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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낯선 사람들 속의 나 (마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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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 속의 나 (마 7:12) 


저명한 작가이며 비즈니스 리더인 프레드 스미스는 리더로서의 수많은 경험 끝에
“사람은 의미를 갖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삶을 단조롭게 생각하고, 자기 일을 고된 일로만 생각한다. 한편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삶과 일을 다른 사람들의 삶을 즐겁고 해복하게 해 줄 기회로 삼는 사람이다. 

몇 년 전에 우리 사회에서 신선한 감동을 주었던 “우체부 프레드”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프레드는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 행복을 통해 자기 존재 의미를 풍성하게 누렸던 사람이다. 

프레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미를 갖고 싶어하는 소망, 매일 행복하고 싶은 바램을 충족시켜주는 우편 배달부이다. 그래서 그는 우편물이 안전하게 집주인에게 배달되도록 신경을 쓴다. 우편함에 우편물을 단지 쑤셔 넣지 않는다. 집 주인이 휴가 중이나 출장 중이면 우편물이 쌓여서 도둑들이 칩임 할까봐 잘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배달해준다. 집 앞에 쓰레기가 흐트러져 있으면 줍는다. 프레드는 우편물 배달만 아니라 집 주인의 안전을 걱정해준다. 

“우편 배달부”를 쓴 저자가 프레드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한다. 
“왜 그렇게 일하십니까?”

프레드의 대답이다.
“나는 매일 행복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얻는 만족감이 내게 그런 자부심을 느끼게 해줍니다.”

“하루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마다 마을 사람들을 진정으로 돌보았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습니다. 나는 그들을 고객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 말이 무척이나 낯설게 들리는군요. 다만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을 따름입니다. 서로 도와주고 서로 기대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프레드는 고백한다. 다른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삶을 살고 싶다고! 그에게는 그런 일이 예수님이 가르쳐준 황금률에 맞춰 사는 것만큼이나 간단하다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환경미화원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면,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베토벤이 교향곡을 작곡하고, 셰익스피어가 시를 쓰듯이 청소해야 한다. 그가 타고난 능력을 다하여 거리를 깨끗이 청소할 때 천국과 지상의 주인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심으로 한 환경미화원이 여기에 살았다’라고 칭송할 것이다.”

우체부 프레드는 킹 목사의 이런 가르침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것이든 의미를 가지고 특별하게 해낼 때 무의미하고 평범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프레드 같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전히 세상은 삭막하고 힘들까요? 왜 모두가 낯설게 보이고, 때로는 거울 속의 나 자신도 낯설어 보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자신이 서 있는 처지에서도 한사코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하고 우리 죄를 수긍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은 황금률(Golden rule)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신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는, 이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의 다른 모든 명령들도 지키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다른 하나는 이 교훈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도덕과 윤리의 기본이라는 말이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여기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고, 황금률은 그것을 요약한다. 그러기에 황금률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요약한다. 

황금률의 실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먼저 나 자신이 바른 양심과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은 어떤 사람을 향해서 하는 말인가? 적어도 자기가 자신을 무엇으로 대접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아는 사람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다. 진정 자기 존재를 알고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양심이 바로 된 사람이 되라.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고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자기를 바로 알고 바로 대접하는 사람이 남을 바로 알고 바로 대접한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서로 부적절하게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한 자비와 사랑으로 대한다.

복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바른 양심과 신앙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활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새롭게 깨닫는 사람은 자기는 물론 타인도 새롭게 바라본다. 의식의 확장을 가져온다.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게 된다. 냉정하던 사람이 이해심이 생긴다. 비판하던 사람이 긍휼을 가진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된다. 예수님은 고귀하신 하나님이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이해하셨다. 굶주림, 헐벗음, 집이 없음, 병든 몸, 억울함과 비참함을 아셨다. 예수님은 인간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친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다. 이해하시고 사랑하셨다. 치유하시고 자유를 주셨다. 

독일에서 디아코니아, 즉 사회봉사에 종사하는 어떤 분이 자기 딸 이야기를 써 놓은 것을 보았다.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딸이 어느 날 아침 일어나자 말라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아, 나는 이제 교수가 안 되어도 좋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한 번도 교수가 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딸은 그런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니? 딸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집안 분위기를 통해, 책이 즐비하게 꽂혀있는 서재와 거실을 보면서, 늘 아버지가 하는 말이나 추구하는 것을 보면서, 이 딸은 아버지가 소망하는 것을 자기도 따라야 하는 줄로 여겼다고 한다.

