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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 2: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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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 2:18~22)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리 마태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는데, 마침 그 날은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본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지듯 말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이 시간 저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는 제목으로 주님의 말씀을 상고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듯이 그리스도인은 새 삶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구약 시대는 막을 내리고 메시야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는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경우에 과거 왕이 다스리던 봉건시대에는 양반, 상민, 천민의 계급이 존재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양반이 아니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만민이 법 앞에서 평등한 자유민주주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1조에 보면,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 조항을 본다면 놀라서 기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만민평등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새 시대의 원리에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새로운 세상을 여신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시대는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군대의 힘을 통해서 임한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나팔을 불어서 공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궁이나 부잣집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메시야가 오셨건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먼 나라에서 온 몇 명의 동방박사들과 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찾아와 경배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9절 이하에 이르기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수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영접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갈릴리의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 나섰습니다. 세리 마태도 세관에 사표를 던지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하여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천년 동안 각 나라와 민족 가운데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일어난 새로운 변화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으면 사회적인 신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원리가 그 사람 속에서 작용합니다. 그리하여 거짓과 허식을 배격하고 참되고 진실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의 원리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금식한 것이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금식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앞서 광야에 가셔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골방에 칩거하면서 사흘 동안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은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해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경건한 성도들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준비하기 위해서 또는 회개 자복하는 의미에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의도가 바르지 못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간절함을 보이기 위한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금식을 자주하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금식하는 표를 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관해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제 누구든지 주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얻고 천국 시민이 되는 새 시대가 열렸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믿지 않고 여전히 옛 시대의 원리인 율법 아래 머물러 살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들이 이레에 두 번 금식한 것이 정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심으로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새 포도주가 발효하듯이 내면적으로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 같은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먼저,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에는 물질만능주의의 가치관을 갖고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는 목적이 달라집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돈벌이와 육신의 향락이 살아가는 목적이었는데, 예수 믿고 나자 하나님을 섬기고 선을 행하면서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는 맛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으로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히브리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켜온 가문 출신에다, 어려서부터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해 왔고,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또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눈에 나사렛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처치해야 할 이단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때까지 옛 시대의 원리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의 심령은 낡은 부대와 같았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열렬한 설교를 들었으나 오히려 반발심만 더했습니다. 결국 그는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사람들의 증인을 자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권한을 부여 받고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메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일행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희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모두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때에 소리가 들리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바울은 비로소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심령이 낡은 부대에서 새 부대로 바뀌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7)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소개했으나, 이제 우리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기십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진심으로 고백하십니까? 이 모든 질문에 아멘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려면 우리 심령이 낡은 가죽부대와 같아서는 불가능합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벗어버려야 하고, 새 신을 신으려면 헌 신을 벗어야 하듯이, 우리는 옛 사람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금식을 할 때에도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58장에 보면, 유다 백성들이 금식을 하기는 하는데 그저 습관적으로 하고 온갖 악을 행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오락을 즐기고 종들에게 온갖 일을 시키고,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주먹으로 치고 약자를 괴롭혔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단지 밥을 굶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런 금식은 다이어트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신앙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죄와 불충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금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행동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금식하면 더 겸손해 져야 합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금식을 자주하는 것을 자랑하고, 금식을 오래 한 것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금식을 한 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어서 금식을 하지 않는 사람을 깔봅니다. 이는 그 사람의 심령이 아직도 낡은 가죽부대와 같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해야 합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많은 사람이 칭찬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허탕입니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예배는 허탕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참석한다면 그 역시 허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상을 섬긴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우상 숭배는 비단 나무나 돌이나 철로 무슨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형의 우상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고 하셨습니다. 현대는 재물 곧 돈이 우상이 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믿는 사람들이라도 재물에 집착하다보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작금에 전 세계가 미국의 금융 위기의 영향을 받아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현 세계를 움직이는 경제 원리는 신자유주의인데, 이것은 가진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겠다는 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계속되면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자로 나누어집니다. 소수의 부자가 막대한 자금력을 가지고 전 세계의 경제를 가지고 장난을 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세계 경제가 파탄 나고 말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우려하던 결과가 현실화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이 오늘날 황금만능주의의 본산이 되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그 같은 분위기는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 미국에서는 번영의 복음이 유행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 가운데 첫째가 현세적인 번영을 누리는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번영의 복음을 신봉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만들어 섬겼던 금송아지의 현대판에 불과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현세적인 복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번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복음의 본질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과 재능과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완고함을 버리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낡은 가죽부대가 새 포도주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가죽이 오래되어 신축성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지고 뻣뻣해졌습니다. 이를 우리 마음에 비유하면, 마음이 완고해지고 둔해지고 좁아진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완고해 지면 제 주장만 옳다고 내세울 뿐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마음이 둔해지면 진리를 말해 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마음이 좁아지면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좋아합니다. 

더욱 나쁜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완고하게 군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하면 자기 고집을 꺾고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 뜻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새 가죽 부대와 같은 마음은 겸손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겸손한 마음은 신축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납할 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폭적으로 복종합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처음부터 낡은 부대인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다 새 부대였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낡아진 것입니다. 가죽 부대는 낡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한번 낡아진 것을 새 것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낡도록 사용하다가 찢어지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은 다릅니다. 처음 전도 받고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랑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충만하고,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든 즐겁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거듭나서 새 가죽부대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타성에 젖기 시작합니다. 주님께 대한 첫 사랑이 식고, 교회생활에 익숙해짐에 따라서 형제들의 허물이 보입니다. 입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 원망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낡은 가죽부대처럼 변질되어 간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이 같은 형편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이처럼 타성에 젖고 완고해 진 마음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먼저, 알아 둘 것은 임기응변으로 난관을 모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헌 옷을 깁기 위해 생베 조각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낡은 가죽부대가 터졌을 때 거기에다 새 가죽을 대고 기운다고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임시방편으로는 새 포도주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일은, 우리의 마음은 가죽부대와 달라서 낡은 부대처럼 되었더라도 다시금 새 부대처럼 변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10장 12절에 보니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묵은 땅’은 타성에 젖은 완고한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런데 묵은 땅을 쟁기로 갈아엎듯이 타성에 젖고 완고한 마음을 회개함으로써 새 마음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셔도 마음이 돌짝밭과 같고 가시가 자라는 밭과 같다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을 기경해서 교만과 아집과 불순종과 의심과 같은 돌멩이들과 가시나무의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고 했는데, 이는 그가 매일 회개를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힘썼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육신은 나이가 듦에 따라 늙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보톡스 주사를 맞고 주름을 제거해도 젊은이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은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움을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나이가 젊어도 마음을 방치해 두면 완고하고 교만한 상태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회개를 통해서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많은 비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교회가 반성할 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지만, 그렇다고 타종교를 비방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구원론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면 개의치 말아야 하겠지만, 기독교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해서 비난을 받는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까? 그 때는 기독교인이 소수에 불과하였고 핍박도 받았지만 참신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인의 수가 천만이 넘었으나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역부족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기독교가 수적인 성장에 도취되어 타성에 젖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복음 역시 언제나 새 포도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우리가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을 태만하게 한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 포도주인 복음을 담기에 합당한 새 부대가 되기 위해 매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완고함을 버리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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