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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사귐 (요일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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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귐 (요일 1:5~10)


1. 초록동색(草綠同色)

판소리 《춘향전(春香傳)》에 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옵니다. 
변 사또의 생일날,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출두하여서, 변 사또와 그 지방 탐관오리들을 모두 잡아넣습니다. 그러고 나서 옥에 갇혀있던 춘향이를 부릅니다.

몽룡: 너는 기생의 딸인데, 왜 본관사또의 청을 듣지 않았느냐?
춘향: 저는 기생도 아니고, 또 이미 지아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또의 청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몽룡: 나는 지나가는 어사이니, 내 청도 거절하겠느냐?
춘향: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양반들은 다 똑같은가 보우! 차라리 내 목을 베시오!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틀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사가 된 이몽룡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 할 때에 춘향이가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초록동색(草綠同色)”이라는 말의 뜻은 ‘풀색과 녹색은 같은 색’이라는 뜻으로 ‘당신도 양반이라 변학도와 같은 인간이군!’하는 말입니다.

이 초록동색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유유상종(類類相從)”입니다. 유유상종은 《주역(周易)》의 〈계사(繫辭)〉 상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방이유취 물이군분 길흉생의(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 즉 "삼라만상은 그 성질이 유사한 것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 나뉘어 산다. ․․․ "고 했습니다. 

이 말이 그 후, 춘추전국시대의 순우곤과 관련한 한 고사와 연결되면서 더욱 확실한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순우곤에게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인재를 찾아 등용하도록 했습니다. 며칠 뒤에 순우곤이 일곱 명의 인재를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자 선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한 인재를 한 번에 일곱 명씩이나 데려 오다니,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러자 순우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같은 종의 새가 무리지어 살듯, 인재도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인재를 모으는 것은 강에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순우곤의 말인즉슨 인재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 사람의 인재를 만나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지내기 때문에 여러 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초록동색, 유유상종의 원리는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즉 어떤 사람이 사귀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도 여러분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며, 반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면 ‘성도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그리고 그 하나님과 어울리는 성도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2. 하나님과 사귀는 자

오늘 본문은 성도를 “하나님과 사귀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귄다”는 말의 성경 원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코이노니아(κοινονια)”입니다. 저는 그동안 여러 차례 이 말을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당시 이 말은 상업적으로 ‘동업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동맹, 혈맹 관계에 있는 나라나 집단’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숭배하는 신과의 합일, 또는 같은 신을 섬기는 자들과의 연합’ 등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물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친교, 교제’ 등의 의미도 가집니다만, 그러나 그 기본적인 의미는 '함께 소유하는 것,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사귐”이란 ‘같은 것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끼리 ‘친밀하게 지내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사귐”이라는 말이 유독 많이 사용된 성경이 요한일서입니다. 1장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1장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에 나오는 “사귐”이 바로 “코이노니아”인데요. 요한일서가 말하는 사귐은 우선적으로 성자와 성부의 신비적 결합을 뜻합니다. 즉 성부와 성자는 우리 흔히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계시고, 그러한 신비한 연합에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런데 3절은 말하기를 성도가 주님을 믿으면 성부와 성자의 연합과 교제처럼,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도 그러한 연합과 친교가 나타난다고 하면서 이 “사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부와 성자의 신비하고 거룩한 연합과 교제처럼 주님을 믿음으로서 여러분도 그와 똑같은 신비하고 거룩한 연합과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사귀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친밀하게 사귀는 사람은 서로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귀지는 않지요. 그리고 사귐, 교제가 더 깊어지고 친밀해지려면 상대방을 더 많이 깊이 알아가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삶에 대해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교제가 깨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에게 그에게 맞는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하려면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으로 들어가도록 오늘 본문이 전하는 소식이 있습니다.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주님은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빛이 무엇이며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❶ 우선적으로 빛은 ‘발광체’입니다. 스스로든 아님 다른 빛이나 연료에 의해서든 빛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둠을 물리치고 밝히는 기능을 합니다. 그리고 이 빛은 따스함과 더불어 평안을 주는 기능을 합니다. 이 두 가지 기능이 잘 설명된 것이 광야 이스라엘의 불기둥입니다. 