그 때서야 아버지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내 딸은 소아마비로 비록 장애지만 이 상태 그대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의미를 가질 수 있구나!” 

아버지는 늘 딸이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의사와 병원을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비정상인 딸을 정상으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다. 정상적인 학교에 넣어서 제대로 공부를 시켜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병은 낫지 않고, 학교를 제대로 졸업한 곳은 없다. 이제 성년이 된 딸을 보며, 비록 소아마비로 장애인이지만 자기 딸은 그 나름대로 ‘정상’으로 살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딸의 마음속에 자기의 소망이 살아있었던 것을 깨닫고는, 자기의 마음속에도 딸의 소망이 있음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함을 깨닫는다. 


둘째로 황금률은 자기에의 배려를 넘어서 타인을 배려하라는 말이다. 남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바로 대접하라는 말이다. 

남을 대접하려면 남의 입장에서 타인의 요구를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펴낸 입문서 제목이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이다. 낯선 문화에 들어가서 살아보아야 진정한 자기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여행 중에 더 애국자가 되는 것과 같다. 타문화는 자기문화의 거울이다. 차이가 있어서 풍성해지는 것이다. 다 같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예술도 멋도 사라질 것이다.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물질이든,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이든, 명예나 지위나 권력에 대해서도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는다. 

어느 부흥사에게 들은 이야기기가 생각난다. 
결혼 한 지 얼마 후, 신혼부부가 싸움을 했다.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야한다는 신부와 고추장에 찍어먹어야 한다는 신랑의 말다툼이 큰 싸움으로 벌어졌다. 우리 가문은 조상 대대로 감자를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는 신랑의 말에, 신부의 “당신 집안은 조상 대대로 웃기는 집안이다.”는 맞대응이 화근이 되었다. 그 날 밤 신랑신부가 각자 다른 방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신랑 어머니가 “그럼 우리 집안이 웃기는 집안이면 당신네 집안은 울리는 집안이냐?”며 급기야는 양가의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이혼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감자사건이다.
그래도 이혼 전에 전문가에게 한번이라도 진단을 받고 헤어지자, 누가 옳은지? 하고는 서울의 유명한 대학교 식품영향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그런데 교수님이 말문을 못 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고는 
“글쎄요? 누가 옳은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조상 대대로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었소.” 라고 대답했다. 

과연 누가 옳은가? 아니면 과연 누가 틀렸는가? 내 기준으로만 보면 남이 틀렸고, 상대방 기준으로 보면 다 맞다!

내가 어느 교회에서 이 감자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성도가 “목사님, 우리는 감자를 김치하고 먹는데요!” 하고, 또 다른 집사님은 “목사님, 우리는 조상대대로 감자를 아무 것도 안 찍고 그냥 먹었습니다.” 토마토 케찹은 어떻고 마요네즈는 어떠한가! 사소한 일로 마음 상하고 상처주고 서로 간에 장벽을 쌓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다. 

차이는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내 인격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느 때나, 어느 순간이나 사람들로부터 수용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자기와 다르더라도 존중해주기를 바라지 않는가? 혹 내가 실수를 할지라도 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인내로 대해주고, 관용으로 받아주기를 바라지 않는가? 다른 사람도 나와 똑 같은 심정이다. 
그래서 낯선 사람 속에 내가 들어있고, 내 안에 너가 있음을 깨닫는다.

누가 분노 하는 것을 보면 분노하는 나를 직시하게 된다.
누가 슬픔에 떠는 것을 보면 외로움과 두려움과 아픔으로 눈물 흘리는 나를 보게 된다.

