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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답은옳도다 이를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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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본문 : 누가복음 10장 25 - 37절
         ♣  말씀 제목 :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맑은 가을 하늘을 주시고, 또 풍년을 주시고 이런 저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주일마다 이렇게 나와서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셔서 여러분이 '주여 나에게 이와 같은 많은 은혜를 주시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주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음성 듣게 하옵소서.' 하는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의 아픔 가운데 하나는 참 친구가 드물며, 참 이웃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많지만 친밀함이 없고 깊은 인간관계는 맺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21세기의 
강점은 트렌드는 정(情)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을 ‘고독한 군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세상입니다.  점점 이웃이 없어지고,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울타리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4무병에 걸려 있다고 말합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  친구, 이웃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지만 속마음을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이웃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지역은 농촌이라 전부 다 알면서 지낸다고 하지만 안다고 해서 참 친구요 참 이웃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인사합시다.  “당신이 제 곁에 있어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은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유대 나라 종교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시비를 겁니다.  
시비를 걸었던 부분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정통 랍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님을 늘 
무시했고, 주님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흔들어 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율법사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성경을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그가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직 자세히 모르시는 분은 이 말 자체가 요즘 우리가 쓰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율법사가 뭐냐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현대말로 하면 '율사(律師)'라고 할 것입니다. 
법을 전공한 사람, 또는 법 쪽에서 일을 하는 전문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유대 나라의 법이라는 것은  
전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전공하고 율법에 대해서 유권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고, 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을 일컬어서 율법사라 
이야기합니다.  율법사들에게도 계층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율법사, 그리고 율법사에서도 고위층에 
속하는 서기관, 그리고 율법교사가 있었는데, 오늘 예수님께 질문으로 시비를 건 사람들은 율법사였습니다. 
  보세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기가 막힌 질문을 했습니다. 비록 좋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이지만, 질문 하나만은 끝내주는 질문을 했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제일 먼저 물어야 하고,  또 제일 마지막으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면, 그리고 
반드시 정확한 대답을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많이 쓰는 말로 바꾸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좀 더 쉽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천국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아직도 이런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는 캄캄한 흑암 속에서 헤매는 
사람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좀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다 이 질문을 했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었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 율법사에게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 그러면 랍비여!  당신은 율법에 도통한 사람이니까 묻는데,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되었습니까?”  이 율법사는 자기가 전공한 부분이 나오자, 줄줄 성경을 외어대는 
거였습니다. “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  
 “대답 잘 하셨소. 이제 가서 그대가 알고 있는 그대로 그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잘 알고 있네. 됐구먼. 그러니까 네가 아는 대로 그대로 살면 된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이 구절 못 외우시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구구단 못 외우는 학생하고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본문을 일컬어 모든 율법을 전부 요약해서 표현한 말씀, 율법의 대강령, 율법의 주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27절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전인격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1계명부터 4계명까지 범할 리가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겠습니까?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에, 다 팽개치고 제 맘대로 놀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면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다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웃을 내 몸처럼만 사랑할 수 있다면 부모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범할 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죄를 범합니까?  그러니까 모든 율법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율법 하면 보통 구약 성경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이야기합니까?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소위 모세 오경이라고 하는 부분을 들지  않습니까?  결코 만만한 분량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 끝까지 읽으려면 아마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 내용도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데 이 율법사가 그런 모세 오경에서 영생 얻는 방법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뽑아냈으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백 점 짜리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율법사가 대답은 그렇게 빈틈없이 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아는 것만큼 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은 가르치면서 자기는 가르칠 줄 모르는 위선자요,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인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는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이 율법사가 순순히 물러갈 리가 없습니다.   다시 주님께 묻습니다. 
 “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잘 알겠고 당연한 일인데,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이웃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겪은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악한,  매우 흉포한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악한 강도들은 이 사람을 에워싸고 넘어뜨린 후에, 옷을 다 벗겨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잔인하게 때려서 사람을 반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못된 강도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그냥 버려두고 그 사람이 소유한 짐승이며, 돈이며 모든 것을 빼앗아 
달아나 버렸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자기 직무를 마치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여리고에 살고 있었으며, 자기 당번이 되면 그 기간 동안만 예루살렘에 올라가 일하고 일이 끝나면 집이 있는 여리고로 내려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던  제사장이 그 길에서 강도만난 사람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러 다른 길로 피하여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피해 달아난 것이 제사장의 집무가 급해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조금 후에 한 레위인이 그곳으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도 다른 길로 피해서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이 말 “불쌍히 여겼다.” 말이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헬라인들은 사람의 감정이 내장, 즉 심장, 폐 간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헬라말 스플랑크니조마이  이 내장들이 다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심장, 간, 폐들이 다 아파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겼는가를 보여줍니다.  