불기둥의 역할은 암흑천지의 광야길을 걷거나 머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영지를 밝히는 역할을 했고, 불기둥은 또한 광야의 갑작스런 기온 저하를 이길 수 있도록 따뜻함을 주었으며, 그리고 그 불기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심하고 걷거나 머물 수 있었습니다. 또 빛에는 살균성이 있습니다. 빛이나 열이 해로운 균을 죽이는 것이죠. 그리고 공개성도 있습니다. 어둠에 묻혀있던 것, 평소에 쉽게 볼 수 없는 것을 밝히 드러냅니다. 또 빛은 자연의 대지에 생명을 공급하고 식물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아무튼 빛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어둠만 존재하는 세상에는 생명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집을 지을 때 집의 방향을 남쪽으로 한 것은 양질의 햇빛이 집안에 많이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햇빛이 많이 들어오면 올수록 집안이 더 밝아지고 가족들의 건강에 더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살이 많고 우울증과 신경통 환자가 많은 나라는 덴마크, 스웨덴, 놀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나라들로서, 이 나라들은 비가 자주 내리고, 안개가 자주 끼고, 겨울이 길고, 매우 추우며, 바람이 많고, 낮의 길이가 3시간 밖에 안 되어서, 인간이 살기에 최악의 조건을 구비한 나라들입니다. 그래서 해가 비추는 계절이나 햇볕이 좋은 낮 시간이면 남녀노소 가길 것 없이 누구나 일광욕을 즐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건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죠. 이처럼 빛은 매우 소중한 존재로 인간의 영과 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바로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이 세상을 비추시는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혼을 살리는 빛이며, 육을 풍요롭고 평안하게 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빛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도록 비추는 빛입니다. 그리고 빛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밝히 비추어 주신다면 인생의 어려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앞으로 전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눈물과 한숨, 질병과 고통의 연속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삶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빛이신 주님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대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주저앉을 것이며, 길을 나섰다가는 장애물을 만나 인생이 무너져 내리거나 좌초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주님께서 빛이시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과 이 땅의 삶과 가정과 사회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의 물리적인 빛이 없어도 세상 자체의 존립과 인간의 삶이 불가능한 것처럼, 빛되신 주님이 없어도 모든 것들은 어둠의 장막에 갇혀 제대로 살 수가 없을 것이며 존재하기조차 힘들 것입니다. 

❷ 그런데, 오늘 본문이 하나님을 빛이라고 하는 것은 요한일서 전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빛은 교리적으로 진리를 뜻합니다. 당시 교회는 교리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세력들로 인하여 괴롬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빛이란 곧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단 사설을 전하거나 그것을 따르는 것은 어둠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빛이란 성도가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사랑은 빛이신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현재 누리고 있는 성도는 그 역시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든 그 누구든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어둠의 사람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요한일서가 “하나님은 빛이시니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는 뜻입니다. 

2) 성도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이처럼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빛이신 하나님과 그 사귐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님은 당신처럼 우리도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적극적으로 그 빛을 비추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빛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빛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이죠. 빛의 자녀가 빛의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다운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빛이란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는 생활과 그 열매를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즉 성령의 열매 등입니다. 에베소서 5장 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 말씀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빛을 따르기 때문에 항상 선한 일을 좋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기를 즐겨합니다. 

