 그 말씀을 듣고 계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여보게들, 아니 왜 죽은 개에게 붙어있는 구더기만 보나? 저 개의 이빨을 보게, 옥과 같이 희고 아름답지 않나?”라고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허다한 허물을 덥습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라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면서 미움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먼 데 갈 것 없이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부부간에 사랑하십시오. 그럴 때 가정이 화목해지고, 사회가 평화로와 집니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형제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끼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같은 직장의 동료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끼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끼리끼리만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가 함께 사랑하자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초대교회에 권력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재벌이 많이 있었습니까? 학식 있는 사람이 모였습니까? 사실 그러한 특별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부흥했습니다. 바로 그 부흥의 원동력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뜨거운 사랑이 저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굶주린 많은 사람들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을 발견하고 구름같이 교회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면 또한 우리가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문 중에서 인용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 중 하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희 선친이 그런 분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아버님이 학교 수위 노릇을 하실 때, 교장실 연탄난로와 수위실의 연탄난로가 서로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장실의 난로 뚜껑이 깨져서 연탄가스가 새자, 서무과장이 저희 아버님 비번인 날 와서 수위실의 난로뚜껑과 바꾸어 갔습니다. 다음날 출근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아신 저희 아버님께서, 깨진 난로뚜껑을 들고 가셔서 바꾸어 오셨습니다. 교장실로 가시는 길에 서무실에 들러 서무과장을 교장실로 거의 끌다시피 데리고 들어가셔서 “교장은 가스 맡으면 죽고, 수위는 가스 맡아도 사느냐. 당장 교장님 것 새것으로 사드려!”라고 큰 소리를 치셨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정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좋습니다. 

살다보니 저희 아버님과 같은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교회에도 보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분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반듯하고 정의로우신 분들입니다. 말을 해도 대개 옳은 말과 바른 말을 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교회에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회를 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정의롭고 거의 언제나 옳은 말을 하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건강해지지 않았습니다. 반듯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진심이 없다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하여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어찌 보면 참 잔인합니다. 곪은 상처를 보면 서슴없이 칼을 들어 그것을 쨉니다. 쨀 뿐만 아니라 잘라내기도 합니다. 의사는 그런 면에서 냉정하고 좀 잔인(?)해야만 합니다. 의사가 인간적인 약한 마음에 환자가 아플 것을 염려하여 수술을 머뭇거린다면, 병을 키워 환자를 위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사들이 칼로 째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의사들은 짼 후에 그것을 반드시 꿰맵니다. 꿰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꿰맨 상처가 잘 아물 때까지 치료합니다. 째는 시간보다 꿰매고 아물도록 치료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어서 환자는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외과 의사와 같습니다. 옳지 못한 것을 보면 칼을 들어 서슴없이 수술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저들은 쨀 줄만 알았지 싸맬 줄을 모릅니다. 꿰맬 줄을 모릅니다. 꿰매고 치료할 줄을 모릅니다. 상처를 째고 싸매지 않으면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위험할 수 있습니다. 수술 때문에 사람이 죽게 될 것입니다. 수술은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것이지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싸맬 줄 모르는 사람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말은, 교회와 사람을 살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 수술의 성공률은 제로입니다. 그는 사람과 교회를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는 대개 그것을 모릅니다. 왜? 자기는 옳은 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에게 옳은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옳은 말을 다시 말해서 천사의 말을 사랑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 말을 사랑으로 하십시다. 옳은 말은 참을성 없이 함부로 쏟아 내지 말고, 오래 참으면서 사랑으로 그 말을 숙성시켜 말을 한다면 아마 탈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지 않는 것이랍니다. 교만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옳은 말이라고 함부로 남의 인격까지 건들이면서, 무례하게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십니다.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하십시다. 그게 사랑으로 하는 옳은 말입니다. > 교회 안에서 우리가 말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말조심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산울림’이 라는 작자 미상의 시가 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은 산울림/아! 하면 아! 하고/어! 하면 어! 하고/야호! 하면 야호! 하고/대답하며 다시 되돌아온다오.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하면 한 사람이 날 사랑하고/ 내가 열 사람을 사랑하면 열 사람이 날 사랑하고/내가 만인을 사랑하면 그 만인이 날 사랑하게 된다오./사랑은 산울림이라고 하는 시입니다. 어떤 사람 꼴 보기 싫어서 교회 안나간다고 하는 신자들이 있고, 우리 교회는 사랑이 있네 없네 하는 신자들이 있는데, 다 유치해서 그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예배당을 지었으면 무엇 합니까? 아무리 좋은 시설을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파인들레이는 “사랑은 교회에서 능력의 첩경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풍성한 성도, 가장 드높은 인격의 소유자요, 사랑이 풍성한 성도, 주님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그리스도인이라 확신을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풍성한 교회, 가장 소망이 있는 교회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행복한 사랑공동체의 일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