특별히 이 말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불쌍히 여김이 그로 하여금 어떤 일을 행하게 하는가를 이제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사마리아 사람은 나귀에서 내려서 강도 만난 그 사람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당시에 기름은 안정제로 쓰였고,  포도주는 알코올 성분 때문에 방부제로 썼다고 합니다.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는 종기 치료법을 설명하면서 “부드러운 양털로 싸매고, 포도주와 
기름을 뿌려라.” 했다고 합니다. 또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보십시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얼마나 진심으로 
이 사람을 위하고 사랑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응급치료를 한 후에 사마리아 사람은 나귀에 강도 만난 이를 태우고, 자기는 걸어 주막이 있는 데까지 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풀 한포기 없이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사막인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는 걷고 환자를 
나귀에 태우고 갑니다.  그 다음날 사마리아 사람은 주막을 떠나면서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환자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꼭 갚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떠났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요즈음 돈으로 계산하면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안이란 사람은 주후 약140년경 이탈리아에서 여관비와 식비를 다해서 하루 1/2 아사리온 이었다 합니다.  
  한 아사리온은 한 데나리온의 1/32이 되는 액수입니다.  이렇게 계산해 볼 때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말은 두 달 분의 여관비를 주었다는 말이 되잖아요.  우리의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계산으로는 너무 무리한 
짓거리인줄 모르지만 사마리아 사람의 연민이 얼마나 큰 가를 넉넉히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주석가인 푸룸머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잘못 보면 비유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웃이 누군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적당히 꾸며서 한 이야기로 듣기 쉽다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단순한 비유정도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네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네 사람 중에 세 명이 유대인이고 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앙숙의 관계였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어요. 더러운 피가 섞였다고 해서 완전히 인간 이하로 멸시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서러움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 하면 이가 갈리는 것입니다.  
 자다가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종족은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기나긴 세월을 
원수지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유대인이요, 율법사도 유대 사람이요, 지금 예수님을 둘러서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다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틈바구니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미화하고 유대인은 전부 다 악역으로 몰아붙이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그 자리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갈까요?  속된 말로 뼈도 못 추릴 수 있는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사람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환히 들여다보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질문을 던진 율법사를 위시하여 그 자리에 
서 있는 상당수 사람들이 언젠가 저질렀던 일을 끄집어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이 바로 너  아니냐? 너도 한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냐?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냐?"하는 식으로 그들의 양심을 찔러 변명을 못하도록 이야기를 끌고 
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기가 질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이야기를 단순히 만들어낸 비유 정도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를 다 하신 후에 “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주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 당신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 예, 그거야 자비를 베푼 자가 아니겠습니까?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 그렇다면 당신도 가서 이와 같이 하시오.” 하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주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나쁘고 못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보통 사람들이면 다 그렇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나는 누구의 모습을 더 많이 닮아 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입니까?  아니면 
제사장입니까?  레위 인입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는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알고 있어요.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저보다도 훨씬 앞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평신도들 많습니다. 반면에 불행하게도, 제사장이나 레위인 비슷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과 레위 인은 지금 성전에 가서 한 달 동안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얼마나 많은 시편의 말씀과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었습니까?   예복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며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찬송했습니까?    쉽게 말하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 많이 받고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막상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을 보았을 때 그들은 슬금슬금 피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은 은혜란 도대체 무슨 은혜입니까? 그 은혜가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오늘 우리도 잘못하면 그들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와서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돌아가지만, 막상 가정에 돌아가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서 우리 자신이 
정말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실천하느냐 묻는다면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관심입니다. 
어찌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까?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으슥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강아지 새끼라도 죽어 가는 것을 보면 측은해서 뭔가 좀 도와주고 싶을 텐데,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그대로 지나갈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냉담한 가슴에서 나오는 이런 무관심이 오늘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아는 냉혹한 이기주의가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가 점점 무서운 무관심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무관심이 제사장의 마음에 있었고 레위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헷셀이라 하는 성경학자가 구약에 있는 선지서들을  연구한 다음 참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움직였던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남긴 위대한 공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관심의 죄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지는 무관심에 하나님은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외친 사람들이 선지자들이다." 그는 이어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무관심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 분의 말을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옳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적용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를  보고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생활이 궁핍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나 병이 들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밤낮 없이 시달리는 사람들, 곁에 앉아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런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피하면  
안됩니다. 요한1서 3장 18절,19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행동할 때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적으로 강도 만나서 죽어 가는 우리  이웃을 보고 무관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힘들 때 위로해 주는 이런 자선에서만 끝나면 그것은 반쪽 사랑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데까지 가야 온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참 이웃이 되기를 원하면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염려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영적으로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 붙들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매일매일 끌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지역 전부를 둘러 본다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종종 예배시간에 나와 앉아있으면서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내가 비정한 예배자가 아닌가, 내가 정말 하나님이 미워하는 예배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 안 믿는 식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웃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놔두고 나 혼자 와서 두 손 들고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기도하고 할렐루야 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얼마나 
받으실까요?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고 예수 안 믿는 사람에 대해서 안타까와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우리만 좋아라고 즐겁게 예배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받으실까요? 
