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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자 (요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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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자 (요 13:35)


김병삼 목사님이 지은「하나님을 눈물 나게 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교회 가족 찬송경연대회에서 한 집사님이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습니다.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그 집사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자리에 돌아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어 목사님 가정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도 가사를 틀리게 불렀습니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를 읽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7월 14일, 가족 찬송경연대회가 있었다. 김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다음 차례로 우리 가족이 찬송을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게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저는 그 글을 읽고 ‘나도 그런 목사가 되어야 할텐데, 좀 더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난 2월 11일부터 3월 21일까지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실시했습니다. 인생은 아무런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목적을 기억하십니까? 첫째 목적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계획되었습니다. 둘째 목적은 교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셋째 목적은 훈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넷째 목적은 사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다섯째 목적은 전도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내일부터 40일 동안 [공동체를 세우는 40일 캠페인]을 실시합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40일 캠페인의 목표는 목적이 이끄는 40일을 공부하는 동안 우리 안에 심긴 목적의 씨앗들에 물을 주고, 우리가 영적인 성숙과 이 땅에서의 의미 있는 삶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40일 동안 두 가지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함께 성취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모인 교회가 더욱 깊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 주변의 지역 사회 공동체에 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40일 캠페인]은 대그룹 모임과 소그룹 모임 그리고 개인훈련으로 진행합니다. 먼저 대그룹 모임은 주일 낮 예배와 새벽기도입니다. 저는 6주간 여섯 번의 주일 낮 예배 시간에 공동체를 세우는데 필요한 주제에 맞는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새벽마다 릭 워렌의 [공동체를 세우는 삶]의 내용을 나누며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소그룹 모임은 앞으로 6번에 걸친 셀모임 시간(한 번의 주일 저녁 특별 집회가 있기 때문에 총 7주간이 되겠습니다)에 [공동체를 세우는 삶] 소그룹 교제와 릭 워렌의 비디오 강의를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개인훈련은 릭 워렌의 [공체를 세우는 삶]에 나오는 내용을 하루에 한 장씩 읽고 목상일기를 씁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주어진 주제의 성경구절을 암송하도록 합니다. 이번 주에는 요 13:35입니다. 성경구절은 셀별로 구입한 열쇠고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창 1:26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형상을 따라 나의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으로 삼위일체로 존재하십니다. 마치 내가 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혼도 있고 영도 있는 것과 갖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보시니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인간을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창 2:18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좋지 않게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 주시고 가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가정 공동체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영적 가족공동체인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자녀가 출생하면 가정공동체에서 가족들로부터 보호와 양육을 받아야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면 영적인 출생을 하게 되는데 그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교회라는 영적 공동체를 통해서 보호와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가족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그 사람은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하나님이 영혼의 친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가정에서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믿음의 식구들인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자”인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마 22:37-40에 보면 주님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두 가지 계명을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고전 13:13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제일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나름대로의 목표를 세우고 그 분야에서 성공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진정한 성공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요일 4:11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 주시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받은 자가 이 사랑을 전하지 않고 담아두기만 한다면, 그 사랑은 고인 물과 같이 썩게 됩니다.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질됩니다. 우리도 아무조건 없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첫걸음이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방법이며, 주신 사랑에 대한 감격을 배로 늘리는 방법입니다. 

둘째,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려면, 서로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사랑은 의지적인 행동입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일을 선택해야 됩니다. 사랑을 감정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랑의 감정이 느껴지든지 느껴지지 않든지 상관하지 말고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사랑의 방법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아도 진리의 말씀대로 그를 축복하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 감정은 미워하는 감정이라 하더라도 진리를 따라서 그를 축복한다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이목구비가 다르듯이 다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갈등할 수 있으나 우리는 갈등을 극복하고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눈이 귀더러 “나처럼 돼라”고 말할 수 없고, 입이 손더러 “나처럼 돼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은 눈대로 귀는 귀대로 입은 입대로 성격과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가 눈이 된다면 세상을 잘 볼 수는 있겠지만 밥은 무엇으로 먹고 말은 무엇으로 하고 숨은 무엇으로 쉬겠습니까? 

