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버지의 마음 (눅 15:11~24)

  • 잡초 잡초
  • 375
  • 0

첨부 1


아버지의 마음 (눅 15:11~24) 


어떤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했다. 이유는 독립하고 싶다는 것이다.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고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은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서 며칠 후 집을 떠났다. 영영 안 돌아올 것 같이 먼나라로 가버렸다.

이제 그에게는 돈과 자유가 있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와 쾌락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 그의 삶은 방탕의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 들고 있었다. 

그의 무절제한 삶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었다. 돈이 다 떨어진데다가 그곳에 심한 가뭄으로 인해 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둘째 아들은 살기 위해서 돼지치기가 되었다.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져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는 자기 집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들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큰소리 치고 나온 주제에 다시 돌아갈 염치도 없었다.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아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큰 죄를 지었구나. 나는 이제 여기서 이렇게 굶어 죽게 되었구나.” 

참으로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자신이 약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단하였다. 
“집으로 가자. 그리고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부탁을 드려보자.” 

욕 먹고 쫓겨날 각오를 하고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가?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후로 아버지는 아들 생각에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리고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틈만 나면 동구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동구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왠 거지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마을을 향하여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아버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 거지가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인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 보았다. 아버지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달려 나갔다. 

아버지는 달려가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고 얼굴을 만지고 또 부둥켜 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들을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 주었다. 아들이 돌아온 기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본문 비유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보았다. 그렇다면 오늘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1.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아들이 가출한 이유는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의 삶은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었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은 둘째 아들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허랑방탕이요 둘째는 허비하는 삶이었다. 

영어 성경(뉴센츄리버젼)에는 ‘wasted his money' 'foolish living' 이라고 번역했다. 이런 삶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했다.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여러분! 이 세상에서 죄의 낙을 누리는 시간을 길지 않다. 껌의 단맛이 빠지면 밷어 버리듯 하나님을 떠나서 버려진 인생은 짐승과 같이 비참해지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돼지치기로 전락했고, 그의 양식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였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에덴 동산을 떠난 인간의 삶은 선하지가 않다. 예)mbc 드라마, 에덴의 동쪽 - 음모, 테러, 마약, 살인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거룩한 피조물이다. 타락한 본성의 유혹을 좇아 자유를 선포한 결과는 파멸이다. 우리는 그것을 둘째 아들의 삶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정욕을 좆아 달려간 말로가 굶주림과 고독과 고통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재물과 쾌락, 인기와 명예와 권세를 좇아 달려가지만 도리어 그것들에게 삼킴을 당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에게는 결코 행복을 있을 수 없다. 


2.회복의 길을 보여 준다.

회복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형편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해 남의 집 종살이로 들어 갔는데 그의 하는 일은 돼지치기요 쥐엄열매가 그의 양식이었다. 그나마 쥐엄열매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눅 15: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사람이 배부를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코너에 몰릴 때 내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참회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고백했다.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그는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무시한 태도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무시한 태도라는 뜻이다. 그는 집에 있을 때 아버지의 교훈을 듣기 싫어 했다. 매사에 반항적이었다. 경건한 아버지의 충고를 잔소리로만 여겼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예)안요한 목사, 실명한 후에야 자신의 불순종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왔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실패를 통해 죄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하루 하루 눈물로 회개하였을 것이다. 

회복의 세 번째 단계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으나 무슨 염치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쳐나올 때를 생각하면 차마 돌아갈 용기가 나질 않았을 것이다. 몇날 며칠을 고민했을 것이다. 결심이 섰을 때 그는 발걸음을 아버지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진정한 회개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회개가 생각으로 끝나면 후회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의 의지까지도 하나님 앞에 굴복시켜야 한다. 신자가 똑 같은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는 죄악된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내가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 놓고 나와야 한다. 그것이 참된 회개요 진정한 회복이 되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 집을 향하여 돌아오고 있다. 두 손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누더기를 걸친채 아버지 집을 향하여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둘째 아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올 때 회복은 시작된다. 그는 비록 실패했으나 지혜로운 결단을 한 것이다. 


3.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눅15:1-10의 말씀을 본문으로 두 가지 비유에 대하여 증거했다. 그 비유에서 우리는 목자의 심정으로 찾아나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오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1) 아버지는 걸인이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금방 알아 보았다.