  물론 가족전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붙들고 교회 가자고 해서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우리의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와서 앉아있어도 마음은 안 믿는 내 남편, 안 믿는 내 자식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두고 나 혼자 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나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주여, 어떻게 하든지 그 영혼을  구원하게 해 주옵소서.'하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여보, 교회 갔다 올게요.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요. 밥은 저 식탁에 다 준비해 놨어요. 
알겠어요? 저 갔다 와요." 하고는 혼자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돌아가서 "여보, 나 교회 갔다 왔어요. 식사 잘 했어요?" 하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야 없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그런 식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 믿는 분이 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 인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죽어 가는 사람을 내버리고 혼자 도망가는 사람이나 뭐가 다르냐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입니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른 척 하십니까?
오늘 당장 복음 전해서 구원하지  아니하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 가족 중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보고 무관심하고, 믿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제사장이나 레위 인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오늘 당장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불러 
가신다면 그 사람들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저는 입에 올리기가 싫어서 말을 잘 안 합니다만 그들이 
갈 곳이 지옥밖에 더 있습니까?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이 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참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양계장을 하고 있었는데, 양계장에 피워둔 연탄 난로에서 불이 나서 삭풍이 불어 닥치는 12월 한밤중에 대화재가 났습니다.  난데없는 불길에 휩쓸리게 되자 
거기서 기르던 닭 500마리와 앙고라토끼 200마리가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다가 전부 내복 바람으로 뛰어나왔지요.  거기에 와서 교육을 받던 생도들 몇 십 명도 정신없이 
뛰어나왔습니다. 나와 보니까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모피용 앙고라 토끼 털에 불이 옮겨 붙으니까 
완전히 새빨간 폭탄이 되어버렸습니다. 닭은 닭대로, 토끼는 토끼대로 막 날뛰니까 이건 생지옥입니다.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불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김 장로님이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 다. "여러분, 우리 이 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저 광경을 보면서 살아있는 교육을 받읍시다." 
이젠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지라 전부 멀찌감치 앉아서 닭들과  토끼들이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불에 
타 죽어 재가 되는 그런 끔찍한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이미 때가 늦었는데도 살아보려고 아우성을 치는 닭이나 토끼들을 보면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육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날, 그 영혼은 속절없이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에 떨어져 울부짖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불길이 다 사그라진 후에 김 장로님은 교육생들을 이끌고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때 교육생으로 와 있던 사람 중에 자기 손으로 1천 명 이상 되는 깡패를 길러내고 경찰관까지도 폭행을 한 전력이 있는, 대전에서 왔다는 깡패 두목이 그 불타는 양계장의 현장을 지켜보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교육생 중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임영철이라는 청년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법관 
되는 것을 포기하고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와서 농군이 되었고 나중에는 김용기 장로님의 첫째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살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게 되면 그들이 가게 될 곳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강도 만난  사람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을 당해야 하고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이웃을 보고 우리가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힘들고 귀찮고 돈이 들어도 그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곁에도 강도 만난 이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고 계십니까?   
원수 마귀에게 끌려 다니며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가운데,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과 평강을 맛보지 
못합니다.  어두움과 죄악에 허덕이는 이웃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르고, 주님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이웃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또한 뜻하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 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이웃도 있습니다.  홀로 외로이 무거운 세상 짐을 
지고 신음하는 자가 바로 내 곁에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 그 사람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기도 올리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주님의 마음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시는 
주님께 제가 되겠습니다라고 밝히 대답할 수 있는 택전에 속한 믿음의 식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제가 당신 앞에 나아갈 때 나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복 주시되, 할 수만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불행한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시고
또한 이 시간 병상에 있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사, 저들에게 편한 잠자리와 병이 치료되는 밤이 되게 하옵소서.  마음이 어리석은 자가 있다면 긍휼히 여기사, 저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게 지켜주옵소서.   가난한 자와 집이 없는 자, 외로운 자, 옥에 갇힌 자, 재난을 당한 자와 억눌려 있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와 집을 떠나 있는 자들을 복 주시옵소서.  지금도 여전히 원수 마귀에게 잡혀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에게 주님의 심장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택전의 성도들로 인도해 주시옵기를 따뜻한 가슴을 
가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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