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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소망을 가진 성도 (벧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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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을 가진 성도 (벧전 1:1~9)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수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때에 “너희들은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주님의 마음을 아주 기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베드로 사도가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고 권면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을 때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피난을 가기도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흩어진 나그네는 예수 믿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고향에 살 수 없어서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이 돌아 맞아 순교한 후에 수많은 성도들이 다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핍박을 참고 견디면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지만 대다수의 교인들은 다 흩어진 것입니다. 

마10:23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붙잡혀서 순교하게 된다면 순교하지만 그렇지 않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행9:25 보면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 바울의 제자들이 한 밤중에 바울을 성벽에서 광주리에 달아 내려서 바울을 도망가게 함으로 죽음을 피하게 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스데반 순교 후에도 성도들이 많이 흩어졌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고 예수 믿기 때문에 재산을 잃어버렸고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고 전 세계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이 흩어진 성도들이 그냥 도망가느라고 정신없었던 것 아닙니다. 숨어 다닌 것도 아닙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들은 복음을 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어요. 참 그들의 믿음이 대단합니다. 붙잡혀서 죽으면 죽는 것이고 붙잡힐 때 붙잡히더라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다녔어요. 

우리도 이 성도들을 본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박해를 당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에 흩어지게 하신 이유를 몇 가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너무 고생하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예수님 빨리 오시면 좋겠다. 차라리 천국 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면 좋겠다.” 고생할수록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천국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많이 당하게 되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더욱 더 거룩하게 신앙생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성도들에게 많은 환란과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라고 그렇게 하십니다. 

두 번째 이유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므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으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성도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어요. 자기 생활에 안주하려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해 강제로 그들을 전 세계에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베드로는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지금 베드로가 편지를 쓰고 있는 흩어진 나그네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예수 믿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기에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보니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축복입니까?

요15:16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아마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택해서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예수 믿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려 해요. 딴 길로 가려고만 하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큰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 인도해주셔서 강제로 예수 믿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다 믿게 될 줄 믿습니다. 

또 2절 보니까 “성령이 거룩하게 하시므로 순종하고” 그랬습니다. 성령이 거룩하게 해주신 사람이라는 거예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모든 표적을 보고 행적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갔어요. 이것을 보면 아직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으니까 달라졌어요. 성령 충만 받은 후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핍박이 와도 두려워 않고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확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받을 때에 이렇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2절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리심을 얻기 위하여” 그랬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뿌림을 받음으로 깨끗해지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뿌림으로써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오직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줄 믿습니다.

그 다음 3절 보니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해주신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거듭나게 된다는 것은 우리 노력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거듭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 앞에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참 거듭났는지 아닌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하면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이 썩어질 세상에 두고 사느냐 아니면 하늘나라에 산 소망을 두고 사느냐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세상의 소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소망. 이 소망은 생명있는 소망입니다. 영원한 소망입니다. 장차 부활해서 천국에 가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땅의 소망은 모두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예비된 그 모든 소망은 영원한 줄 믿습니다. 

5절 보니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산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이 세상을 생각하고 이 세상에서 누릴 영광을 생각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시기 바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지금이야말로 메시아의 때가 왔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는 그 순간에도 행1:6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그 중요한 시기에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16:21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예수님 십자가 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인데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한 자리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가 성령 충만 받은 다음에는 이 세속적인 생각이 다 없어졌어요. 그리고 이제는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산 소망을 갖고 있기에 6절 보니까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도 크게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시험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시험을 많이 당하지만 이 세상에서 당하는 시험과 고난은 잠시뿐입니다. 그리고 장차 누릴 영광은 크고 영원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고 그 고난이 올 때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4:17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환란과 시험은 잠시 뿐이며 아주 가볍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것 두려워하지 마세요. 깊이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시 당하는 것이고 오히려 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받을 영광은 너무나도 크고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받을 그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고난도, 시험도 잘 참고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또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는 시험이 시험이 되지 않고 시련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오는 시험은 죄에 대한 심판도, 저주도 아닙니다. 오히려 장차 영광을 받게 해주는 고난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험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은혜 받게 됩니다. 은혜 받게 되면 믿음이 더 강해지고 더 강해지고 나중에는 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무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시련이 됩니다. 

우리가 시험을 통해 물질을 잃고 친구를 잃고 건강을 잃었다 해도 오히려 이 시련을 통해 믿음이 강해졌다면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해도 믿음만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다 잃어버림으로 오히려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이것은 축복이요 더 귀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환란과 시험이 와도 크게 기뻐하며 사는 사람들은 장차 주님 오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여러 가지 시험이 와도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이 와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8절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대로만 살려고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뜻대로만 살아드리려고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거룩하게 살아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해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 하고 주님을 위한 꿈을 가지게 되고 주님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주님만 위해서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과 시험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기뻐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이 와도 크게 기뻐할 또 한 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데 9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그랬습니다. 어떤 시험이 와도 어떤 고난이 와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결과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 믿음의 결국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산 결과는 영혼의 구원이기에 오히려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산 소망을 가진 성도로서 어떤 환란과 시험이 와도 잘 참고 견딜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는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장차 주님 오시는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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