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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1) (롬 1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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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롬 12:9~11)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에 나오는 기사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 청년은 많은 재물과 권력 그리고 젊음까지 함께 소유한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볼 때에는 모자란 것이 없는 부러울 것이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은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는지라 자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 영원히 그 세속적인 안락함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청년의 내적인 욕심을 꿰뚫고 있었던 주님은 뜻밖에 요구를 하셨습니다.
마 19:2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질문은 청년을 혼란스럽게 했음에 충분합니다.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영원히 갖고 싶은 심정으로 주님을 찾았는데 바로 그 재물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정곡을 찔린 청년은 주님의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청년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마 19:22절입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먼저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을 위해서 불편하게 살기로 결심한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위하여 불편하게 살기로 결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을 빙자하여 도리어 이 세상에서의 만연한 악과 즐기며 살다가 그 죄악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하여 도리어 예수님을 한 낫 죄악을 떨쳐 버리는 액땜정도의 도구 전락시켜 버리는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교회가 정말로 이러한 현대 크리스천들의 왜곡된 일탈을 바로 고쳐주고 수정해야 하며 치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방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달 여 동안 ‘성도’라는 별칭을 가진 대중 스타들의 자살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의 자살은 사회적인 충격의 이슈가 되고 있지만 목사인 저에게는 또 다른 시각의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생명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을까? 의 질문에 대하여 굳이 대답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든지 아니면 또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정한 삶을 가르치지 못한 교회의 나약성 때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도록 지도하고 교육하였다면 이러한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래서 교회의 역할은 중차대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대사회적으로 분명한 영적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신문 보도에서 접한 내용으로 이번에 자살을 결심하고 행동한 성도라는 이름의 최진실성도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했던 모 여성 잡지사의 기자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면 적어도 이런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들의 선조들이 했던 말 가운데 ‘시작이 반’이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적어도 일련의 사회적인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이 어간에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사명감을 갖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이 땅의 구원해야 할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몇 주 동안 본문을 중심으로 살피면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은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거짓이 없는 사랑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을 주목합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바울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백성이라면 거짓이 없는 사랑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아가페’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가페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던지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역설하고 있는 사랑은 그래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바울은 동시에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거짓이 없다고 말입니다.
본문에서 거짓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anupokrito"’(아뉘포크리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의 원어적인 뜻은 ‘위선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충청지역 9개 지방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여러 종목 중에서 축구가 역시 가장 중요한 경기였는데 우리 지방하고 경기를 하지 않았던 다른 구장에서의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경기를 하던 어떤 목회자가 상대방의 선수와는 상관이 없이 큰 모션을 하면서 넘어졌습니다.

그러자 심판을 보던 주심이 넘어진 그 목사님에게 옐로카드를 보이면서 경고를 주었습니다.
이유는 페널티 킥을 유도하기 위한 비신사적인 행동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신사적인 행동을 무엇이라고 축구전문용어로 표현합니까?
헐리우드 hollywood action 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말로 ‘simulation action’이라고도 합니다.

본문 9절의 ‘거짓이 없다’의 의미를 갖고 있는 ‘아뉘포크리포스’라는 단어를 그래서 영어성경의 고전인 KJV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Let love be without dissimulation.’
직역하면 ‘위선이 없이 사랑이 있게 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사랑의 개념을 논할 때 대 전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거짓이 없는 진실함입니다.

저는 가끔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얻는 아주 깊은 은혜에 감격하곤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상태임을 보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만났는데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런데 마침 유대인들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 그를 도와서 돌보아 줍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에게 붓고 싸매고 자기의 짐승에 태워 가까운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내용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도움의 손길도 우리는 정말로 대단한 일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칭찬에 인색한 사람들이 그 정도는 일반적인 교육의 수준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형식적인 사랑의 행위라고 평가절하 한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적인 도움이라고 백번 양보합시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 다음에 행한 일을 보면 우리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이 그렇게 요식적인 행위로 사랑의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거짓이 없는 진실한 주님의 사랑의 모습으로 사랑을 한 것임을 입증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35절을 가슴으로 읽으십시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자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강도 만난 사람이 하룻밤에 어떻게 육체적인 곤고함을 당할는지 염려햇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의 사실이 감동입니다.
그는 본인의 일 때문에 그 주막을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2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보아 줄 것을 당부합니다.