사랑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해야 한다는 조건이 갖춰져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요한복음 13장-17장에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랑하라”는 말씀이 5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중 44번이 이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가장 하고 싶어하셨던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깨달은 사도 요한은 평생을 사랑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는 말년에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교회의 젊은 청년들이 사도 요한을 부축하여 강단에 모셔놓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도 요한이 강단에 서기만 하면 늘 “자녀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왜 늘 같은 말씀만 하십니까?” 이때 사도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만 잘 지키면 주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계명도, 더 아름다운 신앙도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저의 가족을 학대할 수 없습니다. 저를 사랑한다면 저의 가족을 귀하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요일 4:20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가족이 하나이듯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입니다. 저의 가족을 학대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저와 원수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가족을 해롭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10:40에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요일 3:14에서는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증거 즉 구원 받은 증거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그 사람 속에 성령께서 오십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다양한데 그 중에 한 가지 일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롬 5:5에서는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미워하려고 결심을 해도 오래가지 못해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굳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기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이것 역시 자신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마음에 큰 부담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 받은 사람들은 사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운전자의 성향에 따라서 자동차의 운전 상태가 달라지는 것처럼 구원을 받고 거듭난 사람은 자기 속에 거하시는 성령 때문에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아무리 보기 싫어도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가족끼리 다퉜다고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다퉜어도 가족은 가족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잘 하지 못했더라도 상대를 책임 져주는 것이 가족입니다. 제 아내는 큰 아들 모세에게 “엄마, 아빠가 없으면 네가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라고 말하고 작은 아들 하은이에게는 “엄마 아빠가 없으면 형이 엄마 아빠라고 생각해야 한다”라는 말을 가끔 합니다. 형은 형이기 때문에 동생을 책임을 져야 하고 동생은 동생이기 때문에 형을 존중해야 합니다. 두 아이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가족이 됩니다. 교회공동체 셀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영적인 가족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보기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의견이 맞지 않아서 다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관계를 깨고 교회를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만나기만 하면 견원지간처럼 늘 다툰다면 부모의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우애 있게 지낸다면 부모의 마음이 기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공동체, 셀공동체의 믿음의 식구들이 서로 다툰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많이 아플 것입니다. 반대로 서로 사랑하고 믿음 안에서 우애 있게 지낸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기쁠 것입니다. 믿음의 식구끼리도 의견충돌이 일어나고 다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동체를 깨거나 교회를 옮기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영생을 위한 연습이기 때문입니다 

훈련받는 자는 훈련의 목적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훈련의 가장 큰 목적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고전 13:8을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의 훈련을 통해서 배운 사랑은 영원한 세계까지 이어져갑니다. 

훈련을 받으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지금 당장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이 이 땅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의식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뒤로 미루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내일부터 공부하리라’고 결심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또 ‘내일부터 공부하리라’고 결심합니다. 이렇게 결심만 하다가 시험 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시험을 보기 때문에 점수가 형편없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루지 말고 즉시로 시행해야 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훈련되지 않으면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들이 헛될 수 있습니다. 고전 13:1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말씀합니다.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무슨 뜻입니까? 꽹과리를 잘 못 두들기면 굉장히 시끄럽습니다. 듣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음악이 아니라 소음입니다. 사랑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계속적으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훈련하되 상대가 받아드릴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싸웁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개는 반가우면 꼬리를 쳐드는 습성이 있습니다. 꼬리를 쳐들고 살랑살랑 흔들어댑니다. 그리고 싸울 때는 꼬리를 땅에 깝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반대로 반가우면 꼬리를 땅으로 깔고 흔듭니다. 그리고 싸울 때는 꼬리를 세웁니다. 그러니까 개가 고양이를 만나서 반갑다고 꼬리를 쳐들면 고양이는 싸우려고 덤벼드는 줄 압니다. 반대로 고양이가 꼬리를 깔고 반갑다고 하면 개는 긴장을 합니다. 서로 감정 표현 방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개와 고양이는 늘 으르렁댈 수 밖에 없습니다. 공동체 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사랑이 전달 되게 하려면 상대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일곱째, 세상에 보여지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을 알지도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교회를 판단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보고 복음의 진실성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요 13:35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의 영향력은 교인 수나, 건물크기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영적으로 뜨거웠으며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줄 정도로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Tertullian)이라는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 때 이러한 일화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무서운 흑사병이 전염되었습니다. 집집마다 전염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게 되자 장례를 치루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전염될까 두려워서 아무도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를 처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도 병이 전염될 수 있고 만약 전염되면 죽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가정을 방문하여 병중에 있는 환자를 위로하고 돌봐주고, 죽은 시신들의 장례를 치르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그리고 얼마나 세심하게 잘 돌보아 주었는지,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시체를 하나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알렉산드리아의 많은 불신자들은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종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라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사랑이구나’, ‘우리 교회에 시급하게 필요한 것도 사랑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강력한 교회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사람이 좀 적게 모이고 건물이 시원치 않고 돈이 좀 없어도 사랑으로 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탈무드에 ‘열두 가지 강한 것’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돌은 강하다. 그러나 쇠에 깎인다. 쇠는 불에 녹는다. 그 불은 물로 끌 수 있다. 물은 증발하여 구름에 흡수된다. 구름은 바람에 날린다. 모든 것을 날려 보내는 바람도 사람은 날려 보내지 못한다. 사람은 고민으로 파괴된다. 고민은 술로 달랜다. 잠은 술보다 강하다. 잠도 죽음만큼은 이기지 못한다. 죽음은 강하다. 그러나 죽음보다 강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랑으로 강한 교회를 만들고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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