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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영혼에의 사랑 (막 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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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에의 사랑 (막 1:16~20)


우리 사회에 우울한 소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윌스트리트에서부터 시작된 금융 시장의 붕괴가 전 세계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멜라민 사건은 우리의 먹거리와 건강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불우한 가정 환경과 개인적인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기하는 듯한 배우 최진실씨의 죽음은 우리를 우울하고 슬프게 합니다. 우리 사회가 웃음을 잃어 가고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우리 사회를 침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두가 웃을 수 있을 때 웃는 것은 모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웃을 수 없을 때 웃고, 웃음을 만들어 세상을 밝게 만들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들은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19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이 곳, 저 곳으로 흩어져 쫓겨 다니던 사람들입니다. 반유대주의가 유럽을 휩쓸 때 유대인들은 다른 곳에서는 살 수 없는 거주의 제한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만 거하도록 제한된 게토에서 살았습니다. 히틀러에게 유대인 육백만명이 학살당할 때 그들은 언제 끌려가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머무는 게토에는 항상 웃음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갇혀 있는 감옥에서도 항상 웃음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믿음과 희망 안에서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어느 민족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머가 발달된 민족입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세계적인 재담가, 익살꾼, 유머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와 말로 할 수 없는 박해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웃음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유대인에게서 웃음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히틀러가 수많은 유대인들을 독으로 학살할 때 많은 유대인들은 소련으로 도망쳤습니다. 소련에는 영주권 없이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히틀러는 소련 경찰들이 유대인들을 잡아 넘길 때마다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소련 경찰들에게 유대인 사냥은 큰 돈벌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련 경찰들은 유대인만 보면 영주권 조사를 했습니다. 

마침 유대인 두 명이 길을 가는데 소련 경찰이 그들을 보고 그들에게로 다가 왔습니다. 두 명의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은 영주권이 있었고 한 사람은 영주권이 없었습니다. 영주권이 없는 유대인이 그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에게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영주권이 있는 유대인의 옆구리를 찌르며 ‘네가 도망쳐라!’고 말했습니다.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은 친구의 의도를 눈치 채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련 경찰은 도망치는 유대인이 영주권이 없는 유대인이라고 생각하고 쫓아갔습니다. 유대인이 한참을 도망가다가 이만하면 영주권이 없는 유대인이 안전하게 도망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도망가는 것을 멈췄습니다. 

뒤쫓아온 경찰이 헐레벌떡 뛰어와 숨넘어 가는 소리로 ‘너 영주권 없지?’ 라고 물었습니다. ‘영주권 있습니다.’ ‘어디 봐’ 유대인은 영주권을 보여 주었습니다. 소련 경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왜 도망쳤어?’ 유대인이 말했습니다. ‘의사가 나에게 약을 먹은 후에는 뛰라고 해서 약을 먹고 뛰는 중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뒤쫓아오면 서야 되잖아!’ 그때 유대인이 하는 말이 ‘나는 의사 선생님이 당신에게도 약을 먹고 뛰라고 해서 그래서 뛰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 행복을 만드는 웃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구와 어떤 만남을 가졌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만남에는 두 종류의 만남이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하나는 meet이고 다른 하나는 encounter입니다. 두 단어를 우리말로는 ‘만남’이라고 번역합니다만 두 단어는 의미적으로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meet의 만남은 서로에게서 별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 만남입니다. 우연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만남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소개 받은 만남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아무런 영향력도 주고 받지 않는 만남입니다. 사무적으로 만난 만남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encounter의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영향력을 받는 만남입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함께 동고동락 할 수 있는 생명적인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든지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오늘 이곳에서 그 분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나와 예수님과의 만남이 meet적인 만남인지, 아니면 encounter적인 만남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처럼 내가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meet적인 만남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내 인생의 가치와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변화가 있고,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뗄레야 뗄 수 없는 생명적인 encounter적인 만남입니까?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meet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도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도 보았고, 예수님과 함께 음식도 나누고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호기심에 의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들의 삶에 큰 영향력과 변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언제든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을 멀리하고, 거부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향해 거친 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 예수님을 encounter적인 만남으로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나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살았던 바디매오가 그렇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지만 그 직위까지도 예수님 때문에 내려 놓을 수 있었던 니고데모입니다. 자신의 자랑이었고 힘이었던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예수님을 따랐던 바울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나누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위로가 되었고 기쁨이 되었습니다. 

온전한 신앙은 예수님과의 meet적인 만남이 아니라 encounter적인 만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encounter적인 만남이 없으면 온전한 신앙생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고,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지만 결국은 그 예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져야 합니다. 

encounter적인 만남은 이해타산을 중심으로 한 만남이 아니라 섬김과 헌신을 중심으로 한 만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encounter적인 만남으로 만들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전적인 헌신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encounter적인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헌신적인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의 헌신에 감사하며 우리 또한 예수님을 위한 헌신적인 고백이 이어질 때 그 만남은 encounter의 만남이 됩니다. encounter적인 만남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려 놓는 헌신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1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고 부르십니다. 이에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시에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내려 놓음’ 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치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분과 함께 그 가치와 삶을 나누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려 놓는 헌신으로 응답함으로서 생명적인 만남이 시작됩니다. 진정한 헌신이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만남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meet와 encounter의 차이는 헌신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meet의 만남에는 상대방을 위한 헌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encounter의 만남에는 상대방을 위한 헌신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진정한 만남은 상대를 위해 헌신이 있을 때 그 만남이 진실한 만남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그러할진대 하나님과의 만남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encounter적인 만남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들의 헌신이 뒤따라야 한다면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강조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사람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도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에는 배와 그물을 버리는 헌신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신은 결국 ‘네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사람 사랑, 영혼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사랑은 사람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바로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다시 어부 생활을 하는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를 만납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을 대답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우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죽어가는 영혼이 당신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한 영혼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시면서 당부하신 마지막 명령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영원한 불의 심판을 향해 걸어가는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가슴 앓이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한 영혼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우는 것에 집중되어 계십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예수님의 핏값으로 세워진 교회의 최대의 목적은 선교입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한 영혼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늘에서 잔치를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한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 내 부모, 내 친한 이웃들의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들의 믿음 생활과 그들의 영혼의 잘됨,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많은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고 깊은 관계들을 맺으며 살아가면서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며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강권하여 구원의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하고 계시는데 얼마나 적극적인 마음으로 전도에 임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만남이 meet적인 만남이 아니라 encounter적인 만남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그것을 위해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encounter적인 만남을 통한 우리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한 영혼j의 구원과 돌봄으로 표현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죽어가는 한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과 긍휼한 마음을 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 한 영혼, 한 영혼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그 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실 줄을 믿습니다. 한 영혼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복음의 열매를 주렁 주렁 맺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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