이와 반대로 로마서 1장 29절 이하에서 말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등의 육신의 일과,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서 말하는 음행과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의 육체의 일은 어두움에 속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빛의 자녀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니 아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 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답게 변해갈 것이며, 그리고 그 삶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어느 분의 글인지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 바람이 찬 봄날, 화분을 손보러 빨간 벽돌집 뒤쪽 공터로 나오니 다섯 살배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여 앉은 아이들이 자기의 꿈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 내 어린 시절의 한 자락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아이가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야, 너는 뭐가 될래?" "그래, 빨리 정해라." 
친구들이 지친 듯 쪼그리고 앉아 재촉하는데도 그 아이는 망설이기만 했다. 그때 내가 빙긋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빨리 말해. 친구들이 기다리잖아." 
그러자 머쓱해진 그 아이가 뭔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서더니 햇볕이 잘 드는 벽으로 뛰어 들어가 기대어 섰다. 
"난 햇볕이야, 너희들 모두 이리로 와 봐." 
어리둥절해 하던 아이들도 모두 달려가 그 아이 옆에 섰다. "와, 따뜻하다" 하며 벽에 붙어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정겨웠다. 나는 햇볕이 되고 싶은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우리 할머니는 시장에서 나물을 파는데 할머니가 앉아 계신 곳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아요."
그 아이는 잠깐 동안만 할머니를 비추고는 금방 다른 데로 옮겨가는 햇볕이 얄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햇볕이 되어 할머니를 하루 종일 따뜻하게 비춰 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아이를 꼭 안아 주었는데 햇살을 가득 품은 것처럼 따뜻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빛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 삶의 추위를 느끼는 사람, 외로운 사람 등을 밝게 해주고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한 노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집이라기보다 움막이라고 해야 좋을 만 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온통 먼지투성이에다 이불이나 옷가지들은 언제 빨았는지 알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헛간 같은 방에서 노인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방을 치워 드리죠." 
노인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당장 일을 시작했습니다. 바닥을 쓸어내고,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옷가지는 빨아 널고, 더러운 곳은 모두 소독했습니다. 그렇게 청소를 하다 테레사 수녀는 구석에서 조그만 등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먼지에 뒤덮인 낡은 것이었습니다. 
"이 등은 뭐죠?" 
"손님이 오면 켜는 등이라오." 
테레사 수녀는 노인의 등을 닦아주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동안 켤 일이 없었던 모양이죠?" 
"몇 년 동안 한 번도 켜지 않았소. 누가 죽어 가는 늙은이를 만나러 오겠소." 
노인은 가족도 없이, 또 찾아오는 사람도 하나 없이 그렇게 쓸쓸히 살아왔던 것입니다. 노인은 먹을 것보다 사람이 더 그리운 듯 했습니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는 말했습니다. 
“제가 자주 오겠어요. 그러면 저를 위해 등불을 켜주시겠죠?" 
"물론 켜고말고. 오기만 한다면․․․" 

그 후, 테레사 수녀는 종종 그 노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 못할 때는 동료 수녀를 대신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의 방엔 거의 매일 등불이 켜졌습니다. 노인은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고, 노인은 더욱 건강해졌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노인은 편안히 죽었습니다. 노인은 죽으면서 곁에 있던 수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테레사 수녀에게 전해주구려. 테레사 수녀는 내 인생에 등불을 켜준 사람이라고․․․" 

누군가의 등불이 되어준다는 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주위가 환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 잃었던 행복을 찾는 사람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누군가 삶의 의욕을 되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웃음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산다면, 결국은 그들이 참 빛이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사귀는 자 답게

설교의 시작에서 말씀드린 대로, ‘초록동색, 유유상종’,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자 일반적인 인간사의 흔한 모습이요 무엇보다 영적인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들입니다. 맞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빛이신 하나님는 닮지 않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사귀고 늘 만나는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분입니다. 그 특별함을 오늘 본문은 “빛”이라는 한 마디로 설명했습니다. 빛의 모든 특성이야말로 하나님을 너무나 잘 설명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삶도 특별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서 빛이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격과 생활과 영성과, 가정과 직장, 모든 만남과 하는 일에서 빛이 나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 세상을 밝히고 어둠을 물리치셔야 합니다. 아멘? 주위 사람들과 온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편하게 하는 빛이 되셔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으로 인하여 세상의 죄악된 것들이 없어지고 사탄의 권세와 궤계가 물러가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들 때문에 여러분 주변이 더욱 풍성하게 되어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이 빛으로 살면 반드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자라는 너무나 놀랍고 큰 여러분이 얻은 신분에 맞는 삶을 이제부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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