민주화는 진척되었고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우리 마음은 여전히 갈등과 아픔으로 힘들어 한다. 한국에 거대한 높은 빌딩은 많이 들어섰지만 작고 낮은 심장은 차갑기만 하다. 인천공항을 통해 제트기를 타고 수 천 마일 수만 마일을 날아갈 수 있지만 이웃과의 거리는 여전히 멀기만 하다. 부부간에, 고부간에, 친척간에,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 선생과 학생 사이에, 정당과 정당 사이에,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 여전히 냉기가 흐리고 배려와 관용과 사랑은 무기력하다. 
나라는 부해지고 사람들의 소유는 늘었지만 조그만 손해라도 보면 죽일 듯이 광기를 드러낸다. 너무 근시안적이다.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너무 배려가 없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인간, 배려하고 환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황금률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바로 잡는 가장 중요한 진리임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배려하는 자세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다. 본문 성경 7장 12절의 해석에는 그 앞에 있는 전제를 고려해야 한다. 예수님은 7장 7-11절에서 말씀하셨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하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9월에 독일을 다녀왔다. 16년 만에 유학시절 목회했던 한인교회를 돌아보았다. 공부를 끝나기 1년 전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결단했다. 당시 목회했던 교회가 너무 약하여서 다른 교회와 합치고, 한국에서 좋은 목사를 모시는 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라고 믿고 추진했다. 당장 교회를 그만두면 그나마 받던 생활비도 끊어지고, 교회도 떠나야 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은 이런 충고를 했다. “너무 서둘지 말라. 공부 다 끝나고 귀국하기 직전에 교회를 합쳐도 좋지 않은가!” 그래도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내 필요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추진했다. 많은 위기와 우여곡절 끝에 교회가 연합했다. 한국에서 우리 교단 총회 파송 선교사 신분으로 담임목사를 초청했다. 

이번에 가 보니 내가 목회 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교회가 되었다. 두 교회를 합쳤어도 작은 교회였는데 이제는 베를린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고, 음악 하는 유학생의 요람이 되었다. 오케스트라와 성가대원이 70여 명이나 된다. 그 때 믿음이 흔들리던 사람들이 이제 중직자가 되어 매우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어 참 감동을 받았다.

또한 감사하게도 이번에 내 소개로 처음 교회를 나왔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치학 전공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지금은 국책연구원에서 일하며, 1년 연구 교수로 베를린에 와 있는 중에 서로 만나게 되었다. 16년이 지난 이번에 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사실 그는 당시 불면증으로 1년 이상 고통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린 날, 그는 처음으로 단잠을 잤다고 고백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 뜻을 따라 실천했더니 교회도 잘 되고, 이번에 저도 많은 환대를 받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그리스도인에게 먼저 닿아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복음은 자기 성공의 복음이 아니다. 번영신학의 복음도 아니다. 남이 잘 못되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복음도 아니다. “너 죽고 내 살자”가 아니다. 내가 돈을 벌거나 권력을 잡아서 내 이름 내며 좋은 일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 복음이다. 

천국 복음이란 하나님의 복을 내가 먼저 누리고, 동시에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의 젊음이나 직업이나 시간이나 돈이나 집이나 생명 자체까지도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이다. 내가 먼저 배부르고 난 후에 남을 먹이려고 하지 말고 남부터 먼저 먹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먹을 것을 채워주신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황금률을 지킨다면,

1) 모든 대화가 신실함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2) 모든 사업이 정직하게 거래될 것이다.
3) 모든 가정의 관계가 신실할 것이다.
4) 모든 시민의 마음이 충성심으로 가득할 것이다.
5) 모든 정당과 신념 사이에 관용이 있을 것이다.
6) 모든 국가 간에 평화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 진정 행복하고 즐겁고 성공하고 싶은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남을 대접하라. 행복한 삶의 키워드는 ‘배려’다. 우선 ‘스스로를 배려하라’. 나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인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두 번째는 ‘너와 나를 위해 배려’로, 진정 내가 원하는 바는 다른 사람도 원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관점으로 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모두를 위한 배려’다. 통찰력을 가지고, 상대방과 이 사회 공동체의 필요에 민감 하라. 

낯선 사람을 대접하고 환대하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나’의 가치를 높여준다. 배려는 가치의 혼돈과 위기의 시대에 안전한 길잡이를 마련해준다. 배려는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의 문을 연다. 대접하고 배려하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대접하고 배려하는 것은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향한 예수님의 간곡한 부탁이다.

기도: 좋으신 하나님, 오늘 주신 예수님 말씀을 내 생활에 실천하여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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