만약에 비용이 더 들면 거기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전에 우리들이 사용하던 개역판 성경에는 ‘부비’라고 번역했는데 이 부비를 영어성경에서는 'additional charge' (가산금)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숙박비, 치료비를 지불한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제는 치료와 돌봄을 위한 가산금까지도 본인이 담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실함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언제 행하셨습니까?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시험을 하면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질문할 때였습니다.

율법 교사들은 율법 조문의 준수만이 영생의 조건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예수님을 시험한 것인데 주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증거 하면서 그들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율법 준수가 아닌 사랑의 실천임을 천명하시면서 율법 학자들에게 영적인 비수를 꽂았습니다.

눅 10:37절 2f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교우 여러분!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산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될 때 이 사회가 자살의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한국의 5만 교회의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사랑의 메신저들이 될 때 제 2의 최진실 성도는 다시는 나오지 않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한국교회의 교우들이 계산하지 않는 거짓이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살 때 제 2의 안재환 성도는 나오지 않지 않겠습니까?
 

2. 형제 사랑을 먼저 하는 삶입니다.

본문 10절을 다시 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본문에서 바울은 형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형제는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10절에서의 바울의 권면의 백미는 ‘먼저 하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명 중에 하나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10절에서 기록한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9절의 사랑이라는 단어는‘agaph’인데 비해 10절의 사랑이라는 단어는 ‘filadelfia’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미 우리 교우들에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세 가지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말하는 ‘아가페’ 사랑과 친구와의 우정과 사랑을 말하는 ‘스톨게’의 사랑과 형제애를 말하는 필레오의 사랑이 있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표현된 사랑의 단어가 바로 형제애를 말하는 필레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전제했듯이 형제애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에 비해 조건부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리 사랑이라고 해도 형제애의 사랑은 조건을 따지게 됩니다.

옛날에 섬기던 교회의 부흥회에서 부흥사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기억에 있습니다.
농촌마을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슬하에 네 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딸 넷이 다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나 도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설 명절이 되어서 네 딸들이 부모님을 뵈러 농촌으로 들어왔습니다.
큰 사위는 서울에서 변호사로 있는데 시골에 장인 장모를 뵈러 들어오는 데 백화점에서 갈비 세트하고 상품권을 구입해서 선물로 드렸습니다.

둘째 사위는 행정고시를 패스해서 서울에서 고위직 관리로 일을 하는데 명절을 맞이해서 장인, 장모께 선물을 장만해서 드렸는데 장인께는 고급 양복 구입 상품권을 장모께서 한복 구입 쿠폰을 드렸습니다.

셋째 사위는 대학교 교수인데 역시 처가의 부모님께 선물을 장만했는데 아주 비싼 건강 보조식품을 구입해서 드렸습니다.

막내 사위는 건강하고 정신이 아주 똑바른 사람이었는데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해서 노동판에서 힘들게 하루를 연명하며 살았습니다.
장인, 장모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을 다한 속내의를 포장해서 선물로 드렸습니다.

시골집이 다 그렇습니다만 네 딸들이 모여 음식을 장만하는데 부엌이 밖에 딸려 있는 시골집이어서 부뚜막에서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친정 엄마가 딸들을 향해서 소리를 쳤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는 날씨가 추운데 방안에 들어와 전을 부치고 부엌일은 막내가 맡아” 

막내는 추운 겨울에 부엌에서 추위와 싸우며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 때 부흥강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에 있습니다.
“돈이 웬수다.”

부흥사의 말이 만들어 낸 말인지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친정 엄마의 편애가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기간에 우정과 사랑이 조건이 없이 실천되기란 정말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동기간의 사랑인 필레오의 사랑은 조건적이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조건적인 사랑을 전제하는 형제간의 사랑의 위대한 포인트는 그래서 ‘먼저 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애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는 동기간의 사랑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먼저 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랑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복을 놓치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형제 사랑을 먼저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될 때 이 땅에 절망의 그늘은 벗겨지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형제의 사랑을 실천할 때 이 땅에 자살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 교우들이 먼저 사랑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해바라기라는 가수가 요즈음에 간증집회를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단의 큰 집회는 아주 많이 사역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만들었던 노랫말 중에 ‘사랑으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전에 한 번 불러 본 경험이 있는데 오늘 설교의 내용과 어울리는 것 같아 이 노래를 함께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이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전해지기만 한다면 정말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살맛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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