(눅 15:20)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은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피골이 상접한 아들을 금새 알아 보았다. 아버지는 신도 신지 않은 채 달려 나갔다. 동네 사람들은 못 알아봐도 아버지는 알아 본다. 

부모는 학교 운동장에서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어도 자기 아이들은 금방 찾아 낸다. 
신통력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다. 관심과 사랑이다. 나는 시력이 좋지 않기도 하지만 여러 아이들 중에 우리 아이를 바로 찾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핀잔을 듣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역시 엄마가 낫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남자는 일에 관심이 쏠려 있고 여자는 자녀들에게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2)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사랑은 몸에서 냄새가 나고 땟국물이 흘러도 문제가 되질 않는다. 아들을 향하여 달려가는 발걸음은 쏜살 같다.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신도 신지 않고 달려 나갔다. 땀과 때로 쪄들어 냄새나는 아들의 몸을 두 팔로 힘껏 품었다. 

얼굴을 만지고 입을 맞추고 얼굴을 들여다 보고 또 입을 맞추었다.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감사해서 아들을 부둥켜 안고 쓰다듬었다. 아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 들은 채도 않았다. 돌아온 것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이미 용서하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들에 대해 벌 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3)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김.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죄의 고백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겼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탕자의 귀향이 소문낼 일은 아닐 것이다. 돌아온 아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행사를 위해 예비해 놓았던 살진 송아지를 잡도록 한 것은 잘 잘못을 떠나 아버지 입장에서 아들은 대단히 소중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하는 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비록 불한당 같은 불효 자식이었지만 그가 돌아옴을 인해 아버지는 기쁨이 되었고 혼자 누릴 수 없는 기쁨이었기에 함께 즐거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에게 뛰어난 영성가로 알려진 gps리 나우엔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신부이면서 하버드와 예일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세상적인 명예와 부를 다 버리고 카나다 토론토 근교에 있는 라쉐공동체에서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어느날 러시아의 빼째르부르그의 에르미타즈궁 안에 전시되어 있는 “탕자의 귀향”이란 그림을 감상했다. 그 그림은 렘브란트가 눅15장 탕자의 비유를 배경으로 창작한 그림이다. 그가 그 그림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비유의 말씀에 근거해서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3가지로 요약했다.

1) 슬픔 :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엄청난 방탕과 탐욕과 음난과 폭력과 분노와 원망을 바라볼 때 아버지는 쏟아지는 눈물을 그치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에는 슬픔이 있다는 것이다. 

2) 용서 : 우리는 용서에 대하여 조건을 붙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에는 조건이 없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는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았다.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3) 관용 : 돌아온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었고,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신을 신겨 주었다. 그의 허물을 들추어 내고 그의 형과 비교해서 불이익을 당하도록 조건을 붙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를 위해 살 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다. 진정한 관용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까지 정력과 시간과 물질을 주며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사실, 이 세가지 마음은 실제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에 능했지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슬퍼한 일이 적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슬픔과 용서와 관용, 이 세 가지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우리가 그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설령 탕자 돌아왔다 할지라도 그는 또 다시 가출할 것이다.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빙고라는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는 형무소에서 4년간 복역하다가 가석방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자기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만일 나를 용서하고 받아 들인다면 마을 어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 두라고...,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난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 버리겠다”고... 버스가 마을 어귀에 가까이 다가 왔을 때. 승객 중의 한 사람이 외쳤다. 앗! 저기 봐요! 저기!" 그때 승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커다란 참나무가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나무 아랜 단 하루도 그를 잊어본 적이 없는 그의 아내가 서 있었다.

어린이 단편소설, ‘노란 손수건’의 마지막 대목이다. 어떤 설교자는 석방수를 둘째 아들로, 그의 아내를 아버지로 각색해서 인용하기도 했다. 오늘 비유 말씀 만큼이나 감동적인 이야기다. 석방수 빙고의 아내의 마음에 용서와 관용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집을 튀쳐 나간 탕자와 같으나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그 사랑과 그 은혜를 항상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근심하며 불쌍한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마귀 자식들이 아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사랑과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3) 그리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용서하고 용납하고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품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